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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Jan 14. 2016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

인구 100만의, 독일의 네 번째 대도시인 쾰른에서 지난 새해 전야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현지 시간으로 12월 31일 밤 독일 쾰른 중앙역 광장 주변은 여느 대도시 광장처럼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평소와 다른 점은,  그중 천 명이 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아프리카 또는 아랍계 이민자 배경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밤새 여성들을 유린하고, 성폭행을 가하고, 강도와 절도 행각을 벌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공권력이 무시된 통제 불능의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한다. 쾰른 경찰 당국은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도리어 은폐하려 했고, 결국 경찰 국장은 해임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의 각종 언론을 비롯해 독일 내의 반(反) 난민 정서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독일 정부의 난민 정책에 대한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비단  독일뿐만 아니라, 난민 문제는 현재 유럽 대륙 전체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는지가 앞으로 유럽의 정치, 사회,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이 사건을 비롯해, 최근 난민 문제를 접할 때 데리다(Jacques Derrida)를 생각한다. 그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2004년에 사망한 현대 철학자다. 그는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을 했고, <차연>,<그라마톨로지> 등의 글들을 남겼다. 데리다의 글은 어렵다. 그의 글은 1독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적이 대부분이다. 사실 아직도 내가 이 글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텍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을 했던 그가 정작 자신의 텍스트는 해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한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환대에 대하여>도 그랬다. '이방인'의 문제가 대두된 지금, <환대에 대하여>를 다시 읽어보았다.


<환대에 대하여>는 타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방인'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고, 스스로가 물음이 된 존재다. 물음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내 앞에 있을 때, 그 존재 자체는 물음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끊임없는 물음이 되기 위해, 즉 불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방인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방인'에 대한 현상은 1980년대 이후 소위 '세계화'의 바람과 함께 신 자유주의가 세계 경제를 지배하면서,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초국가적 자본의 이동과 함께 부상했다. 또 세계 역사에서 대규모 이주를 비롯해 수 많은 노동자들의 이동이 있었다. 노동 이주자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이방인이 되곤 한다. 


전통적으로 이방인에 대한 현상학이 있다. 이방인이 물음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잠시 방문하거나 경유하는 사람이 아닌, 낯선 자로 와서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다. 그들이 정착에 성공하여 동화되고, 그 경계성이 사라지면 이방인을 벗어날 수 도 있다. 하지만 '동화'도, '이질성'도 사실상 상대적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언제든 다시 경계 밖으로 내몰릴 수 있다. 이러한 허용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닌 토박이 입장에서 정해진다. 결국 이방인이란 존재는 멂과 가까움을 동시에 지닌다.


이방인은 '우리'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우리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르게 보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이방인은 토박이 집단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동일성 철학의 구조 안에서 타자성은 우연적이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이질성이거나, 때로는 동일성을 파괴하는 오염적 요소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이방인의 문제는 이러한 동일성 철학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을 대할 때 문제는, '그들'을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전형적인 현상학적 태도이다. 토박이들은 이방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표상하면서 하나의 유형으로 만들고, 대부분 개인적 존재들의 차이는 무시된다. '그들'로 남은 이상 이방인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나아가 '우리'에게 이방인들은 항상 비도덕적이거나, 불편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게 되는 가능성을 가진다. 이방인은 토박이들에게 위험한 경계인으로 다가오게 된다. 어떤 위험한 사건에 있어 그들 전체가 경계되고, 의심받고, 질타받게 된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로 공동체에 있어서 이방인은 항상 긴장과 자극을 주는 존재가 된다. 때문에 어떤 권력 이동이나 사회의 맥락적 변화가 발생하면, 이방인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방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항상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게 된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의 성찰은 우리가 이방인에게 어떤 권리를 주고 있으며,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그리스의 텍스트를 보면서 그 속에 나타난 이방인을 속박한 '환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대의 권리는 환대를 가능하게 하지만 반대로 한계 짓고, 금지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인-손님' 문제로 환원된 이방인의 문제는 '주인'입장에서 해석되어 이방인을 더욱 타자화한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려던 데리다는 '환대'를 놓지 않고는 이방인을 이방인이지 않게 대하지 못함을 깨닫는다.


데리다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의 이방인의 문제를 출발로 하여 환대를 말한다. 그리스의 예에서 이방인의 권리를  찾아보면,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른 적대를 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때, 이방인은 자신의 권리를 요청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권리를 요청할 수 있는 전제는 '규약'이다. 공동체의 규약을 흐리지 않는다는 약속 하에, 그런 합의를 이끌어 가는 언어를 갖는 이방인들만 권리를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어떤 토박이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나'도 어딘가에선 이방인이고, '그들' 또한 어딘가에선 이방인이 아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권리는 상호 보호의 차원이기도 하다. 결국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이 되는 치환 구조에서 서로는 서로를 인질로 만든다. 데리다는 책에서  당시 프랑스 국적자와 프랑스 시민 사이의 간극 문제를 이야기한다. 




데리다는 두 가지 유형의 환대를  이야기한다. 먼저 환대에  관련하여 가장 전통적이고 범례적인 논의를 제공한 사람은 칸트이다. 칸트는  적대시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적극적 의미의 환대가 아니다. 여기서 환대의 권리가 타인에게 있다는 것,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전제는 인간의 자연적 형태를  이야기한다. 타자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칸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제 위에서, 오히려 합의 가능한 합법적 계약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근대법이다. 무법적 상태를 벗어나서 개인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법적인 합의에 귀속시킬 때 평화가 이루어지며,  이때 이방인이 우리 공동체의 규약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확인할 수 있다면 그들을 내쫓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칸트의 논의에서 이방인의 권리는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다. 주권자의 허용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권자는 그 권리를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선 수용해야 한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 기도 하고,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트의 조건적 환대이다. 즉, 관용이고, 관용을 요청할 권리이다. 


