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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Jan 26. 2016

사회를 바꾸는 가능성, '공감' 共感

맹자의 <孟子>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지난해 11월 13일 밤(현지시각), 파리에서 일어난 총기 테러는 전 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약 120명이 사망하고 2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1) 전 세계 사람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프랑스를 애도했고, 테러를 일으킨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표현했다. 파리의 현장에 직접 꽃을 놓을 수 없는 전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프로필 사진에 프랑스 국기를 씌우고, 트위터로 진행상황을 퍼트리는 것으로 애도와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파리 테러 전날 발생한 베이루트 테러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보내지 않았고, 언론 역시 아랍 세계의 비극은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불어 시리아, 혹은 그 외 ‘비교적 주변부의’ 일에는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서방 세계의 주축’인 프랑스의 일에는 소셜 미디어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등의 유난을 떤다고 공격했다. 사실 구글에 의하면 베이루트 테러가 일어난 12일 5,190개의 기사가 올라왔으며, 18일에는 15,000개의 기사 중 400개 이상의 기사가 두 테러를 '동시에' 다루었다. (보통 우리는 테러가 흔히 일어났던 것 같은, 혹은 나와 비교적 상관없는 지역의 기사는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 구글에 따르면 파리 테러 이후 '베이루트' 검색 트래픽은 확연히 줄었다. 파리 테러 이후 '베이루트' 검색은 '파리' 검색의 1%도 미치지 못했다.2)



“The global empathy gap between Paris and Beirut”, 2015-11-19




그렇다면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등’의 행동으로 프랑스에 애도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평소 시리아나 아프리카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인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공감共感’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EQ’ ‘공감 사회’ 등 ‘공감’이 꽤나 화제였다. 지나치게 원자화된, 서로 무관심한 사회에 위기감을 느낀 구성원들이 ‘공감의 부재’를 문제의 원인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듯하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자아를 가진 객체에게 타인을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이 ‘공감’ 능력의 존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공감’ 능력은 한계가 있다. 다시 구글의 자료를 보면, 국가 단위로 검색 트래픽을  분석했을 때 문화적 근접성 혹은 지리적 근접성이 각각의 테러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레바논과 근접 해 있는 터키와 같은 나라가 “베이루트”에 비해 “파리”를 검색한 비율은 프랑스와 면한 룩셈부르크에서의 비율과 상당히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레바논에서 약 16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터키의 경우 레바논 대비 0.6% 정도가 베이루트를, 프랑스 대비 약 5% 정도가 파리를 검색하여 4.4%의 차이를 보였다. 반면 룩셈부르크에서는 레바논 대비 1.8%만이 베이루트를 검색했으나 프랑스 대비 64%가 파리를 검색하여, 62%의 차이를 보였다)3)



“The global empathy gap between Paris and Beirut”, 2015-11-19




서양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인간의 정신은 가능한 기쁨을 향한 표상을 하고,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자연적으로 선호한다고 보았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공감 능력은 ‘유사성’, 즉 얼마만큼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크게 달려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 일어난 사고와 먼 나라의 누군가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느끼는 ‘공감’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베이루트보다 파리에서 일어난 일에 더 동요한 이유는, (나를 포함한) 더 많은 이들이  그 장소, 그곳의 사람들에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방문하고, 여행하고, 영화와 소설 등을 통해 (보통 아름다운) 파리를 접한다. 예를 들어 나는 파리를 두 번이나 방문했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금 파리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며, 파리에서 살았던 친구들이 있다. 때문에 파리에서의 테러 소식을 들었을 때 익숙한 거리의 이름들, 지내던 동네, 그곳의 친구들이 떠올라 충격이 컸다. 비교적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이루트의 테러 장면이 마치 영화에서, 국제 뉴스에서 보는 먼 이야기 같다면 파리에서의 테러는 내가 갔던 음식점, 내가 지나갔던 거리, 내가 방문한 공연장에서 일어나 더욱 '실제 상황'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난다면?'하고 묻게 된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책이 있다. 미국 최고의 수필가, 소설가, 예술평론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사회운동가였던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 그것이다. 이 책은 전작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1977)와 연결되는 저서로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 의미, 그리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러한 주제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전쟁'을  이야기하고자 했다.4) 이 책에는 당시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 나아가 세계의 현실에 대한 그녀의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디서나 폭력, 전쟁,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접한다. TV 뉴스에서, 신문에서, 혹은 영화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CNN은 그들의 전쟁 생중계가 전쟁을 시각적 이벤트처럼 다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쟁이 너무나 쉽게 사람들의 일상에 전달되어서, 이러한 이미지가 점점 할리우드 영화나 비디오 게임의 장면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CNN에서 방송된 9/11 테러의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인용되는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1930년대 H.G 웰스의 소설을 리메이크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2005)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달려가는 장면은 확연히 9/11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5) 때문에 우리는 중동, 아프리카, 혹은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들을 매체에서 볼 때 참지 못할 고통을  느끼기보다는 약간의 연민을 느끼거나, 아니면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졌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이 점점 가볍고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그 고통을 직접 느끼지 못했어도 깊이 공감하고, 진지하게 개입할 의지와 가능성을 잃어가게 된다. 그래서 손택은 우리는 어떻게∙왜 이렇게 되었으며, 만난 적도 없는 타인의 고통을 내가 고민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물음을 던진다.6)








