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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Jan 25. 2016

가장 잔혹한 순간 , 가장 따뜻한 것

영화 <타인의 삶>과 소설 <처절한 정원>

*책, 영화 모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래는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시다.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SUCCEED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그가 정의한 '성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정의와 다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끌며,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특히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때로 이러한 삶엔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어떻게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어떤 상황에서 타인을 향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진정한 '성공한 삶'인가?













여기 두 개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타인의 삶>과 소설 <처절한 정원> 가장 잔혹한 순간 피어난 가장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내고 있다. 


Das Leben der Anderen, 2006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은 이미 두 번이나 본 영화이지만, 최근 <처절한 정원>을 읽고 나서 떠올라 다시금  찾아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감동과 여운이 상당했는데 역시나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여전하다. 때마다 그 깊이가 깊어지는 기분이다. 방향도 다르다. 어쩔 땐 드라이만에게, 어쩔 땐 크리스티나에게, 어쩔 땐 주인공인 비즐러에게 집중하며 보게 된다. 높은 작품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유명세를 탔는데,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중 하나이다.


 <타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자막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던 당시의 동독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1984년 동베를린. 개방정책(Glansnost)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동독(GDR)의 시민들은 비밀경찰(The East German Secret Police)인 슈타지(Stasi)로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10만의 비밀경찰과 20만의 밀고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To know everything)"였다.


간단히  줄거리로, 주인공인 비즐러는 나라의 충실한 냉혈 비밀경찰이다. 그런 그가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중대 임무를 맡는다. 그들의 집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고, 모든 행위는 24시간 감시당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다. 비즐러는 오히려 그들의 삶으로 인해 감동받고 사랑을 느끼며, 그가 살던 이전의 삶과는 달리 인간적인 삶을 원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삶과 함께하며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과 인간애를 알아 간다. 그러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동료 예술가들과 정부에 반하는 행동을 모의하는 것을 눈치채지만 보고하지 않고, 거짓 보고서를 작성하여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돕는다. 결국 슈타지는 그들의 행위를 눈치채고, 크리스티나를 협박 해 정보를 알아내고 그들의 집을 수색하지만 결정적인 비즐러의 도움 덕에 위험을 피한다. 작전의 실패로 비즐러는 강등당하고, 남은 생애를 편지를 분류하는 하급 관리로 살아가게 된다. 이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드라이만은 자신이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당시에 작성된 보고서를 확인한다. 그는 비즐러(HGW XX/7)가 희생으로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중반, 드라이만이 존경하고 가깝게 지내던 동료 연출가 예르스카가 자살한다. 슬픔에 잠긴 드라이만은 그가 생일 선물로 준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Sonate von Guten Menschen) 악보를 연주한다. 헤드폰 너머 그의 연주를 듣던 비즐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드라이만은 연주를 끝내고 크리스티나에게 말한다.

레닌이 '열정적'에 대해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봤어.
"난 그것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혁명의 끝을 이끌어내진 못했을 것이다."

이 음악을 들었던 누군가라면... 진정으로 들었던 누군가라면...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머물 수 있을까?




영화는 후에 비즐러가 우연히 서점에서 드라이만의 새 책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구입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책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글을 발견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글귀가 나오는 장면에선 감동의 소름이 돋았다. "선물 포장 해드릴까요?"라는 점원에 말에 비즐러는 "아니오. 이 책은 절 위한 겁니다."라고 대답하며 희미하게 웃는다.글을 발견했을 때 비즐러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즐러는 그의 삶을 구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타인의 삶'은 비즐러를 변화시켰다. 그들의 진정성 있는, 인간애적 삶은 얼음같이 차갑던 비즐러를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인생에서 다른 욕망을 가지게 만들었다. 비즐러가 거짓 보고서를 만들고, 타자기를 숨겨주면서 드라이만을 구했지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티나는 비즐러가 '인간적으로' 더 행복해지게, 그의 영혼을 따뜻해지게 했다. 이들은 서로 '타인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이다. 


시인, 소설가, 화가였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시 "행복해진다는 것"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자유와 사랑의 영혼을 가진 드라이만과 크리스티나는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그 삶은 타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사랑하는 능력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그 '타인'은 그들의 삶을  구원하여 보답했다. 오로지 이념 아래 잔혹한 행위가 이뤄지던 당시 상황에서 개인을 움직인 것은 결국  와 타인을 향한 인간애, 즉 사랑이다.



영화 중반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집에서 가져온 브레히트(Brecht, 동독의 극작가)의 책을 읽는 장면이 있다. 