데리다가 보는 조건적 환대, 즉 관용은 법에 의거한 환대이다. 하지만 관용은 한계를 지닌다. 관용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을 수용하는 것, 차이를 용인하는 것, 또 무관심의 관용, 열린 태도로의 관용이 있다. 이외에도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금욕주의적 관용, 차이나 다름에 열광하는 미학적 태도로의 관용도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관용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왔고, 관용의 철회라는 것이 관용의 한계를 보여준다. 관용은 주권자의 허용의 태도이다. 때문에 제도화된 관용도 철회 가능성을 피하지 못한다. 또 제도화된 관용은 받는 낙인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관용을 받는 사람이 끊임없이 그들이 관용의 대상으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처럼 관용은 내재적 불합리성이자 위계를 가지고, 언제나 철회 가능하다는 불가피한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조건적 환대를 지나, 무조건적인 환대가 있다.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진정한 '환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의'이다. 물론 이 형태는 절대적 의미의 환대이기 때문에 난점이 많다. 언제나 적대적 타자는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도 있다. 그럴 때 주인으로서의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방인 혐오를 가질 수 도 있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경찰권력 같은 것들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질 수 있다(이메일 감시나 전화 감청 같은 것들). 즉,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가 환대로, 관용이 환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 실현 불가능한 난점과 자기모순에도 불구하고, 조건적 환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환대가 상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의미에서,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다는 이념적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의 윤리'가 전제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서양 형이상학, 윤리학, 혹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주권은 늘 주체에게 있어왔다. 관용 또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허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나의 관점에서, 나의 규약들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에게 그것들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이때, 관계를 맺기 위해 타자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서 내가 알 수 있는 사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타자는 나에 의해 해석되고, 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에게 비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나'이다. 타자의 고유성은 고려되지 않고 내가 비춘 타자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오히려 타자의 관점에서,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나의 순종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나의 자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이야기에는 많은 비판이 뒤따른다. 현실성이 부족하며 굉장히 피학적인 주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떠나, 그의 '타자의 윤리'는 이방인의 문제를 생각할 때 도움이 된다. 


먼저, 타자의 윤리가 요청되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체 중심의 서양 형 의상학에서는 늘 타자에게 주어지는 관용을 주체가 철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의성을 타자의 입장에서는 폭력이자 위협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체가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계에 놓여 있다고 할 때 '주체 유아론적인 고독의 상태'에 있다. 하지만 어떤 주체도 그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초월의 계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의 핵심이다. 단지 윤리적으로 요청되는 피학적 방식이 아닌, 타자라는 것은 주체가 가지는 유아론적 고독과 자기 합리화를  끊임없이 넘어가게 하는 존재이다. 전체성에서 초월성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타자인 것이다. 


무조건적인 환대의 이념은 우리가 공존을 위한 관용이라는 태도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하여 요청되어야 하는 것이고, '법'적인 정의로 봤을 때 관용은 법적인 것이다. 적대는 드러나지 않아도 감추어져 있을 수 있고, 없다가 생겨날 수도 있는 과정을 가진다. 관용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권력관계를 감추면서 조건적 환대가 수행했던 것들을 배반할 수 있다. 즉, 조건부 환대는 자기를 보존해야 했던 원칙을 스스로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요청으로 머물지라도, 유지되어야 한다. 관용이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환대 행위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 - 자크 데리다


무조건적인 환대를 상정하고도, 사실 환대는 환상이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무엇이 올 수 있을까? 이 책의 5강 제목은 '환대의 발길(환대는 없다)'이다. 환대는 침범이나 탈선, 발길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환대는 분명히 있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결국 '나'도 이방인 이므로 회귀하는 것이고, 또 환대라는 것이 단어 그대로의 뜻을 가지지 않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환대는 어떤 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들에서 맴도는 딜레마이다.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이 본래대로의 법이기 위해 법들을 필요로 하듯, 우리 자신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곤 한다. 이것이 타락 가능성이다. 서로가 서로로 치환되는 인질극은 끊임없이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데리다는 이에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의 철학적 주 작업인 '해체'가 이루어졌다고 봤을 때 '재구성'은 어느 정도 독자의 몫으로 남겨 있는  듯하다.


'우리'와 '그들', '토착민'과 '이방인', '주인'과 '손님'은 영원히 상대적이다. 우리가  끊임없는 치환 구조를  망각한 채 환대를 버리고 적대만 남기지 않았나  물음을 던져 본다. 이방인의 문제는 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이방인의 문제는 항상 있어왔고, 점점 심화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탈북자 등 '우리'가 아닌 '그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을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리고 있지 않나? 물론 어느 특정한 집단의 인간들이 비슷한 성향과 모습을 가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학습과 사회화, 혹은 유전적인 이유로도 충분이 납득할 만 하다. 하지만 심지어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도 '나'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개별 주체의 고유성은 어떤 의미에서든 절대적으로  집단화될 수 없고, 그것이 개별 주체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 '나'와 '너'의 관계는 '우리'와 '그들'로 멀어진다. 


환대의 문제는 결국 물음에 관한 문제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에게, '너'와 '그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보자.  






*참고 자료 :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동문선 현대신서 / '서양 현대 철학' 강의 노트 

*내용에 있어 상당 부분 학교에서 수강한 '서양 현대 철학' 강의 노트를 참고했고,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 텍스트의 인용도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소개하고, 인용하고, 해석하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cover image : Photo by Nathaniel Tette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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