brunch

매거진 책 소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환 Jul 15. 2019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키신저 옹에게 배우는 세계 질서

개인적으로 국제 관계학은 잘 모르는 분야다. 공부를 좀 더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해왔다. 심리학을 전공한 내 눈에, 기본적으로 국제 관계란 수없이 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불가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강렬한 호기심이 이 책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미중 무역 분쟁,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한일 무역 갈등은 모두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일이 아니던가.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고픈 소박한 호기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깨달았다. 엄청난 내용이 사골국물처럼 응축되어 있는 매우 훌륭한 책이며, 다 읽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저자 헨리 키신저 옹(1923~)은 닉슨 행정부 발족과 함께 대통령 보좌관 겸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여 국무부의 통상적인 외교경로를 무시하고, 이른바 ‘키신저 외교’를 전개했다. 1971년 7월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닉슨 방중(訪中)의 길을 열었고, 이어서 국무장관에 취임, 1972년 중동평화 조정에 힘썼으며,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접촉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그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두산 백과 링크). 한 마디로 냉전 시대 이래 국제관계 분야의 산 증인이자 범접 불가능한 레전드다. 책을 읽으면 레전드의 삶에 응축된 엄청난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만날 수 있다. 관심 있는 분께는 필히 일독을 권하는 바다.


저자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세계 질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우리 시대의 세계 질서로 통하는 것은 약 400년 전 서유럽에서 구상된 베스트팔렌 체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30년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모인 90여 개 국가 대표들의 회담으로, '국가 주권, 상호 불가침, 다원성'을 전제로 한 세력 균형을 도모했다. 베스트팔렌은 구 시대의 종교 권력에 기반한 질서를 해체한 위에 세워진, 실리를 추구하는 주권국가들의 연합체이자 상호 견제 체제였다. 이후 베스트팔렌은 유럽 강대국들의 팽창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현대 국제 외교 체제의 원형이 되었다.


책은 유럽, 중동, 아시아, 미국의 순으로 세계 질서를 다룬다. 저자는 각 지역 역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조망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지역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고, 오늘날의 세계 질서와 어떻게 공존하거나 경합하는지를 설명한다. 매우 많은 정보를 압축하면서 통찰과 지혜를 같이 담아내는 통에 이 책은 도저히 빨리 읽으래야 읽을 수가 없다. 저자의 문체 또한 매우 미려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번역의 질은 다소 아쉽다. 여하 간에 매우 훌륭한 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책을 읽으며 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글을 적어본다.

 


1. 종교 권력을 현실 정치에서 퇴장시킨 사회가 번영을 선점했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30년 전쟁 - 구교와 신교 진영으로 나뉜 유럽 국가들의 격전 - 끝에 찾아왔다. 회담장에 나온 외교관들은 종교적 교리나 명분이 아닌 실리를 놓고 대화했다. 이 책의 주제와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베스트팔렌은 교회 권력이 현실 정치의 뒷방으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했다. 유럽 사회는 다른 대륙 사회 -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 보다 앞서 근대화를 실현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다른 사회는 피정복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2. 왕권을 퇴장시키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사회가 번영을 선점했다.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의 독재와 패전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는 중세 유럽을 송두리째 흔들며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다. 이후 유럽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 국가들은 거의 모두 제한적 민주주의인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다. 러시아는 20세기 초반까지 차르 제정을 유지하다 일본에 패퇴한 뒤 공산주의 혁명을 맞았다. 러시아보다 사정이 훨씬 좋지 않았던 약소국 왕조들은 입헌 군주제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심지어 아시아의 맹주 중국조차도 영국에게 홍콩을 뺏겼다.



3. 그 외의 다른 요인 - 과학 혁명, 신대륙 발견, 산업 혁명


물론 번영을 이룬 사회의 동력은 다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서양 세계는 과학 기술의 발달, 신대륙 발견, 산업 혁명 등의 호재가 결합되며 16세기 이후 다른 세계를 압도하는 급속도의 팽창과 발전을 구가했다. 이 발전을 촉진한 모든 요인은 서로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정치권력에서 교권과 왕권의 퇴장은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권과 왕권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다. 기존의 권위와 세계관에 대한 부정을 용납하지 못하고, 최고 권력자의 의사 결정에 대한 투명한 비판과 수정이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어떤 똥멍청이 한 두 명이 손쉽게 나라를 말아먹는 일이 가능해진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의 발언과 상호 비판을 허용함으로써 그런 똥멍청이짓을 하지 못하게 견제한다. 때로 그 비효율적인 토론과 투표 과정의 지난함이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고, 전염성 강한 메시지가 여론을 호도해 버리는 등의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제도로 민주주의를 도입한 사회들은 교권과 왕권을 유지한 사회보다 월등한 발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천자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을 통치하되 중국 땅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일로 치부하여 국가의 가능성을 자신의 세계관 안으로 닫아놨다. 그 너머의 세상은 알 가치도 없는 오랑캐의 일이었으니까. 16세기 오스만투르크는 유럽 국가들의 국력을 모두 합친 것만큼 강했기에 프랑스와의 동맹을 상호 조약이 아닌 소국에 대한 호혜로 표현했지만, 왕실 정통파가 근대화에 저항함에 따라 점차 유연성을 잃고 한 세기 뒤엔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더 단순하게 일반화하면, 닫힌 사회를 깨고 열린 사회로 나아간 국가들이 앞서 번영을 누렸고, 세계 질서를 논하는 테이블에 앉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4. 혁명은 바람직한 것인가?


준비되지 않은 혁명 뒤에는 언제나 흥분의 도가니 속에 권력 공백 상태가 뒤따랐고, 이 권력 공백은 대규모의 폭력과 참사를 낳고 뒤이어 독재가 찾아왔다. 그 독재자의 역량이 뛰어났던 경우는 나폴레옹의 프랑스처럼 유럽 전역을 점령하는 국력을 떨쳤지만, 그렇지 못했던 대부분의 경우는 혁명의 기본적 가치도 잃어버린 채 혁명 이전보다 더 비참한 사회로 전락하기도 했다 - 마오쩌둥의 중국, 이란 혁명과 호메이니의 등장, 이집트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기존 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일은 민주국가 성원의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되지만, 혁명의 결과가 항상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감상적 문구로는 이런 무거움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러니 폭력은 폭력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사용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인 것이고,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치 제도와 문화를 잘 만들고 가꿔가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이건 결코 끝나지 않는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5. 이데올로기, 생각의 전염, 맹신.


키신저 옹은 책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모든 시대에는 중심 사상이 있다.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다수의 사건을 설명해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거나 위로를 건네는 일단의 신념 체계 말이다.

중세의 중심 사상은 종교였다. 계몽 시대의 중심 사상은 이성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민족주의였다. 우리 시배를 지배하는 개념은 과학과 기술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에게 유례없는 번영과 행복을 안겨주는 동시에 파괴적인 결말의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이 중심 사상들은 맹목으로 변하는 순간 종교적 광신을 낳을 수 있다. 그 종교적 광신은 인간의 잔학성을 극한까지 끌어내면서도 도덕적으로 면죄부를 준다. 가까이 한국 전쟁을 예로 들어보면, 당시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개념조차 생소했던 자유주의, 공산주의라는 허구의 개념들에 충성을 바치고 같은 민족끼리 처참한 살육을 저질렀다. 당시 전쟁을 승인한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들 -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 - 은 각자의 정치적 득실에 따라 행동한 것이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찌꺼기는 여전히 살아 남아 남북의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를 매혹시켰던 민족주의는 어떠한가. 식민 열강들에 지배받던 피지배 민족들에게는 주권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호소력이 있었지만, 2차 대전 종전 이후 민족주의는 수많은 부작용을 보여줬다. 열강들이 대충 그어놓은 국경선을 따라 수많은 민족들이 엉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민족주의는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뇌관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또한 곳곳에 민족주의의 씨앗을 뿌려놓았고, 그 부작용은 지금도 인종 차별적 언행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사실 나는 매년 가는 민방위 훈련에서 애국가 가사를 마주칠 때도 저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거부감을 견디지 못해 입을 닫고 있는다...


종교적 광신이라는 말을 꺼냈으니, 종교를 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사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처럼 설교하는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결혼식장에서 주례사에 그런 설교를 늘어놓는 종교인을 마주칠 때면 역시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을 느끼고 식장을 빠져나오게 된다...


때론 과학과 기술의 열렬한 신봉자들도 불편하다. 세상사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데 무슨무슨 기술이 세상을 구원하고 혁명을 일으킬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런 주장에 동화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집어넣은 결과 2017~2018년에 본 것과 같은 코인 버블이 일어났다. 한편으로 요즘 유행하는 데이터, 인공지능에 대한 열광도 비슷한 맥락에서 불편하다. 내가 생각하는 현시점의 인공지능은 '굉장히 작은 구체적인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여러 모듈들의 집합'이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버튼 하나 누른다고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그런 건 아직 한참 더 멀었는데,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이후로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좀 과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난 이래저래 불편한 게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이런저런 불편한 것들을 하나로 모아 요약하면 근거 없는 맹신과 맹종이 싫은 것이고, 이와 비슷한 단어로는 '타협과 관용을 모르는 태도',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는 설익고 오만한 태도', '닫힌 사회, 닫힌 세계관', '꼰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6. 미중 무역분쟁, 한일 무역분쟁


키신저 옹이 말미에 적은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정치 조직과 경제 조직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고, 이 분쟁들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기구가 없다. 일본은 오사카에서 열린 G20 종료 바로 다음날 무역 금수조치를 발표하며 한일 무역분쟁을 선전 포고했다. 원래대로라면 국제기구를 개최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 적대적 행위를 막고 중재하기 위함인 것을. 이런 일을 보면 현재의 세계 질서는 그저 자연법이 작동하는 상태 -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 - 가 아닌가 싶다.


2018년 시작된 미중 무역분쟁은 키신저 옹이 권고한 바를 역행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으며 이 나라 저 나라 가리지 않고 다 패고 다닌다. 그에게선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이 보여준 세계 질서의 균형자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미국 입장에서 유리한 일방적 국익 추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미국 기업들이 보는 피해도 막대하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국내 정치용인 것인가, 아니면 더 장기적 관점에서 아시아의 맹주인 중국 패권을 견제하기 위함인 것인가.


