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커서 뭐 되고 싶어? 였다. 국민학교 생활계획서엔 '미래의 되고 싶은 사람' 이란 칸에 '대통령, 발레리나, 직장인' 등 무언가 구체적인 직업을 쓰지 않으면 꿈이 없는 아이, 발달이 느린 아이라 판단되기도.
이런 보이지 않는 고정관념은 어른이 되어서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좋은 회사를 그만둔 후 격한 우울감을 겪었다. 당시 회사는 나를 대변하는 본캐였고 꿈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퇴사하고 나니 정체성이 없어진 것 마냥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
다급한 마음에 경쟁자 없는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강사로서 인정과 입지를 확인했고 그때서야 내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번듯하게 살고 있다는 안정감이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가 유행하며 '부캐'란 단어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본래 본인의 직업이 아닌 은둔의 혹은 서브 캐릭터와 같은 의미로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회사에선 복잡한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이지만 퇴근 후 게임 속에선 일탈을 즐기는 캐릭터라던가, 유튜브에선 여행 인플루언서가 되기도 한다.
이를 보고 내 엄마는 말했었다. '열심히 살아야지 왜 저렇게 쓸데없이 이것저것 파고 있다니?!' 맞는 말이다. 돈도 안 되는 모임에 나가 리더를 하고, 로또보다 어렵다는 성공한 유튜버가 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 살아보니 다른 관점이 보인다. 본캐에 집착하는 내가 매우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15년 이상 몇 만 명의 학습자를 만났고, 몇 만 시간을 강의했으며 얼마를 벌었다는 등의 도토리 키 쟤기 같은 기준이 이곳에선 유행 지난 개그보다 더 재미없는 소재다.
처음엔 좀 허탈했다. '나 그래도 좀 능력 있는 사람인데..' 란 생각에 여기저기 기웃했지만 이곳에서 난 그저 뽀글 머리를 한 쌍둥이 엄마일 뿐이었다. 어차피 쉬러 온 거 자연히 스며들어보잔 생각에 본캐가 아닌 부캐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제주살이에 관한 유튜브를 시작하고 소품샵에서 알바도 한다. 그러다 제주의 중요 기관에서 강의도 하고 끝나면 부족한 실력으로 글도 쓴다. 슬슬 부캐에 재미 들렸는지 책 읽기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두 번 북 토크를 한다. 그리고 이젠 장사를 해볼까 싶어 사부작 거 린다.
정신없이 할 일들에 치여 움직이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중에 내 아이들이 컸을 때 엄마 직업은 뭐예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말해주지?'와 같은 생각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그러곤 스스로 생각을 고쳐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