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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Feb 18. 2016

철학, 어느때나 어디서나 무엇이든

로제 폴 드루아의 <사물들과 철학하기>를 통한 철학 경험


이어폰 - 겨울이 가는 어느 날 오후, 지하철에서.


이어폰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수품이 되었다. 나 또한 버스와 지하철에서 음악이나 뉴스 등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 때문인지 이어폰이 없이 외출하면 은근한 불안함마저 느낀다. 아침에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집을 나서면, 왠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양 갈래로 갈라진 전선으로 이루어진 이 가느다란 사물이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어폰을 꽂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 차단된다.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고, 내가 선택한 소리만이 내 귓가에 울려 퍼진다. 청각은 뇌 활동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은 내 귀에 꽂은 그 사물에서 나오는 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로 인한 도로에서의  안전사고와, 지나친 이어폰 사용으로 생겨난 청소년들의 난청 문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현실적인 문제다.) 예전에는 버스에서 들리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 같이 피식 웃기도 했다. 이제는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방 안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소리를 듣는다. 거실에서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티브이를 보지 않고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으로 다른 영상을 본다. 하나의 감각이 지배되면 다른 감각은 휴식을 갖는다. 우리는 '먼' 목소리를 너무 많이 듣고, '가까운' 곳으로는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너무 많이' 듣는 우리는 생각하길 멈춰버렸다. 이어폰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에겐 말을 걸기가 부담스럽다. 지금 그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지금 날 건드리지 마"의 의미로 이어폰이 종종 사용됨을 부정할 수 없다. 이어폰은 사용자의 주변에 '경계'를 만든다. 우리는 점점 서로 거리 두고, 경계 짓고 있다.






이 글의 주제가 이어폰일까? 아니다. 쓰다 보니 꽤나 흥미로운 글감이 된 느낌이지만, 지금 당장 내 눈에 띄는 '사물'이 이어폰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철학'했을 뿐이다. 이는 로제 - 폴 드루아(Roger-Pol Droit)의 <사물들과 철학하기 - 어떤 철학 경험> (원제 :  Dernieres nouvelles des ghoses)를 읽고 그의 방법을 짧게나마 따라 해 본 것이다. 로제 -폴 드루아는 1949년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국제 철학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고, 프랑스 대표 일간지 <르 몽드>의 고정 칼럼니스트이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철학 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는 종교와 철학에 대한 다수의 저서를 썼는데, 특히 철학에 있어서는 '철학 체험'을 많이 다뤘다. 그의 다른 책 <친구들과 함께 하는 64가지 철학 체험> (원제 : Petites Experiences De Philosophie Entre Amis)도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되어있다.




 "사물들은 어떻습니까?" (Comment vont les choses? : "하시는 일은 잘 되십니까?" 정도로 번역되는 프랑스 인사말로, 그는 이 문장은 사회적인 맥락이 아닌 낱말 자체인 'choses'에 집중했다. 'choses'는 '사물들'의 의미를 가진다.)라는 말을 듣고 문득 이상함을 느낀 그는 '사물'에 대해 철학한다. 때문에 책의 목차는 '사발', '클립', '리모컨', '열쇠', '기차표', '진공청소기' 등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클립 하나로 윤리를, 열쇠와 가로등으로 사랑을, 세탁기로 영혼의 윤회를, 쇼핑카트로 감각들의 혼란을, 쓰레기통으로 형이상학을 논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이 철학 활동이 모두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서 촉발되었다는 점만으로도 흥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침대'에 대한 내용 중 발췌)

서 있거나 누워 있어도 우리는 동일한 세상에 살지 않는다. 누운 세계가 존재하고 선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두 세계는 아주 약간의 공통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앉은 세계가 있고, 무릎을 꿇은 세계, 웅크린 세계 등등이 존재한다. 각각의 세계는 서로 별 상관이 없다. 수직의 삶과 수평의 삶은 당연히 동종이 아니다. 침대에서는 공간과의 모든 관계가 변한다. 그렇다면 시간과의 관계는? 눕거나 서서도 동일한 확신을 가질까? 동일한 느낌을 갖게 될까? 같은 사유를 하게  될까?...(중략)...
요컨대 침대는 엄밀히 말해 우주선이다. 두 세계를 왕복하는. (83p)


이 외에도 '사발'이나 '선글라스', '가로등',  '스카프'를 가지고 자유롭고 기발한 그의 사유를 읽는 것 자체가 나에겐 즐거운 '철학 경험'이 되었다. 각각의 내용도 흥미롭지만, 사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말 그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철학할 수 있다"로 읽을 수 있다. 철학적 사유는 대단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그의 인터뷰를 담은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 출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무엇’에 대해서든 철학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사랑에 빠지면 사랑이 뭔지 생각하기 시작하잖아요.”


<사물들과 철학하기> 겉표지의 뒷면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들 주변을  살펴보세요. 생활 속에 인간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일상적인 사물들과 철학적인 경험을 해보세요. 그것들로 인해 노라고, 당황하며, 안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보세요. 세세한 주의력과 탁월한 유머, 아주 약간의  터무니없는 말들이, 사물들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  -R. -P. D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그럼  당신은?"에서, 저자는 이 '사물'에서 촉발된 경험이 단순히 '사물'에 머물지 않는 것이 이러한 사유 활동의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겠다. 즉 사물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고. 만일 사물들이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들을 거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 옆에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경우 사이에서 늘 사물들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고, 우리와 섞이며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 사물들을 볼 채비가 되어 있어야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때에만 우리 자신의 '중심'에 있다.(220p)