만약 미중 무역분쟁의 목적이 중국 패권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면, 미국은 한일 무역분쟁을 방관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이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서 차지하고 있는 과점력을 중국이 침범할 경우, 2018년부터 온갖 수고를 무릅쓰고 감행해온 대중 무역제재의 효과가 반감되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이미 월가에서는 한일 무역분쟁의 수혜는 중국이 보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워싱턴의 관료들도 뭔가 대응을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이 한일 무역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 한중일 3국의 경제력 패권 다툼에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과거 미국이 동북아에서 수행해오던 균형자 역할을 이어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가서 1) 일본이 적당히 겁만 주는 선에서 수출 금수 카드를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적극적 행동은 취하지 않고 2) 한국은 반도체 재고 소진과 가격 상승효과를 보고, 장기적으로 일본에 대한 소재 의존도를 낮추고 3) 중국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면, 결과적으로 아베는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서 좋고 한국 반도체 기업도 좋고 트럼프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되지 않겠냐마는, 뭐 이쯤 되면 소설의 영역인 것 같다...



생각을 마무리하며


한 학기 수업을 듣는 것 마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리고 재미있게 읽고 생각했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즐거움을 선사해준 키신저 옹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내용 요약


1. 유럽: 다원적 국제 질서


로마 제국은 '시민 정부'와 '교회'의 두 권력이 운영해 왔으며, 제국 해체 이후로 조화와 통일의 비전은 교회로 점점 더 집중되었다. 로마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수심 명의 정치 지배자들이 명확한 위계 구조 없이 주권을 행사했다. A.D 800년 프랑크 왕 샤를마뉴는 프랑스와 독일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고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호를 부여받으나, 신성로마제국은 건국 이래 100년 간 여러 차례의 내란이 일어나며 응집력 있는 정치적 독립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성 로마 황제는 다른 문명의 황제들 - 중국의 황제, 이슬람의 칼리프 - 보다 훨씬 더 취약한 기반에서 활동했다. 황제는 9인의 선제후 선거에 의해 당선되어 교황으로부터 황제직을 수여받는 선출직이었으며 관료를 갖지 못했다. 중세 유럽의 국제 질서 개념은 교황, 황제, 다수의 봉건 통치자들 간의 개별적 협상을 반영했다.


16세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 카를 5세가 네덜란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되어 로마 이후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카를 5세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하지 않고 다원주의, '균형 상태를 기반으로 한 질서를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아들 펠리페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스페인, 네덜란드를 물려주고, 신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매듭지고,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제국을 물려주며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다. 카를 5세 이후 유럽 강대국들은 대륙에서 벗어나 신대륙과 식민지 개척 경쟁에 착수한다. 신대륙 발견, 인쇄술, 종교 개혁은 유럽의 전통적 세계관에 균열을 불러일으키며, 교황과 제국이라는 중세적 세계 질서를 해체하는데 기여한다.


30년 전쟁(1618~1648)은 구 권력인 가톨릭, 교황,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에 저항하는 신교 국가 간의 갈등으로 벌어졌다(두산 백과 링크). 이 격변의 시기 중 신성 로마 황제에 충성을 바쳐야 할 가톨릭 군주들이 명분보다 전략적 실리를 추구하는 선택을 했는데, 프랑스가 대표적 사례다. 프랑스의 천재 정치가 리슐리외에는 국가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영원한 독립체'로 생각했다. 그는 국가의 행동 지침을 국가 이성 - 계산할 수 있는 원칙을 따르는 국익 - 이라고 생각했다. 14세기 이후로 프랑스는 가톨릭에 충성을 다 하는 '최고의 가톨릭 왕'으로 불렸지만, 리슐리외의 프랑스는 냉정한 국익 계산을 근거로 전쟁 초반에는 중립을 고수하고, 후반에는 신교 국가들을 지지한다. 리슐리외는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중 유럽의 분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중 유럽의 많은 중소국들을 지지하고 오스트리아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다. 이 전략적 목적은 리슐리외가 등장한 1624년부터 비스마르크가 독일 제국을 선포한 1871년까지 250년 동안 프랑스 외교 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작동했다. 이 개념이 유럽 질서의 본질로 작용하는 한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입지를 지킬 수 있었으며, 이 원칙이 무너지면서 프랑스의 지배적 위치도 무너졌다.


30년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두산 백과 링크)이 체결되었다. 전쟁을 치르며 프랑스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실리 추구적 행동이 참전국들의 기본적 목표 추구 원칙이 되어 있었기에, 참가국 대표들은 전략적 이익에 기반한 매우 현실적인 지시 사항을 받고 회담에 참여했다. 국력과 명분에 관계없이 조약에 참가한 국가들은 주권국으로 인정받았다. 과거의 국력이나 명분은 잊히고 국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얻어진 원칙을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은 '국가 주권, 상호성, 상호 불가침, 다원성'이다. 이런 원칙들을 토대로 하여 대사관 상주 제도 등 현대적 외교의 기초들이 수립되었으며, 이 원칙들은 현대 국제 질서의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수립된 구조물은 합의된 규칙과 제한을 기초로 국제 질서를 제도화하고, 지배적인 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강대국을 기초로 해서 국제 질서를 세우려던 최초의 시도였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교황의 권력은 교회로 축소되고 주권 국가 평등의 원칙이 자리 잡는다. 베스트팔렌 3년 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내놓으며 정치 질서의 기초 이론을 제공한다. 홉스가 제안한 개념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계약으로서의 국가, 리바이어던 - 개념은 국경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국가 간 관계는 다수의 리바이어던 간의 긴장 상태를 의미하는데, 베스트팔렌 이후 이 긴장은 세력 균형에 의해 조절되었다. 세력 균형 달성은 외교 정책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으며, 그 균형을 흔들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동맹이 등장한다. 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 균형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력 균형은 주요 강대국이 패권에 도전하거나, 강대국이 아니었던 국가가 강대국의 지위에 도전할 때 흔들릴 수 있다. 전자의 예로 프랑스 루이 14세, 후자의 예로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었는데, 두 시도 모두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가들은 20세기 전체주의자들처럼 역사의 운동을 민의의 완전한 작동과 동일시했다. 정의상 민의는 그 어떠한 제한보다 우선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만이 민의를 확인할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혁명은 천 년 전 이슬람교나 20세기 공산주의와 비슷한 주장에 기반을 두었다. 진실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개념이 서로 다른 국가들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으며, 가능한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하여 국제 문제를 전 세계적인 이념 경쟁으로 바꿔놓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군은 세계적 평화의 달성을 천명했으며, 이로 인해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 정당성과 힘의 경계선을 다시 무너뜨리며 유럽 전체를 전란에 몰아넣는다.

프랑스 국민 공회는 1792년 11월 법령에서 '인민혁명이 발생한다면 어디든 프랑스군의 지원을 확대하겠다'라고 선언하고, 같은 해 12월 법령에서 각국의 혁명대를 향해 '오늘날까지 그들을 지배해 온 모든 민간 및 군사 권력을 진압하는데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겠다'라고 선언한다. 혁명의 전체주의적 요소는 필연적으로 공포정치를 탄생시켰고, 이어서 독재자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질서가 회복된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에 패퇴하기 전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 시대는 러시아에 패배한 뒤, 유럽 연합군에 다시 패배하며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 전쟁 종전과 이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는 러시아가 유럽의 세계질서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된다.



2. 유럽의 세력 균형 체제와 그 종말


유럽은 다극성을 균형에 도움이 되는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였지만, 러시아는 고정된 국경이 거의 없는 광활한 지형에서 자원을 놓고 유목민족들끼리 경쟁하는 대초원의 역동에서 지정학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약탈, 습격, 외국인을 노예로 삼는 일 등은 삶의 방식이었다. 독립은 한 국가의 국민들이 물리적으로 지킬 수 있는 영토와 일치했다.


유럽이 채택한 베스트팔렌의 질서 개념에서는 세력 균형과 힘의 행사에 대한 억제가 안전을 의미했으나,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에서 힘의 억제는 패배와 파국을 초래했다. 러시아는 주변국을 지배하는데 실패했을 때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나무위키 링크), 악몽과도 같은 동란 시대(두산백과 링크)를 겪었다. 때문에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기초는 팽창주의가 되었다. 17세기 중반 외무장관 나시초킨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규정해달라는 질문에 '모든 방향으로 국가를 확대하는 것, 이것이 외무부의 할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러한 팽창주의는 1917년, 대략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러시아는 매해 다른 유럽 국가들을 합친 영토보다 더 넓게 영토를 확장했다(1552년부터 1917년까지 연평균 10만 제곱킬로미터).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발전이 덜 된 지역에서 이뤄졌기에 러시아의 문명 수준은 서양에 비해 뒤쳐졌다. 표트르 대제가 태어난 1672년 러시아는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는 "국민들에게 과거의 아시아적 관습을 모두 끊어내고 유럽의 기독교 민족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 자기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그는 칙령을 통해 서양의 예의범절과 복식을 도입하고, 근대화된 육군과 해군을 양성하고, 인접국과 전쟁을 벌여 국경선을 완성하며, 발트해로 진출하고, 새 수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것을 발표한다. 표트르의 노력은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켰고 제정 러시아를 최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표트르의 후임자로 취임한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극단적인 전제정치가 거대한 영토를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유일한 통치 체계라고 정당화했다.


서쪽으로 대공세를 펼친 미국과 비슷하게 러시아 역시 자신들이 야만적인 점령지에 질서와 계몽사상을 퍼뜨리고 있다는 도덕적 변명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비전이 끝없는 낙관주의를 불어넣은 반면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금욕적인 인내에 근거했다.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두 거대한 세계의 접촉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였던 러시아는 자신들에게 두 세계를 이어주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소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온 사방의 위협적인 세력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종식한 빈 회의가 열릴 무렵 러시아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어있었고, 빈 회의에 직접 참석한 차르 알렉산드르는 가장 강력한 절대 군주였다. 차르는 국가 간 세력 균형에 기반한 국익 추구라는 베스트팔렌의 원칙을 폐기하고, 종교적 비전에 근거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신성 동맹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빈 회의의 선언서 초안에서 "예전에 상호 관계를 맺은 강대국들이 채택한 방침을 버리고 영원한 그리스도교의 고매한 진실에 기초한 질서로 대체하는 게 시급하다"라는 주장을 했다.


빈 회의의 교섭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교섭국들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베스트팔렌의 세력 균형 원칙은 혁명, 프랑스의 팽창주의, 러시아의 팽창주의 등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빈 회의의 결과 4국 동맹(두산 백과 링크), 신성동맹(두산백과 링크), 동맹국 정부 수반들의 정기적 외교 회담을 통해 제도화된 강대국들의 협조 체계가 정립된다. 4국 동맹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4년 뒤에는 패전국 프랑스도 참여)으로 구성되었으며, 영토 균형에 대한 도전을 저지했다. 신성동맹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으로 구성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맹국들의 합의에 의해서만 개입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유럽 개입을 제한한다.