동양에서는 일찍이 맹자(孟子, BC371-289)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유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자기 보존’이다. 이는 곧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하는 문제와  연결되었다. 문제는, 지금 우리 한국 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자기 보존’과 ‘타인과의 관계’ 모두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에 매몰되어 올바르게 이루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원자화는 인간 소외와 고독을 야기했고, 정부와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에 집중된 ‘조직문화’는 이러한 소외된 개인들을 잘못된 방법으로 연결시키면서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구조적 이데올로기를 개인에 주입했다. 서울 부촌의 어느 아파트에서 주민들에게 동물과 같은 대접을 받고 결국  분신자살한 한 경비원, 부당 해고에 항의하며 일인 시위를 벌인 노동자를 무차별  폭행하고 비교적 경질의 처벌을 받은 재벌그룹 회장, “우정이란 명분으로 친구와 노는 것은 다가오는 너의 미래인 수능을 망치는 일이다”라고 학생들에게 외치는 거대 학원의 광고 문구까지 모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라진 양심과 인간의 존엄성, 잘못된 방식의 개인의 사회적 연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양심’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본능적인 공감에서 출발하며, 이를 기반으로 개인은 타자에게 일종의 ‘책임 의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을 잃고 자율적 개인, 책임의식이 있는 개인도 되지 못한 데는 구조적 문제가 크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집중적인 경제화를 이뤄 온 한국사회는 한국형 신 자유주의 체제를 만들어내며 ‘개인’을 착취해왔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경쟁에 중독되고, 도태된 사람들에게는 무관심 해졌으며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수단과 목적으로만 여기면서 개체 사이의 ‘공감’은 무뎌졌고, 인간의 존엄성과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억압과 분노, 무관심이 채웠다. 이 무관심은 특히 ‘유사성’의 원리가 작동할 때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일반적(경제∙사회적으로)인 대중들은 자신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느끼는 누군가의 고통, 예를 들어 지식인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졸  영화감독의 아사에는 (일시적으로나마) 관심을 갖지만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빈번히 일어나는 사망 사고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테러 당시 파리와 베이루트에 쏠린 관심의 차이와 같이, ‘주류’에 비해 ‘비주류’는 공감을 얻는 데 있어서도 한참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유사성 혹은 동일화의 원리로 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죽은 지식인은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절대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감 능력이 한정되어 있다는 논리로,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지금부터는 맹자가 이야기한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론 속 ‘공감’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 해결 실마리의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모든 인간의 본성 자체에는 도덕적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性善說

           

맹자는 “모든 사람은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며 모든 인간의 본성에 도덕적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누구나 그 아이를 도와주려 하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를 알아서, 칭찬을 받고 싶어서,  비난받기 싫어서도 아니고, 단지 인간이 본래 선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맹자에 의하면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고, 이러한 ‘최소한의 인간성’이 인간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운영 원리다.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함’은 나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내 몫을 성실히 수행하는 마음도 포함한다. 결과적으로, 맹자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고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각 개인은 자기만의 ‘자아’를 가지고, 타인은 또 다른 자아를 가진 ‘타자’ 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속에서 서로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러한 공감의 역할이 크다. 즉 ‘자아’에게 타인은 공감(sympathy)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를 통해 타아(他我)를 인식하는 것이다.7) 개인은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맺고, 연대하며 살아간다.


맹자는 상황에 따른 네 가지 도덕적인 실마리인 ‘사단(四端)’을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사단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 之心), 예의와 존경의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이루어진다. 맹자는 이러한 싹들이 구체적 상황에서 발현되어 결국 도덕적 실천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보았다. 특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측은지심은 유교의 최상위 도덕인 인(仁)과 연관되어 중요성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네 가지 실마리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향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도덕적 싹들의 발현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나와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며, 예(禮)와 의(義)를 회피하는 데 급급하며, 자율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사단이 ‘존재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본성들이 실천으로 ‘발현’되고 사회적으로 ‘확충’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맹자의 말을 고려할 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본성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도덕성과 공감의 능력을 강요하거나 강압적으로 주입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공장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다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가까운 사람의 죽음만큼 슬퍼하고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이다. 어떤 사건에 슬픔을 표하고 또 위안을 얻는 것은 누군가가 지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현재 우리 사회의 ‘공감의 부재’의 정당화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공감의 부재로 야기된 우리 사회의 무거운 문제들은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맹자는 도덕성을 본성으로 끌어오면서 우주에서의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만들어 냈고, 이 사실로 인해 인간이 전 우주의 이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과 본성과 하늘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기준을 만들어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때  외부에서 규범이나 법률을 통해 억지로 강제할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사회 구성에 있어서 규범이나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만큼 맹자는 인간 본래의 도덕성을 신뢰했다. 지금의 우리는 보편적 가치에 의거한 자율적 판단도, 본래의 도덕성을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방법도 잃었다. 그 배경에는 사회적 억압, 권력, 시장 지배논리가 있다. 어느새 ‘전체’가 되어버린 조직의 자본이나 이익에 따른 강압과 명령에 개인의 삶이 복종해야만 하는 사회적 관습에 사회가 침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각지의 선비들은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제치고 한성으로 달려가 상소를 올렸다.  몇십 년 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흔든 큰 사건이었다. ‘공감’이 ‘책임의식’이자 ‘부채의식’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타인을 책임지려고 하는 개인을 찾을 수 없다.  하루하루 자신의 생존도 힘든데 '남'에 대해 책임 의식을 느낄 겨를이 없다. 오히려 이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場)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공포는 타인을 짓눌러야 나의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기원전 사람인 맹자는 이미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익을 추구했을 때 오는 폐해를 말했다. 그는 서로의 이익을 탐하는 약탈과 경쟁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안과 폭력을 가져오는 악순환을 불러온다고 경고한다. 이에 그가 내놓은 해답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발현시키고, 그것이 추구되는 사회를 만들어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운영 원리가 이익(利)이 아닌 도덕성(仁義)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2015년 현재의 우리도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다. 










