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친상을 당하여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모친을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 또한 인생의 경험이기에 장례식이라는 큰 일을 겪여 나가면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은 더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경험 중 재미있는 요소를 하나 떠올려본다면, 손님을 보고 누구의 손님인지 맞추는 일이다. 어머니 슬하에 나와 누나들을 포함하여 4 남매가 있었고 모두가 결혼을 하였으니, 아버지의 손님을 제외하고는 총 8명의 성인 호스트가 장례식장에 있었던 셈이다.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장례식장을 찾아주신 손님들은 결국 8명 각각의 지인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데, 오신 분의 겉모습을 보고 누구의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맞추는 것은 장례를 원만하게 치를 수 있는 현실적인 팁이기도 했고 우리들의 소소한 놀이 같은 것이기도 했다. 수백 명의 손님을 맞이하다 보니 점점 더 예측력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8명 각자가 살아온 방식, 배경, 성격들이 모두 상이하기에 그들 각각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인 그룹들이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면 안경을 끼고 왠지 연구실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할 것 같은 사람이 찾아온다면 높은 확률로 전자공학과 교수이신 큰 매형의 손님이었고, 운동을 잘할 것 같은 풍채에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있다면 체대를 나오셔서 사업을 하고 계신 막내 매형의 손님일 가능성이 높았다.
각각의 손님을 맞추는 것에 더하여 또 하나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온 가족 친지들이 풍기는 동질적인 느낌이었다. 우리 가족들을 아끼는 마음과 어머님을 애도하는 마음은 모두 다 같았지만, 그 언행들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데 가족들끼리는 일정 부분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옷 입는 스타일이나 생김새까지 더해서 생각해본다면 멀리서 보아도 그들이 가족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친가 쪽 친척, 외가 쪽 친척은 물론이고 4명의 자식들이 만난 4개의 사돈댁들도 각각 공통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우리 가족을 보아도 얼굴 하나하나의 닮음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저들은 가족이구나'하는 식의 느낌이 들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가풍(家風)"인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가풍"이라는 단어는 사실 알고는 있지만, 대하 역사소설 같은 데가 아니면 거의 볼 일이 없는 단어였고 점점 더 그 사용빈도가 줄어드는 말이기에 꽤나 생소한 단어이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해보니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많은 특질들 중 상당 부분은 가풍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가족 안에서 비교를 한다면 나와 누나들은 꽤나 다른 사람이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나와 누나는 같은 궤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타인이 생각하는 내 모습의 절반 이상은 이 '가풍'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특질 중에 온전히 나만의 것인 것이 존재하기는 하겠냐 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길러지고 학습되어 왔는지가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떤 가풍에서 자랐고 그 결과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나와 내 가족들을 좀 더 잘 이해함과 동시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기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좀 더 생각을 정리해보게 되었다.
아내가 나에게 잔소리를 좀 할라치면 입버릇처럼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아내에게 '이 말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라고 말을 하곤 한다. 장례를 치르면서 내가 막내누나에게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막내누나가 저 말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어머님께서 우리 4 남매를 키우면서 굉장히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이었다. 자녀들을 항상 사랑하시던 어머니셨지만 무언가를 대신해주는 법은 없었다. 최종적으로 우리의 일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이었고, 그 책임 또한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 아버지 또한 본인께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고 우리를 그렇게 교육해오셨다.
내 일을 내가 결정해서 하는 것 -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독립성'은 나와 우리 가족들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런 성격 탓에 직장 생활 초창기부터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보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고, 부족한 경험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을 잘 이야기하곤 했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이 좋아서 그동안 리더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을 수도,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표현되는 방식들은 다들 조금씩은 다르지만 누나들 또한 그렇게 각자 '알아서' 살아가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자존감이 강하게,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이 세게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쓰시던 화장대에 아래의 시 구절이 코팅되어 놓여있었다. 사실 그동안 신경도 쓰지 못했던 글귀인데, 새삼 어머니 방을 돌아보다가 만나게 되었다. 딱 저 시처럼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길러내셨다.
세월의 강물 (또 다른 충고)
- 장 루슬로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서일까? 나뿐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일을 우리 가족들은 꽤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일을 준비하면서도 항상 오시는 손님들의 교통이 불편하진 않을까, 음식이나 분위기 같은 것을 어떤까를 생각하곤 하는데, 당연히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 항목일 수 있겠으나 우리 가족들에게는 우리 가족의 편의보다도 그런 부분들을 중시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 중 하나이다. 어머니 상을 치르고 혼자 지내시는 아버지가 걱정되는 마음은 당연할 것인데, "독립적인" 아버지 성격 상 자식들이 본인을 걱정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하여 아버지에게 전화를 안 드리곤 한다. 때로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답답하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새겨진 낙인 같은 본능이다.
보통 이럴 때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뉘앙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배려'는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결과적인 행동이고, '고려'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결과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다. 당연히 '고려'를 많이 할수록 '배려'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만, '배려'라는 특성보다는 '고려'라는 특성이 우리 가족들의 성향을 더 잘 드러내는 말인 것 같다. 특별히 배려를 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 입장에서 이것이 어떨까에 대한 생각이 드는 편이다.
타인에 대해서 많이 헤아린다는 말은 간혹 타인에 의한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 가족들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 중 하나일 것이고, 앞서 설명한 '독립성'에 배치되는 말이다.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지만 우리 가족들은 평균보다는 신경을 적게 쓰는 편이고 그 보다는 My Way로 살아가는데 좀 더 초점을 두는 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큰누나 사이의 일이라고 전해 들은 일화가 있다. 큰누나가 초등학생 정도였을텐데, 국어시험을 백점을 맞고 뿌듯하여 어머니께 자랑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을 하셨다고 한다.
"근데 넌 과학을 못 하자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건 분명히 부모로서 좋은 발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넌 과학을 못 하자나'라니...
지금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께서는 젠체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본인이 젠체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젠체를 하는 사람들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 수준 떨어지는 사람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와 누나들 또한 그러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 중 하나가 가진 것도 없는데 잘난 척하는 사람이다.
젠체는 꼭 잘난 척만을 의미하진 않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 형식적인 면을 생각하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짐짓 하는 것 등을 경계하는 것으로 좀 더 넓혀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남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의 잣대에 의해서 살아가는 편이라, 보여지는 무언가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속 빈 강정처럼 시시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담백하다'정도의 표현이 적합한 것 같다.
사실 나는 조직생활을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주목과 인정을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여러 번 가족들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이것은 유전적인 요인이나 가풍의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가족 중 나만 가지고 있는 특징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모습들은 꽤나 가까운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가 무슨 젠체를 하지 않느냐고 생각을 할 수 도 있을 것 같긴 하다. (주로 아내가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이 한쪽의 성향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젠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 나와 우리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 특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첫 번째로 언급하였던 독립성 덕분에 나와 우리 가족들은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편이라 사실 개성이 뚜렷한 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른 특질들이 이렇게 저렇게 조합이 되어 자식들에게 전파되었으며, 물려받은 것 이외에 본인들 고유의 무엇인가를 또 가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도 상당 부분은 가정 안에서 물려받고 배워오면서 길러진 특질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나를 좀 더 이해하고 가족들을 좀 더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가정에서 길러졌기에 우리 가족의 '가풍'이 나쁘게 보이진 않는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런 성격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부분은 좋다, 나쁘다, 낫다, 별로다라고 판단을 해야 하는 영역이라기보다는 모든 가정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개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내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개성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는 시간을 한번 가지는 것은 어떨까?
장례를 치르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늘 저녁 처음으로 같이 모일 예정이다. 와인이나 한잔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로 우리의 어머니를 추억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