빈 회의 체제의 미묘한 균형은 19세기 중반 민족주의의 등장, 1848년 혁명, 크림 전쟁으로 흔들리게 된다. 민족주의는 특히 독일 연방 35개 소국들에 대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경쟁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진다. 1848년 혁명은 전 유럽의 주요 도시에 영향을 미친 동란으로, 신흥 중산 계급과 구 귀족 계급 간의 갈등을 반영했다. 1853 ~ 1856년 발생한 크림 전쟁은 러시아의 오스만투르크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투르크 편으로 참전한 사건으로, 프로이센은 이에 중립을 지키고 오스트리아는 혼란을 틈타 발칸 반도를 점령하는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신성동맹이 깨지는 결과를 낳는다.


1862년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된 철혈의 비스마르크는 빈 회의 체제의 균형이 흔들리는 기회를 노려 독일 통일의 과업을 완수한다. 디즈레일리는 1871년 독일 통일을 '프랑스혁명보다 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말하는데,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250년 간 유지되었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할된 중 유럽이 통일되어 통일 독일이 등장한 것은, 대륙의 모든 국가들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지배적인 국가가 등장한 것을 의미했다. 1870 ~ 1871년 벌어진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차지한 것으로 당시 프로이센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난 후 독일의 외교는 유연성을 잃어가고, 영국을 비롯한 다른 강대국의 외교도 유연성을 잃어간다. 독일의 군사 전략은 총력전과 선제공격에 기반하여 설정되었다. 정치 지도자들이 각자의 전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결과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1차 세계대전은 25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오스트리아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등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며 종식된다.


1차 세계대전을 수습하기 위해 베르사유 조약이 열렸다. 키신저는 '베르사유 조약만큼 조약의 목적을 놓친 문서는 없다'라고 적었다. 조정을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너무 관대했던 베르사유 조약은 진이 다 빠진 민주 국가들에게 혁명적인 소련뿐 아니라 복수를 벼르던 화해 불가능한 독일까지도 끊임없이 경계하라고 선고했다. 결과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수정주의를 부추긴 것에 다름없었다. 전후 세계에는 서로 중복되면서도 모순되는 두 개의 질서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나는 상호 작용을 주고받는 서양 민주주의 국가들과 국제법으로 이뤄진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제한 체계로부터 물러난 강대국의 세계였다. 그 두 세계 밖에는 소련이 있었다. 1933년에 분노한 독일 국민들로부터 표를 얻어 집권한 히틀러는 모든 규제를 벗어 버렸다.


2차 대전 후 서유럽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프랑스의 로베르 쉬망, 이탈리아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중요한 기여를 한다. 2차 대전 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미국의 핵 능력을 이용한 소련에 대한 전 세계적 봉쇄로 전환한다. 대서양 동맹은 공통된 체계에 동맹국들이 군사력을 합치기는 했지만, 주로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력, 특히 핵 억제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붕괴로, 20세기에 유럽을 두고 벌어진 세 번째 논쟁은 평화롭게 끝이 났다.



3. 이슬람교와 중동: 무질서의 세계


중동 지역은 세계 3대 종교가 태동한 곳으로, 모든 형태의 국내 질서와 국제 질서가 한 번쯤 생겨났다가 버려졌다. 지역 질서와 국제 질서의 공존이라는 과제가 이 지역만큼 복잡한 곳은 없다.


6세기 말 중동은 두 제국이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두고 그리스 정교를 믿은 비잔틴 제국과, 현대의 바그다드 근처인 크테시폰을 수도로 두고 조로아스터교를 믿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그들이다. 두 제국이 패권 전쟁과 전염병으로 국력을 소진하던 사이 아라비아 서부 척박한 사막에서 예언자 마호메트가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570년에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는 40세에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는 약 23년 간 계속되었고 이를 적은 것이 코란으로 알려져 있다. 마호메트와 추종자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그 지역의 타 종교 -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 를 그가 받은 계시의 종교로 대체한다. 이슬람교의 성장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632년 마호메트 사망 후 100년 동안 아랍군은 이슬람교를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스페인 대부분 지역, 중부 프랑스, 동쪽으로는 북부 인도까지 전파했다. 이후 이슬람교는 수백 년에 걸쳐 중앙아시아, 러시아, 중국 일부 지역, 동인도 대부분 지역까지 전파된다. 이슬람교는 신정 일치 사회를 지향했으므로, 이슬람 세력과 마주친 모든 민족은 개종해서 보호를 받을지, 정복당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종교이자,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초강대국이자, 새로운 세계 질서이기도 했다.


이슬람교가 정복한 지역이나 조공 관계를 통해 지배하던 비이슬람 지역은 '다르 알 이슬람' (이슬람의 집)으로 간주되었고, 그 너머의 땅은 전쟁의 영역인 '다르 알 하브르'였다. 이슬람교의 임무는 이 지역들을 이슬람교의 세계 질서에 통합시켜 전 세계에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슬람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전 세계의 이슬람화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다르 알 이슬람은 항상 다르 알 하브르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세계적인 체제를 수립하는 전략은 지하드라 불렸는데, 이는 투쟁을 통해 이슬람교를 전파해야 하는 이슬람교도의 의무를 말한다. 지하드는 군사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데, 이슬람교의 메시지를 이행하고 퍼뜨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포괄한다. 이슬람교도는 '마음으로, 말로, 손으로, 칼로' 지하드를 이행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이란 헌법과, 수많은 중동 지역 무장 단체와 테러 집단의 슬로건에 그대로 남아있다.


중세 유럽이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을 분리하고 베스트팔렌 체제를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중동 지역은 현대까지 신정일치가 지속되었다. 1920년대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마호메트의 직계가 국정 운영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주요 이슬람 국가들의 반응은 양분되었다. 한쪽은 '국가'를 기초로 하는 세계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 종교적 신념과 외교 정책을 구분지은 국가들이고, 다른 한쪽은 이슬람의 가치를 고수하고 종교와 정치 권력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국가들이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국가 기반의 세계 질서와 신앙 기반의 세계 질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불편한 공존을 하고 있다.


632년 마호메트 사후 후계 문제를 놓고 이슬람 사회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양분되었다. 수니파는 부족 연장자 협의회로 대변되는 다수파였는데, 신생 이슬람 사회의 합의와 조화를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인물인 마호메트의 장인 아부 바르크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이들은 마호메트와 신의 관계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것이며, 칼리프의 임무는 마호메트가 보여주고 세운 것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아파는 이에 반대했던 소수파로, 마호메트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단 사촌 알리에게 권력을 승계하고자 했다. 이들은 마호메트의 직계로 영적 재능을 지닌 지도자가 더 적극적인 역할과 비전으로 이슬람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일 네 번째 칼리프로 집권하게 된 알리가 모반을 일으킨 폭도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니파는 상황을 수습한 분파를 지지했고, 시아파는 새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대립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유럽 지역을 향한 이슬람의 팽창은 732년 프랑스 푸아티에와 투르에서의 전투에서 저지된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의 비잔틴 방어선도 400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 방어선 뒤에서 서양 세계는 로마 시대 이후의 세계 질서 개념을 발전시켜 나간다. 7세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궁을 세우는데, 이 왕국은 200년 동안 지속된다. 1492년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최후 거점 그라나다를 정복하며 이슬람의 서쪽 경계선은 북아프리카로 밀려난다.


13세기에 등장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453년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정복하며 이슬람 세계 질서를 천명한다. 초기 이슬람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투르크도 자신들의 정치적 사명이 '보편적인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탄은 자신을 "이 세상의 신의 그림자"이자 "세상을 보호하는 세계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16세기 프랑스는 오스만투르크의 술레이만 1세에 군사동맹을 제안했는데, 오스만의 입장에서 프랑스는 동등한 동맹 관계 대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원조를 베풀어야 할 소국이었고, 당시 국력 또한 실제로 그러했다. 프랑스-오스만투르크의 동맹에 위협을 느낀 합스부르크 가는 페르시아의 시아파 왕조와 동맹을 맺어, 한동안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이념을 압도했다.


오스만 제국은 왕실 정통파가 근대화에 저항함에 따라 점차 유연성을 잃어갔다. 17세기를 지나며 유럽 국가들의 국력이 오스만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흑해와 카프카스 산맥을 향해 전진하며 북쪽으로부터 오스만을 압박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만의 노른자인 이집트를 둘러싸고 경쟁하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발칸 반도로 진격해온다. 서양 열강들은 오스만을 '유럽의 병자'로 취급했다.


오스만투르크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베스트팔렌 체제와 이슬람 체제 양쪽으로부터 참전 논거를 도출했다. 술탄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부당한 공격을 가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무장 중립을 침해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국의 합법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에 의지할 것을 선언한다(베스트팔렌). 동시에 오스만의 최고위 종교 지도자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이슬람교를 절멸시키기 위해 칼리프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비난하고 모든 국가(연합국 치하에 있는 이슬람교도들도 포함)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서둘러 지하드에 참여하여 신의 노여움을 마주하라는 종교적 의무를 선언한다. 타국의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에 가담하지 않았고, 1차 대전에서 동맹국이 패전하며 오스만도 패전국의 처지에 놓인다.


1차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체결된 1920년 세브르 조약(위키 링크)은 중동 지역을 모자이크처럼 분할해 열강의 식민지로 만든다. 열강은 여러 종파와 민족 간의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통치를 해나갔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과 내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터키가 탄생했는데, 터키 공화국은 범이슬람교의 신정 통치 체제인 칼리프를 폐지하고 세속 국가를 선언한다. 그 외 신생국가들은 스스로를 근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나, 대부분 국가들의 국경선은 역사적 뿌리가 전혀 없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예멘, 리비아의 봉건 군주들이 군부 지도자들에 의해 전복된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민족주의에 호소하며 지지층을 넓혀 갔다.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인민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라크의 후세인, 시리아의 아사드 모두 범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소수파인 자신의 종파가 다수파를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라크에서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다수파인 시아파를, 시리아에서는 소수파인 시아파가 다수파인 수니파를 통치했다. 한편으로는 이란과 같이 신정 통치를 지지하는 국가가 등장한다.


19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중동 국가들은 소련을 이용하여 미국에 압박을 가했다. 소련은 민족주의 아랍 국가들의 주요한 무기 공급국이자 외교적 지원국이 되었다. 아랍의 독재자들은 '아랍 사회주의'에 충성을 바치고 소련의 경제 모델을 따른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경제의 대부분은 근대적 수준에 머물렀다.


