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그 시간 속의 엄마는 멋진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수십 년째 똑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는 비즈니스 룩을 걸치고 아침 일찍 강남으로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왔고, 집에서도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주말이라도 항상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났고, 그 와중에도 항상 아들들을 칼같이 챙기셨다. 동네에서는 또래 친구들마저 엄마의 카리스마를 동경할 정도였고 어디서도 엄마는 우뚝 서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둘을 혼자 키우셔야 하는, 그때 엄마의 나이 겨우 40대 중반이었다.
엄마는 가끔씩 자신에 대해 자랑을 했었다. 항상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전교 2등을 하자 할머니의 돈을 훔쳐 부산으로 가 죽으려고 했었단다. 전국 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동향이었던 엄마를 서울로 초청을 했고, 대학 시절에는 항상 도서관에서 놀았다면서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 최초로 변리사 수석합격자라는 타이틀까지. 이 레퍼토리는 항상 같았다.
내 학창 시절은 엄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물려받은 것 같았는데, 공부와는 담을 쌓았었고,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농구와 아르바이트였다. 신발 가게에서 일하는 형 누나들을 동경했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좀처럼 치기를 진정시키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학원이나 학교를 좀처럼 제대로 다니지도 않았고, 심지어 대학은 힘겹게 들어가 놓고 2주 만에 자퇴를 했으니까. 그럼에도 엄마는, 항상 별 말 안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셨다. 하지만 항상 그만큼의 책임을 주셨는데, 용돈을 깎던가, 뭐 그런 식이 었다. 동생에게는 항상 안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혼내던 것과는 늘 달랐다. 솔직히 편하다고 생각했다. 엄하고 무서웠던 엄마가 이제 내가 성인이 되자 모든 걸 허락해주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임주의는 나를 더 초조하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의 기질을 아셨던 건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생각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에 다시 들어가서, 엄마가 매일 자랑하던 그 레퍼토리대로 주말에도 방학에도 학교에 살다시피 하면서 첫해에 학부 수석을 하고는, 어디 재단으로부터 졸업 때까지 타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처음으로 엄마에게 자랑할 일이 생겼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 나는 자취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어리석었던 나는 그때 즈음부터 다 컸다고 스스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엄마에게 ‘다 키웠다’는 말을 들은 건 바로 내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나서이다. 나는 항상 스스로 뭐든 해낼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인생이 전부 그녀의 손바닥 안이었다. 엄마의 집을 짓고 나서, 사실 그러한 여정도 엄마가 만들어준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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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이제 다 키웠으니까.
이제 내가 보살펴야 할 때인데.
이렇게 서둘러 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후회와 고통으로 다가오는데.
엄마에겐 나름의 위안이 되나 보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난 아직 덜 키워진 것 같다.
2021.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