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글쓰기

<집착>_아니 에르노

by 서리다

<사진의 용도>가 처음이다. 내가 아니 에르노를 만난 건. 마을 작은도서관에서 사진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사진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다. 책을 펼친 순간 뜨악했다. 낯 부끄럽다 하지? 어쩜 이렇게 적나라하게 할 말 못 할 말 구분 없이 할 수 있지? 사진도 사진이지만 글이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나는 설득되고 있었다. 이런 글이 읽히는구나. 진짜구나. 작가의 용기가 대단하다. 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3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며 아니 에르노의 이름이 들리는데 반가웠다. 1984 BOOKS 출판사에서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책 몇 권을 샀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한참 후 문학동네에서 표지가 눈에 띄는 개정판이 나왔기에 몇 권 더 사서 역시나 책꽂이에 예쁘게 꽂았다. 가끔 페미니즘 관련 책 이야기가 나오면 아니 에르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집에 책이 있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못 읽었다. 며칠 전 일찍 자야겠는데 그냥 자긴 아쉬워서 짧은 책이 있나 하고 책꽂이를 보다가 <집착>, 아니 에르노의 책을 집었다. 88쪽의 얇은 책이다. 아! 그렇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던, 내밀한 속내를 거침없이 쓰는 작가였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순식간에 읽었다.


내게도 연인에 대한 집착의 순간 있었다. 그저 질투라고만 생각했는데 집착이었다. K는 나의 생애 첫 남자친구였다. 그는 나에게 하나에서 열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하려 했다. 연애가 처음인지라 나는 어리석게도 K가 리드하는데로 많은 시간을 그에게 할애했다.(가장 후회하는 부분이다.) 연애기간 중간에 1년을 뺀 4년의 시간을 매일같이 만났다. 중간의 1년이 문제였다. 외지에 1년간 다른 공부를 위해 떠나 있는 동안 K의 옛 짝사랑이 나타났다. (첫사랑도 아니고 짝사랑이다.) 그녀의 연락 한 번에 그는 그대로 무너졌다. 타지에 있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공부는 엉망이 되었고 계획했던 2년과정을 1년만 마치고 돌아왔다. 집착이 이성을 잃게 했다. 그땐 그녀가 유학을 떠났고 남겨진 K는 다시 내게 돌아왔다. 하지만 1년 뒤 유학 갔던 그녀가 돌아오고 난 다시 헤어짐을 당했다. 그때 K에게서 받은 반지는 창밖으로 던지고 목걸이는 그에게 돌려줬다. 그러고도 집착은 멈추지 않았고 얼마 후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공유했던 게 기억나 그의 이메일에 접속했다. 내가 돌려준 목걸이를 목에 건 그녀의 사진이 있었다. K의 아이디로 그녀에게 메일을 썼다. 난 K의 X여자 친구이고 그 목걸이는 내가 선물 받았다가 돌려준 거라고. K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와 헤어졌다며 욕을 쏟아냈다. 그제서야 난 잡착을 버리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 후에도 재밌는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첫 번째 이별 통보에서부터 K의 그녀에게 메일을 보낼 때까지 1년 정도 나의 집착은 나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이미 K와의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삶이란 게 없었다.) 그렇게 나의 어리석은 첫 연애경험은 수치스럽게 끝났다. 짧지 않은 기간인데 글로 적어보니 열댓 줄뿐이다. 그때의 감정을 기록해 놨다면 장편 소설이 되었을까? 조금 더 기억을 되살려보면 몇 가지 에피소드를 쓸 수 있겠다. 아마도 그 글은 아니 에르노가 책 서두에 언급했듯이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을 때라야 편하게 쓸 수 있겠다. 아니면 그냥 나 혼자 읽을 일기장에 끄적이는 정도일 거다. 하지만 언젠가 책꽂이 꽂힌 아니 에르노의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녀의 문체에 물들어 한 글자, 한 문장, 한 단락 써질 수도 있지 않을까? 써보고 싶다.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치열한 글쓰기! 탐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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