전반적으로 냉전 시대 이슬람 세계와 비이슬람 세계 간의 관계는 베스트팔렌 방식을 따랐다. 이집트, 시리아, 알제리, 이라크는 소련의 편에 섰고, 요르단, 사우디, 이란, 모로코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일부 국가들은 표면상 국익에 기초한 국정 운영 원칙을 따르면서도 정치적 정당성은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전통적 군주제 형태에 의존했지만, 사우디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세속 국가로 운영되었다. 1973~74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분쟁에서 소련이 무기만 지원해주고 외교적 지원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사다트가 통치하던 이집트는 소련에서 미국 편으로 갈아탄다. 뒤이어 시리아와 알제리도 중립을 취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소련의 역할은 크게 축소된다.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힘을 합쳐 전쟁을 벌이는데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모두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냉전 이후 중동 국가들은 낙후한 경제와 정치적 불안정성에 직면한다. 이를 배경으로 급진주의 집단과 테러 집단들이 생겨난다.


1947년 이집트의 종교 운동가 하산 알 반나가 이집트 왕 파루크에게 비판적인 서한을 보내며 무슬림 형제단이 세상에 알려진다. 무슬림 형제단은 베스트팔렌 세계 질서가 힘과 정당성 모두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며, 이슬람교를 기초로 한 세계 질서를 수립할 것을 천명한다. 초기의 형제단은 가능하면 점진적이고 평화로울 것을 강조하는 모호함을 보여줬지만,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가들은 모호한 부분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급진주의를 전개한다. 급진주의의 시조는 종교학자이자 무슬림형제단의 이념 연구자인 사이드 쿠틉이다. 쿠틉은 원리주의적 해석에 근거해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정당화하는 사상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사상은 현대의 급진주의자와 지하드 전사들의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2010년 말 시작된 아랍의 봄(위키 링크)을 두고, 서구사회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향한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중동 지역의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은 우여곡절과 고통으로 마무리되었다. 본질적 문제는 다원주의적 제도를 구성할 수 있는 원칙이나 이를 실천하는데 전념할 지도자를 찾는 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랍의 봄은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신세대의 반란으로 시작했으나, 곧 무시당하고 붕괴되고 진압되었다. 잠시 공백상태가 되었던 권력을 되찾은 건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이었다.


무바라크 실각 후 이집트 대통령에 당선된 건 무슬림형제단의 리더 마호메트 모르시였는데, 정권을 잡은 이슬람교 정부는 지지자들이 여성과 소수 집단, 반대자들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활동을 모른 체하고 권력 유지에 집중한다. 모르시가 민심을 잃자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권력을 잡는데(위키 링크), 이 쿠데타는 소외되었던 민주 세력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한편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의 민주화는 실패로 마무리되었고, 미국의 우방 국가들은 '필요할 경우 미국이 자신들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시리아의 경우, 미국은 시리아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아사드 정부를 제거하고 민주 정부를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아사드 퇴진과 연립정부 수립 방안을 기초로 하는 '정치적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리아와 그 지역의 주요 당사자들은 전쟁을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배의 문제로 간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맡기는 경우에만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시리아의 주요 종파들 중 누가 다른 종파들을 지배하고 시리아의 자원을 관리하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결국 시리아의 혁명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천 년 묵은 갈등에 다시 불을 붙였다. 사우디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은 수니파 집단을 지원했고,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아사드를 지원했다. 한편 쿠르드 족은 터키 국경 지역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고, 지하드 전사 집단 ISIL은 칼리프 국가를 선포했다. 이 모든 당사자들은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국제사회에 중동 지역의 민주주의의 확산 지지를 호소했으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다른 중국과 러시아는 베스트팔렌 불간섭 원칙을 들먹이며 개입에 반대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베스트팔렌 질서와 이슬람 질서의 충돌로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에 두 가지 세계 질서 개념이 공존할 수 있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전통적인 아랍-이슬람 왕국으로, 부족 국가이자 이슬람식 신정 국가이다. 따라서 서방 국가들의 중요한 동맹국들 중 내부 관습이 가장 이질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8세기부터 서로를 지원하며 하나로 합친 두 가문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종교적 절대주의와 대담한 군대, 기민한 근대적 정치력이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되는 왕국을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사우디는 1차 대전 이후 이븐 사우드가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봉건 공국들을 재통일하고 가부장적 충성과 종교적 헌신을 통해 그들을 단결시켜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들면서 탄생했다. 이외에 사우디를 특징짓는 단어는 전통과 현대의 모순, 복잡한 인종 구성, 석유 부국 등이다(위키 링크).


사우디는 매우 신중한 외교 정책을 펴왔다. 1979~1989 반소련 지하드 활동, 1973년 오일쇼크 때처럼 자신들의 자원으로 대립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경우에도 대립의 최전선에 서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우디는 중동의 평화 협상을 용이하게 만들었지만, 실제 협상은 다른 국가들에게 맡겼다. 사우디 왕국은 이런 방식으로 미국과의 우호관계와 아랍에 대한 충성심, 이슬람교의 금욕주의적 해석, 대내외적 위험에 대한 인식이라는 난관을 헤쳐왔다.


사우디는 호메이니와 이란 이슬람 혁명의 등장에 가장 괴로워한 국가다. 사우디의 안보를 지탱해주고 정당한 주권국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뒷받침해주는 베스트팔렌 개념과, 사우디 역사를 특징짓는 종교적 순수주의, 그리고 사우디의 대내적 결속을 망치는 이슬람 급진주의의 호소력 사이에서 사우디가 분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사우디 왕국의 불만 분자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반 소련 지하드를 벌이다 사우디로 돌아와 알 카에다를 조직한다. 알 카에다의 가까운 표적은 사우디 정부와 중동의 사우디 협력 국가들이었고, 먼 적은 미국이었다. 알 카에다는 중동의 비이슬람 국가 정부를 지원하고 1990~1991년 걸프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 병력을 배치하며 이슬람을 모욕했다며 미국을 매도했다. 알카에다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 2001년 9월 11일 비행기 테러로 미국을 공격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공격에 앞서 이슬람 세계 질서를 선포했다. 알 카에다는 2003년 알 사우드 왕조 전복을 시도하고 실패한다.


사우디는 외교적으로 주로 미국과 손을 잡은 반면, 종교적으로는 근대화와 어울리지 않는 이슬람교의 일종을 선언하면서 비이슬람 세계와의 충돌을 내비치는 모순적 태도를 유지해왔는데, 이 모순은 이슬람 급진주의의 부상 이후 두 가지 형태의 내전에 맞닥뜨리게 된다. 첫 번째 내전은 베스트팔렌 국가 체계를 따르던 정부와 이슬람교도들 간의 내전이다. 두 번째 내전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천 년 묵은 갈등으로, 사우디는 범아랍권에서 수니파의 맹주국으로 시아파 맹주국 이란과 대립하고 있다. 사우디에게 이란과의 갈등은 존재의 문제다. 이것은 왕정의 생존과 국가로서의 정당성, 이슬람교의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시리아, 이라크와 주변 지역에 발생한 충돌은 국가가 부족이나 종파 단위로 해체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권력 공백 현상은 지역 질서의 불안정성을 가중한다. 이러한 공백 현상의 확산으로 중동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의 유럽 종교 전쟁과 비슷하면서도 그 범위가 더 광범위한 충돌 국면에 돌입했다. 대내적 갈등과 국제적 갈등이 서로 악순환을 낳는다.



4. 미국과 이란: 질서에 대한 접근법


2013년 봄, 이란 이슬람 공화국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새로운 세계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는 '아랍의 봄'이라는 사건이 실제로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이슬람의 각성'이라고 선언했다. 하메네이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실패하고 서양 세계의 힘과 자신감이 무너진 현재, 이슬람의 각성은 이슬람 움마(국적을 초월한 신자 공동체)를 하나로 합치고 이슬람교를 세계의 중심으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국익이나 국제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종교 원칙을 세계 질서로 천명한 것이다. 이런 선언은 35년(지금은 40년) 동안 반복된 탓에 세계는 이런 발언과 행동에 무감각해져 버렸다.


과거의 이란은 중동 국가 중 종교적 급진주의와 원리주의에서 가장 거리가 먼 국가였다. 이란의 역사적 뿌리는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동서양 교차점에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던 페르시아는 고대에서 냉전 시대까지 유라시아 대륙 거의 모든 정복자들의 시작점이거나 종착지였다. 페르시아는 한 때 알렉산더, 이슬람, 몽골에 차례로 정복당하며 세력을 잃었지만,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신감은 잃지 않았다. 일시적 양보를 위해 정복자들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신비주의와 시로 '위대한 내부 공간'을 기록하고 제국의 세계관을 후대로 이어간다. 한편 페르시아는 모든 종류의 영토와 정치적 문제를 관리하던 경험을 통해 인내심과 지정학적 현실에 대한 빈틈 없는 분석, 상대에 대한 심리전을 강조하는 정교한 외교 규범을 만들어낸다. 16세기 수니파의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위해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하는데, 이로서 페르시아는 시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20세기 이란 왕 레자 팔레비에 대한 혁명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재분배를 요구하는 반군주 정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79년 호메이니가 파리와 이라크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이란으로 돌아와 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당시 이란의 혁명 세력은 민주 세력, 민족주의 세력,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으로 나뉘어있었는데, 호메이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압도적 카리스마로 대중을 장악한다(나무위키 링크). 호메이니의 이란은 종교적 원리주의와 이슬람 세계질서를 천명하는 한편, 유엔 의석을 차지하고 베스트팔렌 체제 내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인다. 이란은 국호에 이슬람 '공화국'을 사용하는 동시에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를 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도자로 칭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호메이니 이후 현재까지 이란 이슬람 국가는 원리주의 신정 독재 국가로 존속해오고 있다. 호메이니의 정책 개념으로 보면 서방 세계와의 분쟁은 세계질서의 경합을 놓고 벌이는 경합이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은 상호 핵 억제력으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핵 보유국이 미국과 소련뿐이었고, 선제공격 시 파급효과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억제력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 이후 핵 보유국이 늘어나면서 핵 억제력은 점점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란과 같은 신생 핵 보유국이 위험하다. 서방 세계는 이란의 핵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해왔으나 결국 실패했다. 미국과 유럽 협상가들은 이란 핵 협정 체결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낙관론으로 임하며 공개 발언 시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반면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영원한 종교 투쟁의 일부로 핵 협상 과정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협상은 일종의 전투였다.


복잡한 중동 정세는 낙관적인 전망을 어렵게 하지만, 과거 희망적인 전례가 없지는 않았다. 1967년~1974년 벌어진 두 차례의 아랍-이스라엘 전쟁 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세 차례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1974년에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분리협정을 맺었다. 91년에는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담이, 93년에는 PLB와 이스라엘 간 오슬로 평화 협정이, 1994년에는 요르단과 이스라엔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런 성과의 바탕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미국의 적극적인 정책이고, 두 번째는 폭력으로 보편주의 원칙을 강요하여 지역 질서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저지했다는 사실, 세 번째는 평화의 비전을 지닌 지도자들의 등장이었다.


