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쇼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사상 최대의 금융 위기.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던 대형 투자은행들이 월가에서 줄줄이 도산했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번영을 대표하던 월가. 많은 사람들이 집과 직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금융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이 영화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 그 일을 예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008 금융위기 당시의 상황을 잘 몰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모기지, CDO, 헤지펀드, 스와프, 다우존스, 리먼 브라더스, boa, CDA, ISDA 등의 단어들이 익숙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다. 복잡한 금융 지식을 늘어놓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꼭 이해가 필요한 부분들은 중간중간 특별 카메오들이 배경 지식을 매우 쉽고 재밌게(?) 설명해 준다. 영화의 흐름이 끊이지 않나 싶어도 이 영화 자체가 중간중간 극 중 인물들이 카메라에 대고 직접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흐름에 잘 들어맞는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해 존재하는 월스트리트를 둘러싼 이야기지만 단연코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람이다. 나라 전체가 굳게 믿고 있는 '굉장히 안정적인' 시스템이 사기이자 허상임을 깨닫게 된 '소수' 혹은 '아웃사이더'들이 어떻게 이 상황에 대응해 나가는지가 이 영화의 재미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2008 금융위기는 결국 일어났으니.)
영화의 내용을 정리하거나 영화와 관련된 배경 지식 등을 정리하는 것은 지루하고 의미 없으니, 감상만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영화의 러닝타님마저 길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브래드 피트, 라이언 고슬링처럼 월가와는 거리가 있는 느낌(?)을 가진 배우들도 상당히 역할 소화를 잘 했다. 미드 오피스에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의 스티븐 카렐을 보는 것은 어색할 정도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에는 오로지 남성 캐릭터만 존재한다. 그나마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부실 대출을 받은 스트리퍼, 목욕 중인 여배우 마고 로비(거품 안에서 채권 설명을 한다) 정도랄까. 혹은 투자은행의 이름 모를 직원. (그래도 간부급은 되어 보인다)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권이란 곳이 특히나 '남자들의 세계'로 그려지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피 튀기는 그곳을 갖고 노는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싶다.
극 중 마크 바움이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말한다. 실존인물인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도덕적인 갈등'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짜증이 많고 막무가내인 성격으로 그려지곤 있지만) 그는 부실 CDO 상품들이 심지어 서로 묶여 혼합 상품으로 또 판매가 되고 그것이 또 묶여서 사람들에게 판매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시장 붕괴는 정해진 미래라는 것을 제대로 확인 해 버린 것이다. 그가 아내에게 말한다. "생각보다 심각해. 진심으로 경제가 무너질 것 같아. 나도 업계 사람이니 그 일부야."
주택시장과 은행이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단 한 사람, 마크 바움은 매도를 거부했다. 월가의 한 투자자와 함께 토론 연설에 서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회사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월가는 모기지 채권이라는 좋은 상품을 사기와 무지가 빚은 핵폭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이 폭탄은 곧 전 세계 경제를 초토화할 겁니다....(중략)... 미국의 현재는 사기의 시대죠. 은행권뿐 아니라 정부, 교육, 종교, 식품업, 심지어 야구까지도. 제가 화나는 것은 사기가 나쁘거나 고의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1만 5천 년 동안 사기와 근시안적인 사고는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결국 사기는 들통나고 무너집니다. 우린 어쩌다 그걸 잊은 거죠? 미국이 이보단 나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맞다거나 우월하단 얘긴 아닙니다. 오히려 슬픕니다. 거만한 월가 전문가가 헛다리 짚는 게 웃기긴 하죠. 당신은 헛다리 짚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일반 국민이 이 사태의 모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늘 그래 왔으니까요."
말 그대로 돈을, 돈에 의한, 돈을 위한 곳.
