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어느 시간대의 내가 아니면 담지 못할 마음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부여잡아도 그러모아지지 않고 결국엔 흩어진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면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간데없이 사라진다. 남은 잔재가 있더라도 그 순간의 마음을 오롯이 재현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눈 감는 순간 바로 잠들어 버릴 정도로 피곤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잘 정리가 안 될 것 같은 상태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이런 말은 쓰지 못할 것 같아 새벽 네 시 사십오 분에 침대에 누워 브런치를 킨다.
입학 당시의 나는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 지 꽤 오래된 상태였다. 입시가 끝나고 나서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도 있었고 학기가 꼬여 너무 오래 쉬었던 탓도 있었을거다. 학생회나 학회엔 부담스러워서 못 들어가겠고, 새내기새로배움터 이틀 차를 안 가서 아는 동아리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자신 있었던 게 노래라서 별생각 없이 보컬 세션으로 밴드에 지원 문자를 넣었다.
그래, 진짜 별생각이 없었다. 대학교 밴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친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변덕이었다. 집 밖에 나가기는 싫었지만 다시 무대에 서 보고는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합격 문자를 받았고, 2년 동안 보컬로 활동하게 되었다.
첫 학기는 빛살같이 흘러갔다. 뭘 느끼고 말고 할 틈도 없이 여름 공연 시즌이 되었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당시 공연 곡 선정에 내 의견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반쯤 의무적으로 합주에 나갔다. 돌이켜 보면 상상했던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던 것 같다.주눅 들어 있던 만큼 선배들과 친해지기도 쉽지 않았고 동기들과도 어쩌다 말 한마디씩 섞는 정도였다. 굳이 필요가 없는 대화는 하지 않았다.분명 사람들이 나를 배척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여름 공연이 끝나고, 1학기 학점이 나오고, 또 인생 첫 종강을 맞게 되면서 나는 반년 동안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었나?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암만 생각해 봐도 긍정적인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조차 이 꼴인데 남들이 볼 때는 오죽했을까. 아마 그즈음을 기점으로 조금씩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의 시선에 대한 걱정을 거두니 불안함이 덜해졌다.
부담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은 2학기는 훨씬 수월했다. 선배들과도 동기들과도 한층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매 순간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의무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 공연을 잘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처음으로 목 관리라는 것도 해 보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제대로 노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연구했다.그렇게 첫 해가 끝나자 신입생들이 들어왔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선배가 되어 있었다.
합주에 재미가 붙었고 동기들, 후배들이랑도 친해졌다. 자주 느꼈던 거리감은 이제 그 빈도가 확연히 줄었고 소속감도 생겼다. 조금씩 스며든 즐거움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곧 일상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새내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게 아쉽고, 내색은 잘 안 하지만 후회가 많이 된다. 1년을 통째로 날린 기분이다.마음 같아선 몇 달이고 더 합주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은데 참 아쉽다. 이제야 공연에, 무대에, 노래에 마음을 담는 법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인데 말이다.
나는 역시 잘 포장된 작별인사보다는 조금 덜 예쁜 형태로라도 지속되는 관계가 더 좋다. 아직 사람이 충분히 단단해지질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철이 덜 들어서 떠나보내고 싶지가 않은 건지, 몇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래서 사실 며칠 전에 롤링페이퍼를 받고 나서는 잠시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너무 당연하게 끝을 말하는 것 같아서. 대부분의 말들이 그랬다. 더 친해지지 못해서 아쉽다. 이제야 좀 친해졌는데 이렇게 끝난다니 아쉽다. 2년 동안 즐거웠다. 하나같이 뭐랄까... 약간은 서글픈 인사말들이었다. 이어가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끊어질 관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그렇다.
빛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미숙한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한 명 한 명이 너무 멋진 사람들이었고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었다.여러 번 무대에 서면서 자존감이 늘었고, 나를 내려놓으면서라도 여럿을 기쁘게 하는 법을 배웠다. 배려를, 맞춰가는 법을, 어울리는 법을, 헌신하는 법을 배웠다.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돌아보더라도 웃을 수 있는 추억을 얻었다.
2년 내내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누군가의 활기를 닮고 싶었고, 누군가의 인내심을 닮고 싶었고, 누군가의 친절함을 닮고 싶었고, 누군가의 리더십을 닮고 싶었다. 나도 그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더 반짝이는사람이 되어 보고 싶었다.
내가 닮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의 나는 어떨지 모르겠다. 1학년 초반, 갓 무대에 올랐던 어리숙한 나와 많이 달라졌을까? 동경하던 그들의 빛남을 한 덩이라도 이어받았을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또 가능하더라도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글이 닿았으면 좋겠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나를 바꿔준 사람들에게, 지금의 내가 만들어짐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 말로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했던 감사를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