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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예 Dec 10. 2015

몽마르트의 화가


파리에서는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몽마르트언덕에 가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책을 읽어도 좋고, 테르트르 광장을 쭉 돌며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해도 좋을 날씨이다.^^

‘언덕의 꼭대기’를 뜻하는 테르트르 광장은 거리의 화가와 여행자들로 늘 북적이는 몽마르트의 관광명소이다. 파리의 명소들을 그린 여러 가지 크기의 캔버스를 구경하는 재미, 능숙한 손길로 저마다 다양한 캐리커쳐를 그려나가는 화가들의 솜씨를 평가(?)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이런 예술적이고 보헤미안적인 분위기가 좋아서 오늘도 이곳으로 발걸음을 했다. 



광장의 한 면은 초상화를 그린 캔번스를 올린 이젤이 줄지어 있다. 오늘은 왠지 평소해보고 싶었던 일을 꼭 하고 싶다. 멋진 내 초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많은 화가들 사이를 다니며 샘플들을 둘러보고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화가에게 내 초상화를 부탁하기로 했다. 갖가지 샘플 중에 옆모습만 그리는 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50대 중반의 수염이 덥수룩한 부드러운 인상의 아저씨였다. 나의 옆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화가의 손으로 그려진 나의 옆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먼저 딜을 했다. 초상화작업을 마치고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자기는 말이 많이 없어서 인터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뷰 질문을 보여줬더니 한 번 훑어본 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인터뷰를 하겠단다. 이유를 물으니 질문들이 재미있단다. 그렇게 딜이 성립됐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적막한 공간 속에 멈춘 듯 앉은 자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나는 사각사각 화가의 연필 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설렌다. 누군가의 모델이 된다는 건 이토록 짜릿한 일이구나!’

몇 분이 흐르자 긴장이 풀리면서 여유가 생겨났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봤더니 겨우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섰다. 나와 그림을 번갈아 보는데 얼핏 보니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이다. 떨려서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끼지만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있는 내 얼굴을 상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어라, 벌써부터 몸의 곳곳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비로소 깨달았다. 어깨라도 살짝 비틀고 싶지만,..ㅠ 그런 나의 불편함이 밖으로 드러났는지 화가가 우아하고 교양이 넘치는 말투로 “아주 좋아요. 아름다워요.”를 반복하며 격려해준다. 감성 충만한 손동작의 포인트로 시선을 모아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드디어 40분 정도가 지나고 화가가 종료를 알려왔다. 나는 곧바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뛰어난 작품이었다. 내 자신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잠재되어 있는 나를 표현해 주었다는 느낌이랄까? 긴 비행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나, 온화한 표정의 나 같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림을 보니 이 화가에게 더욱 호기심이 생겨 얼른 이름을 물어 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삼벨Samvel이에요. 여기서 일한 지는 15년 됐죠.

테르트르 광장이 시에서 운영되고 있어,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에서 운영하는 그래픽 예술 및 건축 고등전문학교(EPSAA) 에서 선발시험을 치러야하는걸로 알고 있어요. 처음 테르트르 광장에 지원했을 때의 방식은 어땠나요?

제가 지원했을 때는 그저 그림만 시에 보내면 됐었어요. 

한 번에 붙으신거에요?

한 번에 붙으셨다니 행운아이시네요.

글쎄., 행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지원했을 때 어떤 목표 또는 야망이랄까? 뭐 그런 것들을 갖고 계셨나요? 

어떠한 목표도 없었어요.

그럼 왜 지원했어요? -_- 

내가 좋아하는 걸 하려구요. 야망이랑은 다르죠. 꿈도 아니고 야망도 아니죠. 그것뿐이에요. 아주 간단하죠? 당신이 기대했던 답변이 아닌 걸 알아요. 당신은 경쟁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안그런가요? 

제가 안그래요.


(악 진짜 ㅋ이사람 정체가 뭐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에 나는 빵 터지고 삼벨씨도 그런 내가 재밌는지 같이 웃는다.)


그럼 선생님이 지금 하시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시나요? 

내가 하는 걸 하는 이상 전 항상 만족해요. 

그게 다 인가요? 

네 그게 다에요.

시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광장 주변에서 서서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손님을 다 뺏어갈 것 같은데요. 또 근처 상점에서 파는 그림들은 테르트르 광장의 그림들을 중국에서 찍어 만든 ‘위조그림’, ‘가짜그림’이라던데 이런 것들이 신경을 거스르지는 않나요?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들은 훨씬 싸게 파는 데도요? 사기꾼으로 느껴지지 않으세요?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진짜로요? 헐. 왜지?;; 

판단은 사람들의 몫이에요.

일하는 조건은 어때요? 

모든 일은 다 힘들죠. 좋은 조건이 있는 일을 알고 있다면 말해줄래요?

하루 벌이는 얼마나 되죠? 

말해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수치를 알려줘도 그건 거짓말이 될 거에요. 정확하지도 않고 그건 진짜가 아니니까요. 안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안정적 인거라면 급여를 받고 생활하겠죠. 벌이는 날씨나 관광객에 의해 달라요.  

오늘은 날씨도 좋고 관광객도 많으니 좋은 날이네요? 

매일이 좋은 날이에요.

날씨가 안 좋고 관광객이 적으면 많이 벌지 못하겠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저에게 안 좋은건 아니에요. 