학창 시절 "교과서를 보면 그 아이의 성적이 보인다"란 말을 듣곤 했다. 또 우리는 자주 그 사람의 '물건들'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한다. 이처럼 나의 '사물'은 단지 '사물'로만 존재하지 않고 '나'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물'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계속해서 더 많은 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물에 지나치게 애정을 부여하는 사람들, 자신의 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은 사물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신은 사물들이 어떠한지 알고 싶은가? 매우 간단하다. 그것들은 당신 자신이 지내는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당신은 사물들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모든 사물이 인간의 척도이다. 당신이 너무 닫히지도, 너무 불안정하지도 않기를. 당신의 사물들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221p)






지금까지 '사물'들을 가지고 철학을 해 보았다. 그런데 2016년을 살아가는 나는, '사물'들이 철학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이 만든 '사물'인 로봇이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의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받고 싶은 로봇 데이비드처럼 말이다. (좀 더 잔혹한 방향으로는 '생각'을 하게 되어 인간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는 영화들이 있겠다.) 아직은 먼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기술 윤리', '로봇 윤리학' 등은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로봇' 들이 인간의 일들을 대신 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은 무인 자동차를 내놓고 아마존은 물건을 배달하는 드론을 만들었다. 이런 로봇들이 작동하는 도중 사고가 나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로봇'이 너무 멀다면, 그 전엔 가장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윤리가 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탈리아의 신경외과의사 세르지오 카나베로와 중국 하얼빈의대 의료팀이 원숭이의 머리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즉, 원숭이의 머리를 다른 원숭이의 몸에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한 것이다. 의료팀은 원숭이는 윤리적 문제로 인해 수술 후 20시간이 지난 뒤에 안락사시켰다고 밝혔다. 한편, 카나베로 박사는 한국, 중국 의료팀과 함께 내년 말 경에 러시아에서 사람의 머리를 이식하는 수술에 도전할 계획이다. 처음으로 머리 이식 수술을 받을 사람은 러시아 국적의 남성으로, 선천성 척수 근육위축증을 가지고 있어 근육의 성장이 멈춘 상태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수술은 아직 확실한 실험 결과가 없기도 하고,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실험에 사용된 원숭이의 안락사 문제부터, 나중에 실제로 '인간'에게 이 수술이 적용되었을 때 야기될 많은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만약 누군가의 '머리'가 다른 사람의 신체에  이식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하게 '머리'를 가진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사람의  '머리'와 '신체'의 결합에서, 그렇다면 그 결합물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제1, 제 2도 아닌  제삼자인가? 영혼과 신체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 데카르트는 결국 신체와 사유(혹은 뇌 작용)의 연결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도 이 한계를 알았고, 지금도 그때도 타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송과선'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신체와 뇌가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는 현대의 뇌 과학이 발달하면서 설명되었다. 또 실제로 대부분  자신이 갖고 있는 '신체' 가 자신을 규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인 맥락에서, 키가 큰 사람은 그것이 '자신감 있는 성격'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을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이지 않나?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이 단지 '뇌'와 '신체'라는 물리적 요소일까? 가상의 이야기지만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맷 데이먼)이 완전히 기억을 잃었지만, 그의 신체가 본능적으로(?) 훈련된 공격&방어술을 완벽히 구현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런 모든 물음들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모두가 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에서 누군가는 계속해서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유의 결과를  공유하며 함께 앞으로의 방향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최근 '취업 사관학교'가 되어버린 대학들이 더 많은 학생들을 취업시키기 위해 소위 '취업에 어렵다고 고려되는' 인문대를  통폐합하거나 축소하는 방향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안타깝다. 물론 나는 수학과 과학이 좋아 이과를 가고 언어와 영어가 좋아서 문과를 가는, 우리나라의 문과-이과의 이분법적 구분 교육 시스템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컴퓨터 코딩을 배우는 과목을 수강하는 문과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서로의 분야(?)를 넘나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문과 - 이과의 구분 틀 안에 있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절대 철학, 사학, 문학, 종교학, 언어학 등의 기초 학문들이 이런 시대적 기류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저서 <나의 세계>에서 과학 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과학과 종교, 윤리에 대해 논했다. 대표적 고전 경제학자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사실 도덕 철학자(윤리학자)였다. 그는 대학에서 처음에는 윤리학을 강의했다. 실제로 그는 경제학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윤리관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것의 근본에는 올바른 윤리관이 바탕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해야 한다. 안 그래도 학창 시절 내내 '생각 하기'보다 '주입된' 교육을 받아온 우리나라의 학생들으 '자유로운 학문의 요람'인 대학에 가서도 삶과 인간, 종교와 도덕을 다루는 수업을 들을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니, 답답한 마음이다.


몇해 전 방문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있는 아담 스미스의 무덤 앞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우리의 인생은 수평적이지 않다. 과학, 도덕, 예술, 종교 등 각각은 심오한 층을 가지고 있다. 이에 있어 우리는 무한한 탐구 영역이 있다는 점을 알고, 세상의 복합적 측면을 포괄적이고 다차원적으로,중측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의 토대는 '사유'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생각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바람직한 국가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를 위해 겉으로 포장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이어폰을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서야겠다. 거리에서는 지나쳤던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노선표를 보면서 철학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Reference)

[Articles]

http://www.telegraph.co.uk/news/science/science-news/12112051/First-head-transplant-successfully-carried-out-on-monkey-claims -surgeon.htm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767514&lfrom=kakao

http://www.electimes.com/article.php?aid=1442273264127230050


[Books]

- <사물들과 철학하기 - 어떤 철학 경험>, 로제 폴 드루아, 박선주 역, 동문선, 2005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자료들을 인용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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