평화의 비전을 실천했던 이집트의 사다트, 이스라엘의 라빈은 비록 암살당했지만, 그들의 업적과 영감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5. 아시아의 다양성


'아시아'라는 말은 수많은 이질적인 국가들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근대 서구 열강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어떤 아시아 언어에도 '아시아'라는 단어는 없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세계 질서는 유럽의 세계 질서였고,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패권 경쟁을 전개하며 역사가 오래된 국가들의 국경선을 어지럽혔다.


서방 세계는 탐욕, 자문화 중심주의 등 식민주의의 낯익은 특징들과 함께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서방 세계의 더욱 우수한 집단들이 회의론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정치적, 외교적 관습을 권장하는 지적인 방법으로 전 세계를 앞장서서 교육시키려 한 것도 사실이다. 서방 세계는 식민화된 민족들이 장기간의 예속 기간을 지낸 뒤 결국 자결권을 요구하고 성취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셈이었다. 영국은 가장 잔인하게 약탈 행위를 벌이는 와중에서도 피정복 민족들이 어느 시점이 되면 공동의 글로벌 체계의 결과물에 참여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결국 노예제라는 이기적인 관습을 포기한 서방 세계는 노예 소유를 허용하는 다른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한 결과를 얻어냈다. 근대는 오만한 행동, 기술적 역량, 이상주의적 인도주의, 혁명적 지적 흥분 등이 독특하게 결합된 산물이었다.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는 식민주의에 참여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희생자였다. 베스트팔렌 스타일의 외교 환경은 두 세계대전에 의해 유럽 질서가 무너지면서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요 지역 질서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은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  중국 내전(1927~1949), 한국 전쟁(1950~1953), 중소 대립(1955~1980), 동남아 전역의 게릴라 반란, 베트남 전쟁(1961~1975), 크메르 루주의 약탈(1975~1959)


수십 년의 전란을 겪은 후 아시아 주요 국가들에는 민족주의 정부가 들어서고, 베스트팔렌 원칙을 전제로 한 국익 위주의 외교정책이 자리를 잡았다. 대다수 국가들이 최근에서야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면서 주권을 획득했기에 정부는 확신을 갖고 국익을 추구한다. 자국 내 비민주적, 전근대적 관행에 대한 서방세계의 비난에 대해서도 이제 막 극복한 식민체제의 유산으로 일축하며 간섭을 거부한다.


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체계를 구성한 원칙은 주권의 평등성이 아니라 위계질서였다. 두 개 이상의 제국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의 민족들은 둘 이상의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유연한 외교술을 펼쳐왔다. 류큐는 일본과 중국에, 버마 북쪽 민족들은 버마와 중국에, 네팔은 중국과 인도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치권을 확보했다. 19세기 태국은 중국과 인도에 충성을 맹세하는 와중에 서양 열강들의 고문을 모두 왕실에 받아두는 방법으로 식민화를 피했다. 이 미묘하고 다양한 유산을 배경으로 보면 아시아 지도 위에 그려진 베스트팔렌 주권 국가 체계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일 수 있다.


일본


미국의 페리 제독이 1853년 네 척의 함선을 이끌고 도쿄 만에 진입한 사건으로 일본은 서방 세계의 도전을 받는다. 이때 일본은 1793년 영국 사절을 맞이한 중국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자문화 중심주의에 갇혀 침입자를 냉담하게 물리친 중국과 달리,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한 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을 통해 서양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로 변신한다. 일본은 주권, 자유무역, 국제법, 기술, 군사력 같은 서양의 개념들에 기초한 국제 질서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일본사 다이제스트 링크). 아래는 근대 일본의 주요 전쟁사 연대


1886년 중국 선원들과 나가사키 경찰 간 분쟁이 발생, 일본 해군이 중국의 독일산 최신 전함에 우위를 점함

1894년 청일 전쟁 승리

1902년 영국과 대등한 군사 동맹 체결

1905년 러일 전쟁 승리

1910년 한일 합방

1931년 청으로부터 만주 침탈, 만주국 괴뢰정부 설립

1941년 진주만 습격

1945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피폭


일본은 2차 대전 패배 후 재무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한다. 당시 일본의 전략은 냉전 시대의 이념 경쟁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거듭난다. 향후 일본의 대외 전략은 미국과의 동맹을 중요시하는 것, 중국의 등장에 적응하는 것, 민족주의적 외교 정책에 의존하는 것의 세 가지 관점을 기본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힌두교는 인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신앙이자 다른 여러 신앙의 원천으로, 유럽에서였다면 서로 다른 종교로 정의되었을 법한 독특한 신들과 철학적 전통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는 개인의 구원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을 위로해준다.


근대까지 중국은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를 침략자들에게 강요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와 반대로 인도는 외국인들을 인도 종교나 문화로 전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야심을 최고의 평정심으로 대함으로써 침략자들을 초월해버렸다.


기원전 4세기의 재상 카우틸랴는 베스트팔렌 체제 이전의 유럽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인도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영원히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국가들의 집합체를 설명한다. 그의 분석은 마키아벨리의 분석과 비슷하며, 리슐리외의 분석과도 비슷하다. 즉 국가는 허술한 조직이며, 정치인에게는 윤리적 구석 때문에 국가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들 도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아르타샤스트라'는 2000년 뒤 유럽의 사상가들이 내린 결론과 아주 흡사하게 국가 간 힘에 기반한 세력 균형을 설명했으며, 모든 국가를 정복함으로써 균형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적었다(이 결론은 나폴레옹이나 진시황과 같다).


카우틸랴의 사상대로 인도 제국은 확장을 거듭했고, 기원전 3세기 아소카 황제가 현재의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일부까지 통치했을 때 국력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후 인도는 분열, 재통일, 외세의 침략을 거듭하는데, 16세기 전까지 어떤 침략국도 남쪽에 위치한 힌두 왕조를 점령하지 못했다. 16세기 무굴 제국이 힌두 왕조를 점령하며 인도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는다.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인도의 국경선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티벳 쪽으로 확장한 국경은 중국과 맞닿아 1962년의 인도-중국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는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아시아 지역 질서를 의미하며, 주변 지역에 세력을 집중시키려는 위협적인 국가가 있을 경우 분란을 초래하게 됨을 의미한다.


1857년 동인도회사 군대의 이슬람교, 힌두교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런던은 영국의 직접 통치를 선언하며 폭동에 대응했다. 당시 영국은 자신들을 중립적인 감독자이자 가지각색의 민족과 국가를 문명화하는 사회사업가라고 생각했다. 폭동 이후 인도를 단일한 제국으로 다스리겠다고 결정한 영국은 그러한 인도를 탄생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다양한 지역들이 철도와 영어로 연결되었다. 고대 인도 문명의 영광을 조사하고 정리했고, 인도의 엘리트들을 영국식 사고와 제도로 훈련시켰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인도가 외국의 통치를 받는 단일한 독립체라는 의식을 다시 일 깨웠고, 외세를 물리치려면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정서를 불어넣어 주었다. 따라서 영국이 인도에 미친 영향은 나폴레옹이 독일에 미친 영향과 비슷했는데, 이전에 독일의 여러 국가들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지리적 독립체로만 간주되었다.


인도가 독립을 달성하고 세계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을 결정한 방식은 이러한 다양한 유산을 반영했다. 인도는 점령군들을 대하는 뛰어난 심리적 기술과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을 결합함으로써 수세기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소극적 저항은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정신력 때문에 가능했지만, 자유라는 대의제 영국 사회의 핵심가치에 호소했기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었다. 200년 전의 미국인들처럼 인도인들도 영국 학교에서 배운 식민 통치자들의 자유의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독립의 정당함을 입증했다.


1947년 독립 국가 인도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네루, 네루의 딸로 2-3대 총리를 연임한 인디라 간디는 국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실리주의 외교를 추구하며 인도를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도는 냉전 시대 양 진영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미국의 경제 원조와 소련의 군사 지원 및 외교적 협력을 모두 얻어내며, 한 편으로 자신들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의 연대를 주도했다. 인도의 중립주의 노선은 베스트팔렌 체제와 공존할 수 있었다.


영국이 대충 그어놓은 인도의 국경선은 인접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중국과의 잠재적 갈등요인이다. 다들 임시 국경선으로 생각했던 문제의 경계선은 산발적인 분쟁과 군사적 충돌, 테러 집단의 침투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인도는 이슬람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인구의 13.4%가 이슬람교 신도이기 때문에, 중동 지역에서 돌발 사태가 일어날 시 내부적으로 혼란을 겪을 수 있다.


하층 카스트 출신으로 구자라트 주의 고도성장을 주도했고, 그 성과를 발판으로 2014년 5월 총리에 당선되고 2019년 연임에 성공한 나렌드라 모디 정권은 개혁 개방을 표방하며 당선되어 경제 발전에 집중하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두산백과 링크)


아시아의 지역 질서는 무엇인가?


현대의 아시아 지역 질서에는 미국, 러시아와 같은 외부 열강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2차 대전 이후 건국된 수많은 민족 국가들의 국익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고, 때문에 매우 복잡한 세력 균형이 얽히고설켜 있다.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는 서로 고립된 지역이었으며, 과거 이 지역들을 지배한 왕조들은 베스트팔렌 원칙과는 동떨어진 세계 질서를 채택했다. 미국은 아프간 철군 이후 남아시아의 균형에 군사적 개입을 회피해 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힘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외교적 적극성을 보일 책임이 있다.



6. 아시아의 질서를 향해: 충돌이냐 협력 관계냐?


중국은 아시아의 모든 세계 질서 개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고, 가장 명확하게 규정되며, 베스트팔렌 이념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을 운용했다. 또한 중국은 고대 문명에서 출발하여 전형적인 제국과 공산주의 혁명을 거친 뒤 현대에 열강의 지위에 오른 가장 복잡한 여정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류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과거 중국 황제의 권한 범위는 '중국'이라는 주권 국가, 즉 그의 직접적인 통치 대상인 영토가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국은 중앙의 문명화된 '중화'를 형성하면서 나머지 인간들을 격려하고 고양했다. 이 시각에서 세계 질서는 서로 경합하는 주권 국가들의 균형 상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위계질서를 의미했다. 모든 알려진 사회는 부분적으로 중국 문화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중국과 일종의 조공 관계를 맺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중국 외무부는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설치됐는데, 서방의 불법 침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서양 열강이 피지배국에 개종을 강요한 반면, 중국은 존중을 유도하려고 했다. 중국을 정복한 정복자들조차 중화에 동화되었다. 역사적으로 문화 제국주의가 보여준 가장 놀라운 위업은, 13세기의 몽골족과 17세기의 만주족이 중국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수많은 소수 민족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퍼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중국은 다른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정복이 아니라 흡수를 통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은 서방 세계가 계몽과 참여의 과정으로 생각한 것을 모욕으로 간주했다. 처음에 중국은 살짝 피하려 하다가 나중에는 전면적으로 저항했다. 18세기 말 영국의 첫 특사인 조지 매카트니가 산업혁명 초기의 몇 가지 제품과 함께 자유무역과 양국의 상주 대사관 설치를 제안한 조지 3세의 서한을 갖고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를 광저우에서 베이징까지 데려간 중국 배에는 "영국 대사가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가져왔다고" 적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조지 매카트니는 영국 왕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내쫓겼다. 영국이 대안한 대사관 상주는 거절되었다. 후일 두 번째 특사로 파견된 윌리엄 애머스트도 내쫓겼는데, 중국 황제는 영국의 섭정 왕자(후일 조지 4세)에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대군주" 중국은 매번 올바른 외교 의례를 통해 야만족의 특사를 안내하느라 괴로움을 겪을 수는 없다는 내용의 전갈을 보냈다.