"9월 파란색 달이 뜬 바로 그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고요히...
난 그곳에서 창백한 내 사랑,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좋은 꿈에서처럼
우리들 위에는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한 무리의 구름을 보았을 때...
그 구름 무리는 매우 희었고, 무척이나 높이 있었다.
그리고 구름에서 눈을 떼었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타인의 삶'에 의해 바뀌어 가던 비즐러가 아닌, 예전의 비즐러는 이런 내용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의 영혼을 뒤흔든 것은 작전 성공에 뒤따를 '직급'이 아닌 '좋은 꿈같은 아름다운 여름 하늘과 한 무리의 구름'이었다.














소설 <처절한 정원>은  2001년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깽(Michel Quint)이 발표한 작품으로,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로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가 독일 점령하게 있던 1942년에서 1943년으로 가는 겨울에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극한의 상황 속 인간의 양심과 희생, 사랑과 운명을 다뤄 오랜 시간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다.


Effroyables Jardins, 2001


소설은 1999년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전범자 모리스 파퐁의 재판으로 시작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 역사학자에 의해 나치 하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 당시 모리스 파퐁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가 밝혀지면서 그가 재판에 서게 된다. 그런데 재판에 어릿광대가 등장한다. 그리고 한 소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년은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다니는 아버지가 부끄럽고 싫었으며, 이해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나'의 아버지는 항상 어릿광대가 필요한 곳이면 한달음으로 달려갔고,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유쾌한 사람 정도로 여겼으나, 그의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눈길과 겸손함은 '나'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숨겨진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나'는 가스똥 삼촌을 통해 아버지와 삼촌이 숨겨왔던,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는다.


독일군에 의해 프랑스가 점령당했던 당시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며 변압기 폭파 사건을 수행한다. 얼마 후 그들은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는데, 범인이 아니라 인질로 잡히게 된다. 당시 패탱의 비시 정부의 법령에 따르면 레지스탕스 요원이 테러를 했을 경우, 사흘 안에 잡히지 않으면 범인 대신 인질이 처형될 수 있었다. 인질로 잡힌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무고하게 잡혀온 같은 축구 클럽의 앙리와 에밀은 구덩이에서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시간을 보내던  중 구덩이를 지키러 온 한 독일의 보초병에 의해 그들은 웃음과 희망을 되찾는데, 나중에 그 독일병은 전쟁 전의 자기 직업이 어릿광대였다고 밝힌다. 얼마 지나 자수한 범인이 잡혔다고 전해지고, 그들을 풀려나게 된다. 진짜 폭파를 일으킨 것은 그들인데, 누가 자수한 것일까?


변압기 폭파 당시 변압기를 관리하던 전기공이 있었다. 전기공 복장을 하고 역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와 삼촌을 보고 도둑이라 생각한 그는 나중에 변압기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렸다. 곧 폭발이 일어났고, 그 전기공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의 아내는 테러범이 잡히지 않는다면  인질들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남편을 범인으로 고발한다. 그들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뜻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독일군들이 찾아왔을 때, 남편은 아내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고, 죗값을 달게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총살된다. 그들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다.



가상의 소설이지만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인간의 생명이 끝없이 숭고해짐을 느낀다. 아버지와 삼촌은 자신들이 죽인 사람으로 인해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그들에게 받은 용기와 감사를 잊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 위해 아버지는 어릿광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삼촌은 그 부인과 결혼했다. 자신들이 받은 놀라운 인간애와 희생으로 그들의 삶은 변화했다. '나'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소설 도입부의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간 어릿광대가 '나'인 것이 밝혀지며 소설은 끝난다.  

내일이 되면 저는 눈에 검은 칠을 하고, 양볼에는 빨간 동그라미를 그릴 것입니다.
내일 저는 밤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그 숲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둔 그들을 대신하여 존재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도 부활시키고 싶어 했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 내일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그들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려고 합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버지!
                                                                                                                                          (110-110p)



 '나'는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을 대신해, 인간의 존엄성을 배신한 모리스 파퐁의 행동에 정당한 대가가 치러지는 것을 보고자 재판에 참석하고자 한다. '나'의 삶도 변한 것이다.


