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엽 Nov 02. 2019

"1만 시간의 재발견"을 읽고...

'보통사람'에게 '최고'에 이르는 방법은 무슨 의미인가?

들어가며 : "PEAK" vs "1만 시간의 재발견", "아웃라이어" vs "1만 시간의 법칙"

 나는 번역된 책을 읽으면 항상 원제목을 찾아보는 편이다. 원제목을 보면 작가의 원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고, 한국어판 제목을 보면 출판사의 마케팅 포인트를 알 수 있다. 원제목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경우 대부분은 왜 이렇게 왜곡에 가까운 의역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곤 한다. 하지만 가끔 오히려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오히려 원제목보다 훨씬 이해가 잘되며, 마케팅 측면에서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들 때가 있다. 이 책의 경우 굳이 둘 중 하나로 분류하자면 후자일 텐데, 마냥 좋은 제목 선정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면도 존재한다.

 "PEAK"라는 원제목을 "1만 시간의 재발견"이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바꿈으로써 분명히 "1만 시간의 법칙"을 인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끄는 데는 성공하였을 것이다. 책의 메인 아이디어라고 할 순 없으나, 분명히 "1만 시간의 법칙"을 언급하고 있으며, 시간의 길이가 아닌 노력의 질에 주목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으니 "재발견"이라는 제목도 꽤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분명히 '1만 시간의 법칙을 재발견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중심 의도가 아니라는 것도 명백하다. 

 더 웃긴 부분은 우리가 굉장히 자주 사용하고 있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왜곡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대중들에게 크게 달려진 계기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 덕분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남들과 비교했을 때 특이점으로 느껴질 수 있는 수준의 성공을 달성한 사람 (아웃라이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가 언급한 것들 중 하나가 '1만 시간에 달하는 노력'이다. 하지만 '1 만 시간의 노력'은 그가 제시한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고,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특별한 기회'와 '역사 ·문화적인 유산'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웃라이어"라는 책의 제목도 잘 기억하지 모르고 책의 더 중요한 아이디어인 '환경적인 요인의 중요성'에 대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1만 시간의 법칙"만 기억하고 있다.

 책의 한국 출판사인 '비즈니스북스'에서는 "1만 시간의 법칙"과 "아웃라이어"에 대한 이상한 현상을 잘 발견하여, 굉장히 성격이 비슷한 이상한 현상을 "1만 시간의 재발견"과 "PEAK" 책에서 재현했다. 



저자는 무엇을 재발견하였는가?

 이 책 서문의 제목은 '타고난 재능이란 없다'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은 '최고'에 이르는 방법은 '노력'이다. 저자의 메인 아이디어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노력을 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이고,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의식적인 연습'이다. 단순히 시간을 쏟는 것보다는 기술 향상을 위한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하며, 이를 지도해줄 좋은 선생/코치가 필요하며,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피드백하는 과정이 바로 '의식적인 연습'이다. 사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내가 일을 한지 만 9년이 되어 간다. 하루에 최소한 8시간은 일했고, 1년 중 영업일이 250일가량이니 시간으로 환산을 해보면 18,000시간 정도를 일한 것 같다. 1만 시간의 법칙에서 말하는 시간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이다. 하지만 내가 최고가 되었는가? 전혀 아니다. 

 최고가 되지 못한 이유는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말하고 있는 '의식적인 노력'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고, "아웃라이어"에서 말하는 '특별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거나 '역사·문화적인 유산' 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최고에 이르는 길을 다루고 있는 명저서인 두 책에서 말하는 메인 아이디어들은 모두 일반 사람들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일 수 있다. 두 저자는 그것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것이다.


 책에서 오히려 신선하게 읽혔던 내용 중 하나는 최고가 되는 분야에 대한 것이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무작위로 불러주는 숫자를 외우는 테스트에 대한 것이다. 살면서 몇 번 해본 일도 없거니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분야이다. 나에게 재미있게 다가왔던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는 '즉각적인 상황에서도 말하기'이다. 내가 나름대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인데, 이런 별것 아닌 분야에서도 '최고'와 '노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선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일반적인 사람이 이야기하는 전문 분야에서만 최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책의 5장에서는 직장에서 의식적인 연습을 어떻게 하는지, 6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보통 '최고'라는 단어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분야 - 학문 분야, 예술 분야, 경영 분야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곤 한다. 우리는 '최고'라는 단어와 '성공'이라는 단어를 헷갈리곤 한다. 또한 '지식적인 전문성'과도 헷갈리곤 한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최고'의 분야는 다양하다 못해 모든 것에 해당되기에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내가 하고 있는 모임인 "Project 1"의 창립 멤버 중 한 친구가 말했던 "분야만 좁힌다면 누구나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보통사람'인 내가 볼 때...