이후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켜 중국에 문호 개방을 강요하는 데 성공한다(아편 전쟁 두산 백과 링크). 그러나 이후에도 중국 황실은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고 서양 열강에 비해 크게 뒤처진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중국 황제는 열강들에게 두 번이나 군사적으로 외국군의 힘을 빌려 대규모 국내 봉기(태평천국의 난)를 겨우 진압한 후인 1863년에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보낸 서한에서 중국이 반드시 자비로운 호의를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1911년 청 왕조가 멸망하고 1912년 쑨원이 공화국의 토대를 닦았지만 이후 장제스가 집권하며 군벌 정치가 시작된다. 장제스는 현대성과 정통성을 동시에 추구하려 했지만 일본의 만주 침탈로 주도권을 잃으며 그 사이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득세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중국은 승전국이었지만 내전과 혁명의 소란으로 갈가리 찢어져있었다.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마오는 '끊임없는 혁명'이라는 신조를 통해 중국을 정화하고 강화하고, 기존의 국내외 질서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서양식 민주주의, 소련의 공산주의, 중국의 과거 유산 등 모든 제도와 사상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결말은 전통적인 중국식 결말인 '중국식 공산주의'의 탄생이었다. 다시 말하면 '천하'를 다시 뒤 흔드는 중국 특유의 혁명적인 도덕적 권위와 함께, 중국의 업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특한 행동방식으로 자신들을 구분 짓는 중국 고유의 공산주의를 말한다.


혁명적 예언자는 자신의 계획을 박차를 가하고 그 계획을 실행할 수단을 다변화함으로써 죽을 운명을 거부하려 든다. 마오는 1958년 맹렬한 속도로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재앙에 가까운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고, 1966년에는 지배 집단의 제도화를 막기 위해 그들을 숙청하는 문화혁명을 감행했다. 두 번의 이념 운동이 크게 실패하고, 1969 소련이 중국을 침탈하려 하자 마오는 모든 각료를 지방으로 흩어지게 하고 자신의 친위대인 홍위병을 해체시켜 강제노역장으로 보낸다. 마오는 소련의 침탈에 대비하고자 미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까지 중국은 냉전 시대 세계질서에서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단적인 노선을 가고 있었다.


10년에 걸친 이념운동으로 한 세대에 해당하는 학식 있는 젊은이들이 시골로 추방되었다. 마오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전까지는 역사적 과정으로 간주되던 것을 한 세대로 단축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다. 혁명가들은 그들의 업적을 당연시하고 그 업적을 위해 치른 희생이 불가피했다고 간주할 때 성공한 것이다.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 중 일부는 마오의 업적을 여전히 긍정한다. 그리고 중국 대중, 특히 너무 젊어서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오에 대한 긍정적 설명을 그런대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세계에 대한 마오쩌둥주의자들의 조롱 섞인 도전과, 마오의 격변을 겪으며 얻은 차분한 의지 중에, 어떤 유산이 승리하는지가 중국과 21세기 세계 질서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가 두 번이나 숙청한 사람이었지만, 1976년 마오 서거 후 2년 만에 실권을 잡는다.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에 착수해 경제 대국의 기초를 닦는다. 중국은 이 극적인 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기존의 세계 질서인 베스트팔렌 체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잠재의식에는 그 세계질서를 만드는데 중국이 관여하지 않았음이 불편한 진실로 남아있다. 그들은 그 이상의 국제 규칙 제정에서 중국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지배적인 일부 규칙을 수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제 질서가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


현재 중국은 G2의 반열에 올랐다. 과거 영광의 시절의 위상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문제는 중국이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현재의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중국은 21세기 질서가 요구하고 있는 식의 핵심 국가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역시 자국과는 명백히 다른 국내 질서를 채택하고 땅덩어리나 영향력, 경제력 면에서 미국에 필적할 만한 국가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해본 경험이 없다.


현재 중국은 혁명 이후의 5세대 지도자들이 통치하고 있다. 이전의 지도자들은 모두 중국의 요구에 대한 각 세대의 특별한 비전을 추출해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승리를 거둔 첫 단계에 수립한 제도라도 중국의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정체되지 않도록 기성 제도를 뿌리 뽑으려 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국제 문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먼 옛날부터 해온 역할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다른 국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랑하지도 않고 선두에 나서려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사회와 경제 모두를 현대화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집중했다. 텐안먼 광장 위기 중에 임명된 쟝쩌민은 그 기반 위에서 1989년부터 위기의 여파를 극복해나갔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개인적인 외교 능력을 발휘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산당 기반을 확대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제적인 국가 체계 및 교역 체계의 정식 회원국으로 만들었다. 덩샤오핑이 발탁한 후진타오는 커지는 중국의 힘에 대한 우려를 능숙하게 가라앉혔고, 이후 시진핑은 새로운 유형의 강대국 관계 개념을 명확히 밝혀 그 토대를 다졌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시대만큼의 대대적인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함으로써 그 유산을 확대하려고 애써왔다. 시진핑은 민주주의는 피하면서도 개인별, 가족별 관계로 이뤄진 기존의 유형이 아니라 법적 절차가 그 결과를 정하는 더 투명한 체계를 계획했다. 그리고 국영기업이나 지방 관료의 전횡, 대규모 부패와 같은 기존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선언했다.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의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중국 측에서 보면 미국의 여러 행동들은 중국의 발흥을 방해하기 위한 계획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미국이 인권을 옹호하는 모습은 중국의 국내 정치 체계를 약화시키려는 계획으로 보인다. 미국 측에서 보면 성장하는 중국이 미국의 우월한 입지를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안보까지도 체계적으로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양측의 의심은 상대의 군사 전략과 방어 프로그램에 의해 강해지고 있다. 그런 수단은 한 국가가 국익 보호를 위해 당연히 취할 수 있는 정상적인 조치로 이해할 수 있는데도 불구, 양측은 최악의 시나리오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양측 모두 일방적인 군사 배치와 행동이 군비경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주의할 책임이 있다.


미중 간 긴장 상태의 이면에는 다른 두 가지 문제가 기여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확산과 북한 문제이다.


중국은 국제 질서가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촉진된다는 주장은 물론, 국제 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초래하고 국가 간의 행동으로 인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을 고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거부한다. 미국은 전략적 우선 사항과 관련하여 인권에 대한 태도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역사와 국민들의 신념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은 결코 이 원칙들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견해들을 공식적으로 절충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의견이 충돌하여 확대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양측 지도자들의 주요 책무다.


중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복잡한 유산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중국인들의 눈에 한국 전쟁은 '치욕의 세기'를 끝내고 세계무대에서 '우뚝 서려는' 중국의 결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국이 그 원인을 통제하지 못하는데도 의도치 않게 심각한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쟁에는 연루되지 말라는 경고로도 보인다. 이 때문에 중국과 미국 모두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건설적인 세계 질서 구축 과정의 요체는, 냉전 직후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월했던 미국이 담당한 세계 지도자의 역할은 미국이든 중국이든 혼자서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균형을 잡아주는 국가가 아니라 균형을 지키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력 균형에 가까운 무언가가 존재하며, 러시아와 베트남은 주변 참여국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균형 상태는 주요 참여국인 미국이 동아시아의 지리적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무게 중심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세력 균형과는 다르다. 그리고 군사력 면에서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두 국가의 지도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관해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선언했기 때문에 과거의 세력 균형과 다르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의 동맹국이자 중국의 동반자인 관계가 성립한다. 이 상황은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는 다시 러시아와의 조약으로 균형을 맞춘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균형 상태가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양면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투명성을 위해 그 양면성을 포기하면서 일련의 대립 관계가 증폭하기 시작했고, 결국 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세력 균형 전략과 동반자 관계의 외교술을 결합하면 대립 양상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그것들이 미치는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자제력, 힘, 정당성이 늘 미묘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지혜로운 정치가라면 그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균형을 벗어나면 재앙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7. "모든 인간을 위한 행동": 미국과 미국의 질서 개념


미국 건국자들의 개종 정신에는 기성 제도와 위계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채워져 있었다. 초창기 미국의 사상은 청교도주의라는 종교 이념과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치 이념이었는데,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 둘이 충돌하는 일이 흔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긍정적인 시너지를 창출했다. 개방적 문화와 민주적 원칙들 덕분에 미국은 수백만 명에게 훌륭한 모범 국가이자 피난처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식 원칙이 보편적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국제 체제에 도전했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3대 대통령을 역임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이 지금 막 탄생 중인 열강일 뿐만 아니라 '자유를 위한 제국'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선한 정부 통치의 원칙을 옹호하면서 모든 인간을 위해 행동하는 확장 중인 세력이었다. 제퍼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제국이 유럽의 제국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유럽의 제국들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억압한 결과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이 상상한 제국은 본질적으로 북아메리카 제국이었으며 자유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계획의 모순된 내용이나 건국자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미국의 세력이 확대되고 번창한 것처럼 민주주의 또한 번창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도 세계 전체에 확산되고 뿌리를 내렸다.)


이런 원대한 야망에도 불구하고, 초기 미국의 외교 정책은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방대한 자원 때문에 별로 중요성이 대두되지 않았다. 영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일 때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가 유럽 전역을 상대로 해방 전쟁을 벌이자 동맹을 폐기했다. 대양 뒤에서 안전하게 발전하고 있던 미국은 대륙의 세력 균형 논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국제 질서 개념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움직였다. 이 전략은 1812년에 마지막으로 영국과 단기전을 치른 이후 한 세기 동안 우세했고, 그 덕분에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도 상상할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83년 미국은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과 암묵적인 합의를 함으로써 신대륙 전체에 식민지 건설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먼로주의를 발표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먼로주의는 유럽의 세력 균형 개념이 신대륙에서 작동하지 못하게 막는 독립 전쟁의 연장선으로 해석되었다. 사실 어떠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에 국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전선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자 미국의 확장은 일종의 자연법의 작동으로 인식되었다.