주택담보대출의 결함을 미리 알고 '그 결함'에 배팅하는 상품을 만들어 수익을 기대하거나 이 예측치를 이용하여 상품을 거래한 사람들 (즉 주인공들) 또한 결국 수익을 올리기 위한 행동을 취했던 것 아닌가. 말 그대로 '미국 경제가 무너지길' 바라야 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금을, 집을, 직장을 잃으면 내가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극 중 대형은행에서 트레이더로 일하다 환멸을 느끼고 벤 금융계를 떠난 벤 리커트(역시 실존인물)는 배팅에 뛰어든 두 청년을 우연히 돕게 되는데, 수익을 올릴 생각에 신나 하는 그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넨 지금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에 돈을 걸었어.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퇴직금을 잃고 직장을 잃어.실업률1%당 4만명이 죽는다고"
우려했던 일은 결국 일어났고, 그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거래를 도와준 벤에게 두 청년이 묻는다.
"우릴 왜 도와줬어요? 그럴 필요 없었잖아요. 고맙긴 한데 왜 도와주신 거예요?"
"부자 되고 싶다 해서 부자 만들어 준 거야."
조금은 두서없이 적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도는데, 오늘따라 글로 정리가 잘 안된다.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할 수 있는 힘은 엄청난 것이다. 이 사람들이 그랬다. 모두가 하우징 마켓은 '완전히 튼튼하다'라고 믿을 때, 아니라고 외쳤다. 문제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모두가 믿고 있는, 모두가 신뢰하는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온갖 허상과 사기에 점철되어 있을 줄이야. 국가라는 시스템, 은행이라는 시스템, 그 어떤 시스템도 '절대적인 것'은 없을지도. (최근에는 비트코인 등의 가상화폐들이 기존 '화폐'에 대한 믿음을 조금씩 부수고 있는듯하다. 아무도 '돈'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때, 누군가는 '왜 돈이 꼭 국가에서 만들어야 해?'라며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었다.) 일부러 어려운 말을 섞어가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행동을 하는 이들을 가소롭게 바라보는 월가를 향한 적절한 말이 있다. (영화 도입부에 이 말이 나온다)
It ain't what you don't know that get you into trouble.
It's what you know for sure that just ain't so.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 Mark Twain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라고 착각한다. 타인을 대할 때도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네'라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나 자신도 나 자신을 100%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단정 지을 수 있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속해있는 시스템, 교육, 역사, 산업 등 어떤 분야를 향한 맹신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역사. 역사는 '해석'이라지만, 사실 정말 생각 이상으로 우리가 배우고 접하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이유로, 지워지고 선택되고 정제되고 해석된 '역사'를 배우고 접한다.
흔히 우리는 헬렌 켈러를 '장애를 극복한 여성'정도로 알고 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헬렌 켈러는 훌륭한 선생님인 설리번을 만나 배우고 성장하여 훌륭한 성인이 된다. 헬렌 켈러 위인전에서 가장 강조되는(?) 장면이 있다면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 켈러를 물가로 데려가 물을 직접 만지게 한 뒤 손바닥에 'water'를 써주며 단어를 가르쳐주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는? 성인이 된 후의 헬렌 켈러는 어떤 사람이었나? 내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위인전은 헬렌 켈러가 잘 성장했다는 대목에서 끝난다. 사실 그 뒤의 헬렌 켈러는 언론, 정치, 사회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극 좌파로 극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미국 사회당 창당 멤버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서프레제트(20세기 미국과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다. '이런 헬렌 켈러'는 누구에 의해, 왜, 언제 지워진 걸까? 설리번은 극 보수였고 헬렌 켈러는 극 진보였는데, '자상하고 위대한' 설리번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플롯의 프레임은 모종의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을 법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사회당 창당 멤버'라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것이 '불편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지웠을 것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잘 나타내 준다.
탐욕이 도를 넘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고,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나도 그 업계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마크 바움은 이렇게 덧붙인다.
“남 돕는 법을 잊어버렸어. 형이 말했어. 나쁜 생각이 든다고. 난 그 얘기를 듣고 돈을 주겠다고 했어. 빌어먹을 돈 얘기를 했다고." (그의 형은 자살했다.)
벤 리커트는 말한다. "월가는 사람을 돈으로만 봐서 문제야."
월스트리트의 회사 로비에만 발을 들여본 두 청년 제이미와 찰리는 리먼브라더스가 도산하자 짐을 챙겨 나오는 직원들의 사원증을 빌려 텅 빈 사무실로 들어가 본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네"
"기대한 게 뭔데?"
"좀 더 성숙한 어른들(grown -ups)이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엔딩 크레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