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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Jan 17. 2016

죽음, 삶을 만들고 삶을 끝내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실존 철학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감독 : 토마스 얀, 1997作


토마스 얀 감독의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영화를 최근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당시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보아도 여전히 여운이 길다. 


이 영화는 '죽음', 즉 유한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너무나도 다른, 생면부지였던 마틴과 루디 두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들은 죽기 전 바다를 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않았으면 저지르지 못했을 대담한 행동들을 해 나간다. 차를 훔치고, 강도짓을 하고, 경찰을 사칭하고, 스트립 클럽을 가고, 우연히 얻은 큰 돈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닌다. 도대체 '죽음'이 뭐길래 이토록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서 '죽음'과 '시간'에 실존 철학적인 접근을 해 보고자 한다. 시간의 문제는 항상 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특히 시간의 문제는 실존 철학에서 중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죽음'의 문제가 실존철학적으로  다루어질 때, 미래의 사건이 어떻게 결정적인 양식으로 이미 현재의 이 순간에 근원적인 힘으로써 작용할 수 있는가가 비로소 명료해진다. 여기서 '미래'는 오직 현실적인 현재로부터 엄밀히 구별되는, '아직 현실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미래는 '아직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어디까지나 '작용하는 무엇'으로 현재 속에 들어 있다. 이처럼 실존철학은 시간문제에 대한 새롭고 유효한 통로를 열었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시간이 인간에게 체험 상으로 주어져 있는 형식들이 문제가 된다. 같은 시간이라도 지루한 수업시간과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서 흘러가는 시간은 체험적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제로 체험되는 ‘주체적인 시간’은 시계에 의한, 즉 물리학적 ‘객관적인 시간’으로부터 구별된다. 이러한 사실을 철학적인 무게로 접근하지 않고, 또 시간 체험 속에서 인간의 시간 감각이 불충분하다는 것의 표현에 불과한 시계 시간과의 어떠한 편차만을 본다면, 객관적인 시간만을 일면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실존철학은 체험된 시간에 대한 물음이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으로 통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선 어떠한 근원적인 전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70p)












일반적인 시간성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미래: 근원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태도 결정의 한 방향이다. 미래는 희망과 걱정 속에서, 계획과 구상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현재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

 

-과거 : 이미  형성되었으며 규정된 것으로 과거의 것으로부터 현재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며, 좋거나 나쁘거나 지배적인 근거로서 또는 구속적인 제약으로서 현재를 규정하는 것. 


-현재: 그 자신은 넓이를 가지지 않는 과도 점(過渡點)이 아니라 직관적인 바로 이 순간에 모든 것을 통합하고 있는 유대(紐帶).


"세 가지 시간이 있다. 즉 현재에 관한 현재, 과거에 관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현재. 시간은 우리의 정신에 있어서는 이 세 가지로서 존재하지만, 정신 이외에서는 나는 시간을 지각하지 못한다. 현재에 있는 것은 과거에 관해서는 기억, 현재에 관해서는 직관, 그리고 미래에 관해서는 기대일 뿐이다."    -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고백록>  (<실존철학 입문>, 172-173p)



여기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시간관을  떠올려 본다. 그는 과거-현재-미래를 일직선 상의 독립된 순간으로 보던 고전적 시간관을 버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성의 시간관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을 강조하는 소실점으로의 '현재의 시간성'을 거부한다.  존재(Being)는 곧 과거 기억들의 총체로, 사라지지 않고 쌓여 존재에 작용하는 것이다. 존재(Being)는 외부  물질세계와 접촉하면서 과거 전체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이 '현재'의 순간에 ‘생성(becoming)’하는 창조의 힘이 발생한다. 이러한 ‘becoming’은 끊임없이 ‘Being’으로 유입되고, 미래는 곧 변화와 생성으로 조형된다. 즉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접점에서 작용을 이루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시간관은 현재의 소실보다 '생성'을 강조하고, 과거를 부재가 아닌 ‘존재’로 전환시키면서 존재와 시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베르그송의 시간관을 나타낸 도식.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시간성'이란 객관적인 시간의 경과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시간성은 실존하는 존재(실재. 인간을 의미)가 어떤 외적인 의미에서 시간 ‘안’에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장 근원적인 성격이 시간에 규정되어 있는 내면적인 구조양식을 의미한다. 이 내적인 시간성에서 미래, 과거 및 현재는 동일적인 연속 부분들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적인 태도가 뻗어나가는 세 가지 방향이며, 한데 뭉쳐서 현재의 이 순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방향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의 세 ‘탈자태(脫自態)’ 즉 세 ‘차원(次元)’이라는 말을 쓴다) (<실존철학 입문>, 173-174p)


인간은 언제나 어떤 일정한 문제 상황 속에 있다고 하면, 미래는 이 곤경의 극복을 위한 방향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래로의 방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과제에 직면하여 주어지는 자기 태도 결정의 여러 가능성으로 향하게 한다. 인간은 이 가능성으로 ‘선행하며(vorlaufen)’(하이데거), 이것으로부터 인간은 현재를 형성한다.