19세기 내내 미국은 운 좋게도 자국의 문제들을 차근차근 처리할 수 있었다.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부와 남부의 국경선을 유리하게 정할 수 있었고, 그 뒤엔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리고 1898년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며 제국의 소유물을 양도받는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친 미국인들은 번영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다듬는 과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미국의 경험은 평화가 인류의 자연조건이며 다른 국가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이나 악감정에 의해서만 방해받는다고 생각하게 했다. 미국인들이 보기에 동맹 관계를 바꾸고 평화와 전쟁 사이에서 융통성 있는 술책을 벌이는 유럽식의 국정 운영 기술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식민 지배를 통한 이익을 거부하고 유럽이 구상한 국제 체계와 신중하게 거리를 둔 채 상호 이익과 공정한 거래를 기초로 하여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도모하면서 구 외교의 관행과 거리를 두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였던 100만 명의 군대를 육성하여 총력전에 이용한 뒤, 종전 1년 반 만에 6만 5천 명만 남기고 모두 해산해버렸다. 1890년 미 육군은 불가리아 다음은 세계 14위를 차지했고, 미 해군은 산업 능력이 미국의 13분의 1 수준인 이탈리아보다도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역할이 확대되면서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이 점차 대두된다. 1898년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메인 호가 원인 모를 이유로 폭발하자 군사 개입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높아졌고, 매킨리 대통령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미국이 해외에서 다른 주요 열강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첫 전쟁이었다. 미국은 개전 3개월 만에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제국을 내쫓고 쿠바를 점령했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괌, 필리핀까지 합병했다. 그리고 매킨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국기는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 외국 영토에 꽂힌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미국에게는 전례가 없던, 지정학적 고려 사항을 기초로 한 외교정책 개념을 추구했다. 그 개념에 따르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19세기 영국이 유럽에서 수행하던 세계적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즉 균형을 보장하고 유라시아 앞바다를 맴돌며 전략적 지역을 지배하려고 위협하는 열강의 반대 방향으로 저울을 기울임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홉스 식 세계관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연안 방어에 집중했던 해군력을 세계 최대 규모의 대양 함대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미 해군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기동력을 확보하게 해줬다. 한편 극동 지역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러시아의 견제 세력으로 일본을 지지했다가, 일본의 전력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판단한 뒤에는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며 양쪽을 중재하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다. 루스벨트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실질적인 위협 능력을 보유하고 지정학적 세력 균형에서 우위를 점할 때, 인도적 가치가 최고로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1912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우드로 윌슨은 역사적인 도덕적 사명감에 심취해있었다. 그는 미국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자"전쟁에 개입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의회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윌슨의 원대한 전략은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미국과 같은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를 갖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기초는 칸트와 유사했는데,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원인이 서로 다른 국익이나 열망에 내재한 모순이 아니라 독재정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윌슨은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를 의회에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국가는 이웃 국가에 첩자를 잔뜩 보낸다든지, 음모를 꾸며 공격을 가하고 정복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조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음모는 아무도 질문할 권리가 없는 곳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다행히도 그러한 음모는 여론이 국가의 모든 일에 관한 정보를 모두 공개하라고 명령하고 요구하는 곳에서는 불가능합니다.


1차 대전 종전 후, 윌슨은 독일 황제가 물러날 때까지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제 평화를 유지하려면 "비밀리에 독자적으로, 그리고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세계 평화를 어지럽힐 수 있는 모든 독재 권력을 파괴하거나 무력화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의 대중은 승자와 패자 간의 최종적인 화해를 통하지 않으면 결코 안정된 유럽 질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경험은 무시한 채 징벌적 평화를 요구했다. 자제심은 빈 회의에서 협상했던 귀족들의 속성이었다.


윌슨은 민족 자결 원칙이 실행되면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확산될 거라고 생각했다. 각 민족에게 국가를 부여하여 전쟁을 뛰어넘는다는 개념은 설득력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윌슨이 끈질기게 요구한 대로 언어에 기초한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자, 독일의 지정학적 장래가 밝아졌다. 전쟁 전에 독일은 어떠한 영토 확장도 저지하려는 3개의 주요 열강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이제 독일은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설립된 다수의 소국들을 마주했다. 여기서 민족 자결 원칙은 부분적으로만 적용되었는데, 동유럽과 발칸 지역의 민족들이 서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탓에 신생 국가마다 다른 민족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전략적 약점은 이념적 취약성과 뒤섞였다. 유럽 세력 균형의 중요한 축이던 러시아는 소국들 너머로 고립되었다.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는 비탄에 잠겨 "수많은 소국들 중 다수는 과거에 한 번도 스스로 안정된 정부를 수립한 적이 없는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국가들 모두가 모국과의 재통일을 요구하는 다수의 독일인을 포함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윌슨이 힘의 공동체로 계획했던 것은 이후 '집단 안보'로 알려진 새로운 개념이었다. 국제 연맹은 구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도덕규범의 위반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규범의 정의가 각국의 국익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실효성이 없고 예측 불가능성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윌슨 이후 현재의 UN 체계 까지, 개념적인 의미의 집단 안보로 군사 행동이 작동한 경우는 한국 전쟁과 제1차 이라크 전쟁뿐이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필요하다면 일방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미국이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군사 행동이 이뤄졌다. 유엔은 미국의 결정을 비준했다. 집단 안보 체제는 국제 평화와 안보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거듭된 상황에서 줄곧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윌슨 이전의 '구 외교'는 경합 세력들의 균형 상태 속에서 경쟁국들 간의 이해관계와 적대적 국가들의 열정을 상쇄시키려고 노력했다. 윌슨의 '신 외교'는 전략적 원칙이 아니라 도덕적 원칙에 의거하여 국제 문제를 재편하려 했고,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윌슨은 현대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꾸준히 손꼽힌다.


1941년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윈스턴 처칠과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며 2차 대전 참전을 선언한다. 루스벨트는 강대국 지도자들 간의 인간적 신뢰를 중요시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 종전 후 스탈린의 소련과 냉전 시대를 이어가던 중, 4선 취임 후 4개월 만에 병사했고, 그 뒤를 이어 트루먼이 갑작스럽게 대통령에 취임한다.



8. 미국: 양면적인 초강대국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유일한 강대국으로 전 세계 GNP의 60%를 생산했다. 전후 12명의 대통령은 모두 세계에서 미국의 각별한 역할을 열정적으로 주창했다. 각 대통령은 미국이 분쟁 해결과 모든 국가의 평등을 이타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에 착수했음을 자명하게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궁극적인 성공 기준은 세계 평화와 전 세계의 화합이었다. 그 비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은 다른 역사적 세계 질서관들과 맞닥뜨리기 시작했다. 미국식 국내외 질서 개념을 거부하는 정부와 군사 정책은 끈질기게 도전해왔다. 미국의 능력이 아무리 어마어마해도 그 한계는 분명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맡은 역할의 본질을 놓고 고통스러운 논쟁과 분열을 겪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 질서를 추구하며 다섯 차례 전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대중의 지지를 받던 그 목표들은 국론 분열의 원인이 되면서 폭력 사태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 전쟁들 중 세 번의 전쟁에서 초당적 합의는 사실상 무조건적 철수라는 입장으로 돌변했다. 베트남에서는 의회 결정에 따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대통령의 선택에 의해 전쟁에서 물러났다. 역사가들은 사회 전체에 퍼져 있던 힘과 외교,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힘과 정당성에 대한 양면적 태도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차질이 생겼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냉전의 시작


종전을 위한 아무런 준비 없이 2차 대전이 종전되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비전을 현실화화한 유엔 창설을 추진한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유엔 헌장은 두 가지 국제 의사결정 방식을 도입했다. 모든 국가들이 1국 1 투표권을 갖는 것과, 5개 강대국(미, 영, 프, 소, 중)으로 구성된 안전보장이사회가 거부권을 가지는 내용이었다. 유엔은 상임이사국들이 공통의 세계 질서 개념을 갖고 있는 경우에만 작동할 수 있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공산화하면서 자유주의 국가들과 대립한다. 이에 맞서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과 함께 나토를 창설한다. 이로부터 세계 질서는 서로 맞지 않는 두 초강대국의 대립으로 이뤄졌고, 두 초강대국은 각자 자기 영역 안에서 국제 질서를 수립했다.


한국 전쟁


한국 전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이 야기한 논쟁은 10년 뒤 어떤 문제가 한국을 괴롭힐지 미리 알려주었다. 1950년 스탈린의 승인을 받은 김일성이 38선을 남하해 공격을 했고, 트루먼의 미국은 이를 2차 대전 개전을 감행한 독일과 일본을 모델로 한 중소 침략으로 해석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 세력들의 동기는 복잡했다. 스탈린은 남한 침략이 중국의 주의를 자국 국경선에 대한 위가 상황으로 돌리고 미국의 관심 또한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면서 미국의 일부 자원을 소모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련의 지지로 침략이 성공한다면 소련은 평양의 통일 사업으로 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의심을 생각해 보면, 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일종의 평형추가 생길 수 있었다. 마오는 스탈린과 다른 이유로 김일성을 지지하고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소련에 의해 고립되는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한국을 차지하려는 소련의 관심은 여러 세기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고 스탈린이 중소 동맹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이념적 종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정리하면, 한국 전쟁의 기원은 공산주의 국제 질서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삼자 간의 작전이었다.


미국은 북한군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참전을 선언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았다. 미군은 38선 너머로 북한군을 몰아내고 멈출 수도, 평양-원산 선까지만 진격할 수도, 중국 국경선까지 진격할 수도 있었다. 마오는 전선이 부산 주변까지 내려가 있을 때 이미, 미국이 참전하면 전세가 뒤집힐 것을 전제하고 전략을 세웠다. 그는 압록강 국경선에 25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저우언라이에게 평양-원산 선을 넘어오면 참전하라고 지시했다. 미군은 압록강까지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중국은 참전하게 된다. 마오 입장에서 미국이 중국 국경선까지 이동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지분 그 이상을 의미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트루먼은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했는데, 당시는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한 지 9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만약 미군이 중국 국경선을 따라 주둔하고 대만과 본토 사이에 미군 함대가 버티고 있는 상황으로 한국 전쟁이 끝났다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행위는 전략적 재앙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세계 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념이 마주치자 미국은 베스트팔렌 원칙과 국제법 원칙에 따라 현 상태를 지키려 했다. 현 상태를 보장하는 것만큼 마오의 혁명 임무에 대한 인식에 역행하는 것은 없었다. 그의 혁명 경험은 내전이 교착 상태가 아니라 승리 아니면 패배로 끝난다는 명제에 근거했다. 그는 미국이 압록강을 따라 안전하게 자리 잡고 나면 다음 단계로 베트남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을 고립화하는 과정을 마무리 지을 거라고 확신했다(4년 뒤 미국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실제로 개입한다).