흐억 그런가요?;; 

오늘 돈을 못 벌어도 저렇게 빛나는 태양이 있잖아요.(피식)

아 네...^^; 그럼 돈도 못 벌고 태양도 없다면요? 

그래도 울지는 않을 거예요.

테르트르 광장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상업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테르트르 광장이 혼을 팔았다고 하는 데에 동의하시나요?(정색하면서) 

(침묵이 흘렀다.)

흠..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 질문을 쓴 사람한테 물어봐야 될 것 같은데요? 

저..전데요?? 

그럼 당신이 저보다 더 잘 알겠네요. 

엥?? 전 모르는데요?? 

당신이 질문한 거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이 없어요. 그 생각은 당신꺼잖아요. 제께 아니에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전 아니에요. 

그렇다면 제 의견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무엇이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거죠?

제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관광객들은 기념품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을 펼치기 보다는 파리의 기념물을 그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봤어요. 그래서 그림이 발전하는 것도 어렵고. 화가들의 관계도 전 같지 않고... 

잠깐 여기서 질문! 요즘 시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전과 같나요? 

아............ 그렇죠.

무슨 일이 생긴 거죠?

기술에 발달로 인해서(?) 우린 더욱 개인적이 됐죠.

맞아요.

보니까 화가들이 상인들처럼 한국말이나 외국말을 하면서 호객행위를 하죠. 전에는 어땠나요?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처럼. 당연히 달랐죠. 전에는 물론 경제 위기가 없었죠. 이 세상에 경제위기가 있다면 테르트르 광장에도 있는거에요.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떨지 저도 모르는 일이구요. 여기도 다를 게 없거든요. 똑같은 지구 아닌가요? 

아, 네네.. 맞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혹시 인생의 걸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나요? 

아니요. 그런 생각 안 해요.

화가들의 꿈 아닌가요? 

전 안 그래요.

다른 화가들은요? 

잘 모르겠는데요.

다른 화가들이랑 소통 안하세요?(버럭) 

소통하지만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답할 순 없네요. 전 제 입장에서만 답할 수 있어요. 

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초상화 말고 다른 것도 그리시나요? 

다른 것도 그려요. 당신을 그려줄 수 있어요.

전 이미 그려주셨잖아요~! 

머리를 그렸으니 그 나머지도 그릴 수 있어요.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푸하하하하하하

그래도 아주 훌륭한 걸작품 만들고 싶지 않으세요? 

누굴 위해서?

선생님을 위해서요! 

하지만 전 이 세상에 남지 않고 떠날건데요? 

그럼 테르트르 광장에 있는 걸로 행복하신거에요?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때요?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네네 행복해보이세요. 흐흐 

그림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이죠?


(헐. 정적 . ... 체감 5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친다. 내가 뭐 잘못했나? 뭐지? 왜 대답을 안하시는거야~!!

삼벨씨가 드디어 입을 떼어 말했다.)

대답하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제가 어떤 문장을 말해도 제한적일거에요. 문장은 모든 걸 담을 수 없죠.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림을 정말 사랑하시는게 느껴졌어요.!^___^정말. 

어떤 얼굴 그리기를 좋아하세요? 서양인? 동양인? 흑인?

저는 특색 있는 사람을 그리기 좋아해요. 얼굴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걸 보죠. 

그게 보이시나요? 

네 보이기 마련이죠. 흥미로운 특색과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얼굴.

흥미로운 특색이 뭐죠? 저는 흥미로운 특색이 있나요?

네.

어떤 특색이요????

당신의 얼굴은 예쁜 이목구비와 아름다운 선이 있고 깊은 시선을 갖고 있어요. 이 모든 게 내면을 나타내죠. 당신은 약간의 짓궂으면서 영리한 면이 있어요. 긍정적이라고도 해드리죠. 

우하하하하하하.

선생님, 테르트르 광장이 다른 어디에 또 존재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자, 당신의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답변을 해드릴게요. 그림은 계산이 아니에요. 질문서도 아니죠. 셈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음.. 정적)  

어렵네요.

뭐가 어려워요? 아주 간단한걸요. (윙크)

오늘도 관광객으로 붐비는데 가끔은 조용히 혼자 그림 그리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조용히 혼자 그림 그리는데요? 절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죠. 

테르트르 광장에 출퇴근하는 시간이 정해져있나요?

당신 지금 또 계산하고 있어요! 

제가 사고 싶은 그림이 있었는데 그 화가가 이 이른 시간에 벌써 사라졌더라고요.ㅠ 

피곤한가보죠. 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근데 그렇게 자리를 비우면 시청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요? 벌금 같은걸 문다던가? 

왜죠? 당신 또 계산하고 있네요.! 맙소사! 

크크 알겠어요.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워서 머리가 복잡해요. 인터뷰는 여기까지 입니다! 히히히

삼벨 끝났나요? 당신은 인터뷰에 만족하시나요? 

네!! 물론이죠~^^*  


우문현답이라는게 이런걸까? 절대로 호들갑스럽고 현란하지 않은 모습, 삼벨씨의 말투는 침착하면서도 여유로움, 냉정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는 삼벨씨의 말처럼 모든 걸 재고 따지는 계산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습성에 도움을 받아(?) 테르트르 광장의 운영법을 찾아보았다. 그 조항과 법규가 10페이지에 달했다. 거기에는 실용적 예술터의 상징인 이 곳의 이미지를 더욱 촉진시키고 더 잘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이런 제도 안에 있기 때문에 삼벨씨가 저토록 원초적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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