 미래는 여기에서 아직 현실로 되어 있지 않는, 앞으로 비로소 현실로 될 어떤 지금을 의미하지 않고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통하여 자아에 도달하는 장래를 의미한다. 선행(先行)이 현존재로 하여금 참으로 미래적이게 한다.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이러한 시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간성의 해석에 있어서 실존철학 일반의 특색을 나타내는 결정적 긴장인 '인간의 유한성'이 있다. 실존 철학에서 시간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서, 엄연한 실존 행위의 ‘본래적인 시간’과 세계에 함몰된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엄연한 실존 행위로써의 '본래적인 시간'은 완전한 실존적인 순간 속에서 그의 모든 힘을 가다듬어, 여기서부터 그 힘을 결연히 미래를 향하게 하여 미래와 과거 사이에 있는 근원적인 연결이 진실로 긴밀해지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세계에 함몰된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시간'은 주어지는 과제로부터 수동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사건에 그저 자신을 떠맡기는 시간이 된다. (<실존철학 입문>, 174-176p)


평소 정말 좋아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이 이러한 내적인 시간의 구조적 이질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To live is the rarest thing in the world. Most people just exist. ”  - Oscar Wilde












다시 영화 이야기다. 앞에서 '도대체 '죽음'이 뭐길래 이토록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나'라는 물음을 던졌다. 인간의 삶은 죽음의 압력 밑에서 비로소 미래로 향해 있는 계획이 유일한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실존적 시간성의 문제는 죽음을 눈앞에 직시할 때 비로소 그의 가장 극단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시간 통합의 최고 형식이 성립하고, 이 형식을 하이데거는 ‘결단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본래 시간성의 근본 형식이며, 이 속에서 순간 자신이 절대적인 최후의 가치를 얻는다. 이 ‘결단성’ 속에서 인간적인 삶의 어떤 상태, 즉 그 속에서 어떤 절대적이며 내적인 가치가 이 유일한 순간을 그의 시간적인 연장에 의존케 하지 않는 상태로 달성된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이 절박한 순간의 엄숙한 성격이다. ‘순간’의 비연속적인 성격에 의해 오직 실존적인 순간 자체만이 남으며 이 속에 내적인 시간성의 모든 구조가 내포되어 있다. 어떤 유대가 실존적 순간을 과거와 미래의 순간에 이어주는 것은 아니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진전도 없다. 결국 실존이 각 순간에 언제나 새롭게 획득되어야 하듯이 삶의 과정 속에서 개개의 실존적인 계기들의 연결이 가장 고귀한 것으로 남게 된다. (<실존철학 입문>, 176-179p)


오직 실존적인 순간 자체인 가장 엄숙한 순간, 죽음의 목전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 순간을 우리보다 먼저 경험한 이들의 유언을 찾아보았다.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  - 고대 중국 사상가, 공자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것이 끝이로구나. 상관없다. 농부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나?" - 러시아의 문학가, 레프 톨스토이

"내가 완전히 죽는 것은 아니다" -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오, 신이시여!" -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자 이제 출발해야지." -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물론 '정말로' 이렇게 말했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이 말들이 주는 울림이 있다면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출발하자"는 데카르트의 말이 멋지다.)



세 갈래로 갈린 모든 시간적인 구조는 실존적인 순간 자신 속에서 통일된다. ‘결단성’은 인간의 본래적인 현존재의 어떤 기구, 즉  그곳에서 행위가 그의 의미를 어떤 도달될 목적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불가분적으로 그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독특한 기구를 의미한다. 이 속에서 현존재는 어떤 단순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그의 전력을 어떤 통일적이며 주도적인 정점에서 집중하는 인간적인 현존재로의 어떤 최후적 긴장을 가진다. 평소의 여러 가능성 속에 분산되어 있던 현존재를 어떤 명확한 실천 속에서, 즉 최후의 의미를 달성되는(혹은 달성되지 않는) 결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무조건적인 헌신 자신으로부터 얻는 실천 속에서  종합한다. 

(<실존철학 입문>, 177p)


사실, 우리의 삶은 끝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무언가를 그토록 치열하게 원하고, 노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삶이 영원하다면, 어떻게든 언젠가 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수 있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죽음은 삶을 끝내지만, 다른 의미로 삶을 만들어 간다. 


영화에서 마틴과 루디는 갑자기 눈 앞으로 다가온 죽음 앞에서 온전한 자신들의 시간을 보낸다. 평소 소원으로만 간직한 '핑크색 캐딜락을 어머니에게 선물하기'나, '두 여자와 자는' 소원을 이루어 나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들이 백만 마르크가 든 차량을 훔치는 행운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충실하게,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닌, 단지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천국에서는 바다를 보지 않으면 대화할 거리가 없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믿음과 함께. 바다는 그들에게 지금 이 지구에서, 죽음 이후의 세상과 이어지는 마지막 연결고리이자 '영원'을 의미했던  것이다.


마침내 바다에 간 마틴과 루디


영화가 끝나고 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비록 마틴과 루디처럼 불치병을 선고받지 않았더라도, 백만 마르크를 우연히 가지게 되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실존'하는 현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살고 있지 않다면, '본래적인 시간'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내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과연 그것이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인가?"











이상으로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보며 떠오른 실존 철학의 '극히' 일부분을 다뤄보았다. 실존 철학은 깊고 넓고 어렵다. 어설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남들 앞에서 실존 철학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이고, 그 내용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인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학교에서 수강한 '실존 철학' 강의는  재미있고 힘든 수업이었다) 배울 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듯 싶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실존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든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OST인 'Knockin' on Heaven's Door'의 가사와 함께 글을 마친다. 


Knockin' on Heaven's Door     


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I can't use it anymore.

It's gettin' dark, too dark to see.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x4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I can't shoot them anymore.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x7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참고 : <실존철학 입문>,  O.F. 볼노우 지음. 최동희 옮김. 간디서원 / '실존철학' 강의 노트 

*본문의 페이지 인용 표기는 위의 책 <실존철학 입문>입니다. 실존 철학적 내용에서 상당 부분 이 책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소개하고, 인용하고, 해석하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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