전쟁이 길어지면 미국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트루먼은 봉쇄 개념을 강조했고, 맥아더는 완전한 승리를 주장했다. 공산주의 측은 교착 상태를 이용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에 대한 미국 대중의 불편한 심기를 키웠다. 맥아더는 해임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결국 미중 양측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했다. 미국은 봉쇄정책을 유지하면서 동맹국의 영토를 지켜주었다. 중국은 자국 국경선에 접근하는 세력을 방어했고,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국제 질서를 경멸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최대의 실패자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동맹국들의 신뢰를 잃었다. 중소 분열의 씨앗은 한국 전쟁에서 뿌려졌는데, 소련이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병력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신속하고 방대한 규모로 재무장에 돌입하면서 서유럽이 불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미국의 봉쇄정책은 정치적 전통이 살아 있던 유럽에서는 잘 작동했다(마셜 플랜, 나토). 그러나 신생 후진국들은 정치적 토대가 미약하거나 취약했고, 경제 원조는 안정으로 이어진 경우만큼 빈번히 부패로 이어졌다. 베트남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고 곪아 터질 위기에 봉착했다.


1951년 트루먼은 남베트남에 민간인 고문을 파견하여 게릴라전에 맞섰다. 1954년 아이젠하워는 군사 고문을 따로 보냈다. 1962년 케네디는 전투 부대를 지원 목적으로 파병했고, 1965년 존슨이 원정군 파병을 결정하며 50만 대군이 파견되었다.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하고, 남베트남 전복을 위해 하노이에 무장 배치된 군사력을 파괴하며, 충분한 군사력으로 북 베트남을 폭격하여 하노이에 대한 정복 의지를 꺾고 그들을 협상 테이블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존슨 행정부의 중반기 정도가 돼서야 논란을 일으킬 만한 계획으로 간주되었다. 1968년의 구정 대공세(위키 링크)는 북베트남 군에게는 군사적 패배를 의미했지만, 미국에게는 여론전에서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거세지며 시위가 빗발치게 된다.


닉슨은 전임자 존슨 행정부가 승인한 50만 명의 병력이 베트남에서 작전 중일 때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끝내는 일에 전념해 1년에 15만 명씩 철수했고 1971년에 지상전 참여를 중단했다. 72년부터 정치적 타협과 휴전이 시작되었고, 73년 합의가 도출되었다. 닉슨 정부는 남베트남 정부가 자력으로 일상적인 협정 위반 사건을 극복할 수 있고, 전면적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이 공군력과 해군력으로 도와주며,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은 남베트남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더욱 투명한 제도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73년 미국 의회는 대 베트남 원조를 줄였고, 75년에는 모든 원조를 끊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정복하고 국제 사회는 침묵했다(베트남전 나무 위키 링크)



리처드 닉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로, 닉슨만큼 세계적 개념으로서의 국제 질서를 그렇게 체계적이고 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룬 대통령은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 세계의 유력자들끼리 친한 정도보다 미국이 그들 각자와 더 가까운 상태에서 소련과 중국을 견줘 보자는 주장을 한다. 미국이 공식 문서를 기초로 '베이징과 대화 관계를 수립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밝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의 이상주의를 현실화하고 실용주의를 장기화하려던 닉슨의 시도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이상주의자들은 닉슨이 지정학적 원칙에 따라 외교 정책을 실행한다고 비난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소련과의 긴장 완화가 서양 문명에 대한 공산 세계의 도전에 기권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를 문제 삼았다.


닉슨 이후의 대통령들


닉슨의 뒤를 이은 제럴드 포드는 미국의 분열을 극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미 카터는 중동의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자기 시대에 잘 어울리고 적응한 대통령으로,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으로 군비 경쟁을 제안했다. 조지 부시는 냉전을 노련하게 종식시켰고, 1차 이라크 전을 참여해 승전으로 이끌고, 1991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막아내 세계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1992년 부시를 꺾고 당선된 빌 클린턴은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하며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달랬지만, 부시와 비슷한 정도로 외교 정책에 대한 소명을 재확인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를 자행한 알 카에다를 비호했고, 미군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 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다. 연합국 작전의 주요 전제는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는 민주적이고 다원적이며 투명한 아프간 정부와 국가 차원에서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아프간 국민군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상 어떠한 기관도 그렇게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 전례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관례적인 의미의 국가라기보다는 지리적인 지역 표시에 가까웠다. 이 지역은 단일 권력이 일관되게 관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면 연합군과 유엔의 목표는 아프간 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창조하는 행위에 해당했다. 불가피하게도 그러한 제도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활동들로 인해 오랜 특권이 붕괴됐고, 외부 세력이 이해하거나 통제하기 힘든 방식으로 복잡다단한 부족 연맹체가 개편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도 연합국의 목표는 아프간 전역을 통해 달성되지 못했고, 아프간 정부의 행정력은 카불과 그 주변 지역으로 한정되고 있다. 그 외 지역은 봉건적인 반 자치 지역들로 이뤄진 동맹체가 인종을 기반으로 지배하는데, 서로 경합하는 외국 열강들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와 유사하게, 사담 후세인을 축출한 미국의 목표는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후세인의 수십 년에 걸친 탄압으로 오래전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비정해진 시아파는,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승인해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수니파는 민주주의가 자신들을 탄압하는 외세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이를 근거로 대부분의 수니파는 전후의 헌정 질서를 규정하는 데 중요했던 2004년 선거를 거부했다. 바그다드 정부의 흉악한 맹습을 기억하는 북쪽의 쿠르드 족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기르면서 국고에 의존하지 않는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유전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모든 세력들은 국가 독립과는 미세하게 다른 관점에서 자치권을 정의했다. 이란과 시리아는 각각 시아파와 수니파를 지지했고, 알 카에다는 시아파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했다. 외부 집단은 영향력, 영토, 석유를 선점하기 위한 제로섬 싸움으로 전후 질서를 간주했다.


목적과 가능성


2차 대전 후 미국이 치른 다섯 번의 전쟁 중 심각한 국내 분열 없이 참전하여 제시한 목표를 달성한 경우는 조지 부시 때 치른 1차 걸프전뿐이었다.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다툼으로 자주 묘사된다. 미국이 두 가지 방식 모두로 행동할 수 없다면, 미국은 미국과 세계 전체에 그중 하나도 달성할 수 없는 국가로 비칠 수도 있다.



9장. 기술,  균형, 그리고 인간의 의식


모든 시대에는 중심 사상이 있다.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다수의 사건을 설명해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거나 위로를 건네는 일단의 신념 체계 말이다. 중세의 중심 사상은 종교였다. 계몽 시대의 중심 사상은 이성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민족주의였다. 우리 시배를 지배하는 개념은 과학과 기술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에게 유례없는 번영과 행복을 안겨주는 동시에 파괴적인 결말의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냉전 시대 핵 균형은 두 초강대국이 공멸이라는 결과를 충분히 인지한 상황에서 자제를 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신생 핵 보유국의 증가는 핵 균형을 위태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1968년 미, 영, 소는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체결했으나, 이후의 역사를 보면 그 구속력은 강하지 않다. 남아프리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은 핵무장을 포기했으나, 인도, 파키스탄, 이란,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다. 미국은 이후에도 핵 기술의 첨단을 확보하여 핵 억제력을 갖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한편 정보 기술과 사이버 공간은 전략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사이버 공간이 이미 현실 공간과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일상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국가 간 세력 균형 관점에서 사이버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여러 논쟁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 혁명을 일으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정보의 접근성을 높였다. 그러나 정신의  범위를 정보, 지식, 지혜라는 위계로 바라보면, 정보의 범람이 상위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얻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정책과 그에 대한 지지가 마케팅과 데이터 마이닝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허무해질 수도 있다. 각종 소셜 미디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집단 지성을 촉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 방향으로 여론을 오도하고 군중심리를 증폭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전체주의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다.


질서는 자유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지지는 전략적 태도에 기반해야 한다.



결론. 우리 시대의 세계 질서


조만간 모든 국제 질서는 그 질서의 응집력에 문제를 일으키는 두 추세 - 정당성과 힘에 대한 도전 - 에 직면할 것이다. 정당성에 대한 도전은 국제적 협정의 기초가 되는 가치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때, 즉 협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가치를 포기하거나 혁명에 의해 다른 정당성 개념을 도입할 때 발생한다. 힘에 대한 도전은 기존의 질서가 힘의 관계 변화를 조정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질서의 두 측면인 힘과 정당성 사이에서 절충을 이루는 일은 정치가의 핵심 능력이다. 도덕적 차원은 생각하지 않고 힘만 계산하면 모든 의견 충돌이 힘의 시험으로 바뀔 것이다. 반면 도덕적 차원만 우선시하고 힘을 무시할 경우 어리석은 군사력 충돌을 낳게 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극단적 태도는 국제 질서의 일관성을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 시대의 힘은 기술적 발전으로 전례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편, 정당성에 대한 요구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이 심해짐에 따라 21세기 세계 질서의 구조는 세 가지 중요한 차원에서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는 국제 질서의 기본 단위인 국가의 특성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유럽은 유럽 연합이라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며, 중동의 분쟁 지역에서는 국가와 부족 사이 어딘가에서 모호한 형태의 자치 단위들이 난립하고 있다.


두 번째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국경선을 무시하는 반면, 국제 정책은 각국의 대립적 목표들을 조정하려고 애쓰는 한편 국경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역학 관계로 인해 주기적인 글로벌 금융위기가 반복되었다. 각 위기의 원인은 달랐지만 불건전한 투기와 리스크에 대한 조직적인 과소평가가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났다. 거래의 특성을 이해하기 힘든 금융 상품들이 개발되었고, 대출기관들은 자신들의 책임 범위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주요 국가들을 포함한 대출자들은 자신들의 부채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국제 질서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한다. 국제 질서의 번영이 세계화의 성공에 좌우되지만, 세계화를 추진하는 과정이 종종 국제 질서의 목표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강대국들이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상의하고 협력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국제기구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현존하는 다자간 토론장이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많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상한 비판처럼 들릴 수 있다 - UN, APEC, ASEAN, G20 등. 그러나 이 회의들의 성격이나 각각이 개최되는 빈도수는 장기 전략을 다듬는데 불리하게 작용한다. 공식적인 의사일정을 협상하고 일정의 논의하는 과정이 대부분의 준비시간을 잡아먹는다. 그 외 각종 제약들로 인해 형식과 의전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큰 반면 실질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다뤄지기 어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