주로 추리 소설을 썼던 작가 미셸 깽은 2000년 한 페스티벌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17p)


"나의 일은 현실을 바꾸고,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균열을 창조하고 일상에 주름을 만들고, 걸레질하고, 때로는 일상을 찢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일상에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이죠. ... (중략)... 인물들과 독자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처절한 정원>은 재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어릿광대로 시작해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어지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넘치는 사랑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갚아 나갈까?"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말했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영혼에서 일상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희생을 통해, 혹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 나의 삶이 변하고, 더 행복해지고,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셸 깽과 피카소의 말을 떠올리며, 일상적인 관성을 넘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자.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앞의 에머슨의 시처럼, 과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혹은 미디어나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과연 모두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지는 스스로의 문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모두가 다른 지문을 가졌듯 모두는 다른 '성공'을 가진다. 나도 계속해서 나만의 성공에 대한 정의를 찾는 중이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고자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겨야 할 타인에 대한 사랑, 인간애다. 자기 소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죽어가는 어마어마한 자산가와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으로 손님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리사 중 누가 더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에 대한 글(나와 너, 우리와 그들)서 보았듯이 '타자'는 주체가 유아론적 고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주체는 타자로 인해 자극받고, 변화한다. 변화는 더 나은 가능성을 야기한다. 현상학적으로 타인은 결국 나에게 내가 그린 대로 나타나고, 곧 '나'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결국 또 나를 향한 사랑이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타인이라는 존재에 감사하며, 그 능력을 맘껏 사용하며 내 영혼의 먼지를 닦아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소설가, 철학자, 극작가, 혹은 "지성의 전방위에서 활동한 자"(by Jacques Audiberti)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당시 실존주의가 유아론(Solipsisme)적이라는 비판에 맞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한다. 그는 이 강연을 통해  실존주의가 사회와 역사 발전에 적극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근원적인 사유방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essence=내용. 어떤 존재자들에게 공유되는, 보편적인 것으로 어떤 존재자를 그 존재자이게 하는 것) 그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고, 때문에 인간은 자기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미 규정된 절대적인 인간 본질은 없으며, '본질'에 앞선 '실존'은 열려 있다. 인간에겐 비어있는 자유의 영역만이 존재한다. "인간은 구성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며 "미래를 향해 나를 던지는"열려 있는 존재로 보았다. 문제는 이미 그 후가 '파괴'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에 의해 지시된, 규정된 인간에 대한 이전의 휴머니즘과 달리 그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에선 파괴된 본질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실존만이 남게 된다. 실존은 자유를 부여받았고, 그 선택은 엄청난 무게를 가진다.(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를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했다) 인간은  자기기만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결단'해야 하며 책임은 철저하게 자신이 감당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 주체는 위험하고 고독하다. 


이때, 사르트르가 내놓은 답은 'Engagement'(앙가쥬망), 즉 '참여'였다. 나의 선택에 대한 무게를 인류 전체를 향해 둔 것이다. 나의 행위를 곧 사회적 행위로 만들고, 시대와 역사의 상황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사르트르는 '나'의 세계의 주인이자 엄청난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 심지어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강한 '주체'의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다소 비약적인 면도 느껴진다. 이러한 그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의 안티테제로 1960년대 구조주의와 프로이트, 니체, 맑스가 따라오게 된다. 


사르트르 철학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또 그 맥락과 조금 다르지만 여기서 '참여'의 모티브를 가져오고 싶어 언급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자유가 있는 존재고,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 이 '책임'에서 그는 인류 전체를 생각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나아가 철학적으로까지 인간 주체는 고독하다. 실존적인  문제뿐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우리는 항상 막중한 책임을 마주하게 된다. <처절한 정원>에서 죽어가는 전기공과 아내는 독일군에 겁먹은 프랑스 사람들과, 구덩이 속에서 벌벌 떨고 있을 인질들을 생각하며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으로 불운한 시대 속 빛이 될 책임을 지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극단적 예를 뒤로하고, 나는 사르트르의 인류를 향한 '앙가주망'이 우리의 고독을 덜어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고 본다. 어쩔 수 없는 무게라면, 모두를 위하고자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놓지 않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류'의 시대와 역사에 참여 해 간다면 더 단단한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故이태석 신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울지 마 톤즈'가 대한민국을 울렸다. 포스터에 쓰인 영화 설명이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꼭 아프리카로 가서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 아니어도, 내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어도, 엄청난 선행이 아어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나 일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인간애를 느끼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런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참고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엮음. 열림원 / <처절한 정원>, 미셸 깽, 이인숙 옮김.  문학세계사. / '서양 현대철학' 강의노트 / <현대 프랑스 철학사>, 한국 프랑스 철학회 엮음. 창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자료를 소개하고, 해석하고, 정리하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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