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른 일들에 집중을 하지 못하던 것은 사실이다. 업무 시간에도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서 일에 실수가 많았다. 내 업무와 회사의 성격상 모든 일을 여러 번 확인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인데 그러질 못했고 눈앞에 일들을 오랫동안 붙들고 진행시키지를 못했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고민했지만, 결국 말씀드리기로 했다. 우연하게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가벼운 개인면담이 있던 날에, 소장님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어봤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드렸다. 업무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편의를 봐달라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휴가를 쓰거나 자리를 비우게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본다면 신입사원이, 그것도 최근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사원의 아주 좋은 핑계로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소장님은 내 심정을 공감해주시고 걱정을 해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요즘 배가 좀 나온 것 같다며 건강관리 좀 하라고 장난스러운 핀잔을 주시고 웃으며 면담을 마쳤다. 왠지 모르게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을 이야기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눈치를 보나보다.
10회간의 전뇌 방사선 치료는 꽤나 성공적으로 보였다. 조금 피곤해하고 어지럼증을 호소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의사소통에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던 언어나 인지 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 이제 엄마는 말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표정이나 얼굴에 생기가 많이 돌았다. 이기적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냥 쾌차해서 지난 날들처럼 돌아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 엄마의 집으로 내려갔고 나는 날마다, 생각날 때마다 전화를 해서 컨디션과 일과를 묻고 있다.
3주라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나의 연희동 방에서 살았다. 이제는 그들이 남겨놓은 이부자리만이 남아있고,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도 없어진 것 마냥 마음속도 고요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나름 많은 것들을 했다.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서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이제 돈이 아깝지 않다는 엄마는 비싼 물건을 덜컥 덜컥 샀다. 맛있는 곳들만 골라 데이트를 즐겼고, 손잡고 영화도 보러 갔다. 좋은 기억이 남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와서야 이렇게 하는 아들들을 보며 일말의 아쉬움이나 처량함을 느낄 수 있는 당신의 입장이 생각나서 마음이 좋지 않고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나는 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엄마도 본인의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모든 일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게 된다.
2021.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