 보통 성취를 논할 때 '노력'과 '재능'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가 언제나 논쟁거리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은 이후의 나는 항상 '재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아무리 이 책이나 '아웃라이어'를 읽어도 '재능'의 중용성에 대한 생각이 쉽게 없어지진 않는다. 왜 나에게 그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노력하기 위한 재능'이다. 노력을 아예 하지 않고 최고가 될 순 없다. 이 부분에서는 '재능 중요성 지지자'인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 아닐까 최근에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조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새삼 예전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특정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가 필요한데, 그 동기부여는 '재능' 혹은 '선천적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선천적인 조건들은 굉장히 다양하고 어떤 조건에 반응하는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성향의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데, 내가 어떤 시도를 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인정을 받으면 동기부여가 되어 더 잘하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처음에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운에 의한 것도 있을 테지만 이것은 상당 부분 선천적인 것이다. 나는 운동이나 노래 같은 데는 영 재능이 없는데, 아무리 1만 시간의 노력을 가하더라도 최고에 이르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다. 당연히 어린 시절 했던 운동과 노래에 대한 첫 번째 시도들은 볼품없는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고, 인정을 못 받으니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공부에 대한 영역은 그래도 조금은 나은 성과를 보였으니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다른 누군가는 '경쟁심'에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여 노력을 하게 되는데, 성격적으로 누군가는 '경쟁심'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경쟁심'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관심분야'에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도부터 인정을 받지도 못 하고, 누군가를 이길 수도 없는데 그냥 그 분야가 너무 좋은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동기부여 요인이 없어서 쉽사리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선천적으로 특정 분야에 빠져드는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동기부여'의 요인들은 굉장히 다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 동기부여의 요소들은 선천적인 부분들이 많거나, 아직 제대로 의식이 형성되기 전 굉장히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근거한다. 반드시 '재능'이라는 능력에 근거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후천'과 '선천'의 논쟁에서 나는 '선천'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두 번째로 내가 왜 '선천적인 재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내가 '보통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보통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을 기준으로 특정 분야의 수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5단계로 나누어 보자. 

    1) 최고 수준

    2) 뛰어난 수준

    3) 보통 수준

    4) 미흡한 수준

    5) 최악 수준

 '아웃라이어'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결국 '1) 최고 수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다. 물론 언론이나 책과 같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1)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 -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은 2)~4) 사이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과 '아웃라이어'에서 분석한 '최고'에 도달한 사람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만나기가 어렵고, 나 자신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99%이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특정 분야에서는 뛰어날 순 있겠지만 단 한 분야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능'의 요소를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고, '의식적인 연습'과 '특별한 기회', '역사·문화적인 유산'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인생에 그런 노력을 하기도 어렵고, 그런 기회와 유산이 찾아오기도 어렵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그것이 '보통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실상 2단계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내 옆에 있는 경쟁자들보다 좀 더 잘해서 좋은 직장에 가고, 월급 더 받고, 좋은 배우자 만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통사람'들에게 주어진 경쟁구도이다.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보다 좀 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그중 꽤나 강력한 방법이 '재능'이다. 물론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고 '뛰어난 수준'에 갈 순 없겠으나 조금의 재능이 있다면 동일한 노력, 혹은 더 작은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까진 갈 수 있다. 키 크고 운동신경이 조금만 좋다면, 농구선수(최고 수준)는 될 수 없어도 동네 농구에서 폼 좀 잡는 수준(뛰어난 수준)까지는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재능'의 차이를 뛰어넘을 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기에 '보통사람'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재능'이 성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지만 '1) 최고 수준' 안에서도 '세계 일류'급으로 경쟁을 이겨내려면 '재능'이 없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메시와 같은 수준의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누구나 메시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왜 사람들은 '노력'을 이야기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보통사람'의 눈에서 보았을 때 '재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어찌 보면 '노력'보다 더 강력한 요인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항상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할까?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중요하다'라고 쓰려고 했을까?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많은 메시시 중에 왜 '1만 시간의 노력이라면 너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만 회자될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이다. 개인 심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후천적 노력보다 선천적 재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허망함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사람의 뇌는 단순하기에 저 말을 '더 중요하다'라고 인식하지 않고 '전부다'라고 인식하곤 한다. 선천적 재능이 전부라면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허망하기 그지없고, 삶은 회의주의로 가득 차버릴 것이다. 간혹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주변에 존재하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메시지이다. 개인의 심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던지는 메시지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이 더 많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마련이다. 당장 나부터도 '이 영역은 네가 절대 최고가 될 수 없어'라는 냉혹한 말보다는 '너도 도전하면 할 수 있어'라는 달콤한 말을 듣고 싶지 않은가?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다 보면 방금 언급했듯이 '노력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인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 서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하지만 나 또한 인간이기에 노력을 강조하고 싶은 어떤 윤리적인 방어선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래야 내가 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설명이 될 것이며, 이 글을 세상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노력이 재능보다 더 중요한지는 솔직히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근거가 존재한다.

    1)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은 필수 조건이다.

    2)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보통사람'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등하고 - 어쩌면 유일한 - 방법이다. 


 얼마 전 '뭉쳐야찬다'라는 TV프로그램에서 은퇴한 배구선수 김요한 씨가 '자기는 큰 키가 오히려 컴플렉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큰 키가 그의 가장 큰 무기이자 재능인데 무슨 소리일까? 본인이 더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였음에도 키 덕분이라는 말로 그 노력이 폄하되고, 조금만 부진하면 '키가 저렇게 큰데 저거밖에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서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의 '재능'에 감탄하곤 하지만,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노력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선천적 재능과 우연한 기회들이 결합이 되었겠으나, 그들이 행한 노력의 크기가 절대로 '뛰어난 수준'이나 '보통 수준'의 사람들보다 작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은 필수 조건이다.


 앞에서 우리 대부분은 '보통사람'이기에 '재능의 중요성'이 더 크게 느껴지곤 한다고 서술하였지만, 반대로 우리 대부분이 '보통사람'이기에 '노력'은 중요하다. 운이 좋게도 누군가는 더 많은 선천적인 재능과 좋은 환경, 행운의 기회들을 만나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런 것들이 없는 편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 크기가 '성공'이라는 야망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미약하거나 제대로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노력은 결국 '시간'과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성공' 혹은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 중 전적으로 개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나라’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