선함은 ‘가능성’이고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 도덕 정치의 필요성

 

맹자가 세상을 바로잡는 정당하고 유일한 힘이 나라의 부나 군사력, 강력한 법률이 아니라 도덕적 마음과 실천이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자연 상태로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실의 악과 무관심 등에 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함은 ‘가능성’이다. 누구나 잠재적으로,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기는 힘들다. 인간은 외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 때문에 ‘도덕적 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더불어 경제적인 안정과 사회적 안정이 필수라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에 개인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구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맹자가 말했듯, 개인이 아무리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유지하려 해도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자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위로부터, 즉 전체 구조가 달라지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힌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 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요구하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한 움직임의 출발점이 ‘공감’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나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일에는 조금의 에너지도 쓰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맹자는 “현재의 악만 보지 말고 그 악이 만들어진 조건을 보라”고 말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구성한 주체, 그들이 얻고자 하는 이익과 목표, 그로 인해 영향 받는 개인들을 예민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예전에 만난 한 기자 분은 기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은 공감 능력, 즉 일종의 ‘오지랖’이라고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에 가슴 아파하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마음이 입사시 ‘필기 점수’보다 기자 생활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우리 모두가 이 ‘오지랖’이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끊임없이 아파해야 하며, 나아가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




앞에서 언급한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연민만으로는 우리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우리의 잘못이 아니다")을 인정하고 주장해 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우리가 연민을 넘어, 나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극복하고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두려움을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손택 자신도 미국 사회의 감춰진 역사와 허위의 실상을 폭로하는,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 중 당시 유명 시사지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기고하고, 9/11 이후의 반이성적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등의  현실 참여 활동을  계속해 나갔고, 주류 대중매체의 공격에도 그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8)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 3p

"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  위의 책  14p, '한국의 독자들에게' 中

 











맹자의 성선설이 가지는 의미는 선함의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선택받은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공감’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이 주어졌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회의 문제를 좀 더 근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레바논보다 프랑스에 더 관심이 기울어진 것에 대해 언론을 비난하는 건 쉽지만, 구조적으로 고정되어버린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보는 것은 어렵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대상으로 지정하면  분노와 비난을 쉽게 외부로 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대하는 데 있어  수 천년 전 맹자의 주장은 큰 도움을 준다. 내가 정규직이면, 비정규직의 처우에 분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실상 현재 대한민국에서 언제든 해고가 가능한 비정규직 숫자는 600만명을 웃돈다. 전체 임금근로자 3명 중 1명꼴이다. 늘어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이다. 타인과 올바른 방법으로 연대하기 위해 개인은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가져야 하고,  이때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회 구조는 조건이 된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사회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가진 본연적 ‘선함’을 자연스럽게 발현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부끄럽고, 반성한다. 과연 나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아파했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까?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 수전 손택 (Susan Sontag)


      










*참고 문헌 (Reference)

[Articles]

1) “Paris attacks kill more than 120 people – as it happened”, <The Guardian>, 15-Nov-2015. ttp://www.theguardian.com/world/live/2015/nov/13/shootings-reported-in-eastern-paris-live

2),3)  “Daily chart-The global empathy gap between Paris and Beirut”, <The Economist>, 19-Nov-2015. http://www.economist.com/blogs/graphicdetail/2015/11/daily-chart-13

5) "Heart-breaking news", <Korea Joong Ang Daily>, Feb-23-2008.

http://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2886553

* "Did the media ignore the Beirut bombings? Or did readers?"by Max Fisher, Nov-16-2015. <Vox> http://www.vox.com/2015/11/16/9744640/paris-beirut-media


[Books]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이재원 역, 도서출판 이후, 2004 : 4) 14p, 6) 13p, 8) 2p,3p

- <존재에서 존재자로> 144p, 에마뉘엘 레비나스, 서동욱 역, 민음사, 2003 : 7) 144p

-『맹자(孟子)』, 맹자 

- 김선희, <동양철학 스케치>, 풀빛, 2009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자료들을 인용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cover image : Photo by Joshua Cla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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