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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Sep 26. 2023

대전 동춘당·소대헌·오숙재·호연재 산책

일곱째별의 고택 일기


강의 후 전날 본 사계고택 해설판의 ‘동춘당(同春堂)’이 떠올랐다.

공복에 오후였다. 동춘당 관람을 위해 혼자 먹는 만둣국은 별맛이 없었다. 음식이 맛없는 게 아니라 입맛이 없는 탓이었다. 요즘 뭘 먹어도 맛이 없다. 여름 지나며 큰일들을 마치느라 소진한 탓인지 국내외 정세 때문인지 모르겠다.      


동춘당 뒤에 운 좋게 하나 남은 자리에 주차하고 빙 돌아갔다.

먼저 종택으로 갔다.

동춘당 종택은 송준길이 살던 가옥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송준길(1606~1672년)의 호가 동춘당이다.

송준길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사계고택 김장생의 아들 김집이 이조판서로 기용되자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동춘당 종택은 사랑채, 안채와 두 채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택에 들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담장 옆 우뚝 선 은행나무 두 그루였다. 감나무가 많은 종택에 뜬금없는 은행나무가 올곧게 서 있었다. 종택 뒷편으론 배롱나무가 몇 그루 서있는데 꽃은 거의 지고 잎은 무성했다.


종택을 둘러보고 나오니 앞쪽에 동춘당이 있었다. 동춘당은 보물 제209호다.

동춘당은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이 짓고 8년 후 위치를 동쪽으로 조금 옮겨 현재 자리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건물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9년(인조27) 송준길이 44세 되던 해에 중건했고 그 후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경이 대대적으로 중수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종택과는 분리된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당 동춘당은 1단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는데 지붕의 선이 다른 한옥과 비율이 다르면서 곡선이 매우 곱다. 우측 4칸은 대청이고 좌측 2칸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문은 이중 창호지로 되어있고, 방에서 밖으로 통하는 작은 창문도 있었다.

대청의 창호는 방 쪽을 제외하고 3면 모두 띠살문을 달아두었고 그중 남과 동측은 들어열개 문을 달아두었다.

동춘당은 동서남북이 모두 다르게 설계되었다. 문과 창을 달리했고 벽도 제각각이었다. 계절과 날씨에 맞춰 지은 것이었다. 북쪽 툇마루 맨 위 오른쪽 나무만이 원래 동춘당이 지어졌을 때의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굴뚝이 온돌 측 왼쪽 벽 아래에 구멍으로 뚫려있는 점이다. 추운 날 양반만 군불을 때면 마을 사람들에게 티가 날까 봐 그러한 것인지 그 연기를 쐬면 벌레들이 퇴치되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동춘당 남면


동춘당 동면


동춘당 북면


동춘당 서면(귀퉁이가 다른 창문과 아래 굴뚝)


현판은 송준길 사후에 송시열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이라고 한다. 진한 우정의 표시였으리라.

송시열이 쓴 현판 동춘당


원래 동춘당 뒤에는 산이 둘러있고 그중 주봉의 지맥이 동춘당으로 이어지는 지형이었다. 그런데 1995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수화 같던 산세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동춘당 개발 전 전경


이렇게 자세히 동춘당을 볼 수 있었던 건 해설사 덕분이었다. 그분은 내가 동춘당과 종택 말고 다른 고택에 관심을 보이자 그곳까지 안내해 주셨다. 그뿐 아니라 고택 앞에서는 호연재의 시를 한 수 읊어주기까지 하셨다.      

호연재 김씨 시 야음(夜吟)


소대헌·오숙재·호연재 고택

소대헌은 송준길이 증손이자 호연재의 남편인 송요화가 머물던 곳이다. 아궁이 위 다락처럼 보이는 곳의 창문틀과 자연미를 살린 이중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소대헌


소대헌 옆 오숙재는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깨고 잠자는 사이 언제라도 도를 즐기고 덕을 이루는 삶을 살라’는 의미라고 한다. 오숙재는 송요화의 아들 송익흠이 사용했다. 오숙재에는 책을 두는 서고가 벽장과 함께 있다. 오숙재 방에서 뒷문을 열면 안채 담장이 있고 그 너머 안채가 보인다.  

소대헌과 오숙재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모두 기단 위에 지었는데 높이와 들고 남이 살짝 달랐다. 그러고 보니 양반들은 낮은 땅에 집을 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려 했던 것일까. 밖에서 쉽게 들여다보이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오숙재


호연재는 호연재 김 씨가 사용한 안채다. 호연재는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칭송될 만큼 시에 능했다. 그러나 남편이 어머니를 업고 형의 임지에 방문해 집을 비우는 등 부부지정이 없었다고 한다. (해설사 설명 외 조사해 보니 남편이 딴 살림을 차렸다고도 한다.) 호연재의 시를 보면 외로움에 술과 가까이했음이 드러난다. 한데 시로도 술로도 시름을 달랠 수 없었는지 42세에 일찍 별세하고 만다. 송요화에게 호연재는 감당키 어려운 아내였는지 아니면 그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두 번째 부인과는 잘 지냈다고 한다. 인물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에 어울리는 짝이 없다면 이승에서 행복하긴 쉽지 않은가. 비혼이란 개념이 없던 그 옛날이니 오죽했겠나. 하지만 절대고독이 있었기에 문학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호연재


호연재는 규모가 꽤 컸다. 서쪽 내실에 들어가면 베란다처럼 작은 방이 하나 더 있고 그 방의 창을 열면 서쪽으로 널따란 정원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시서화를 완성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방과 방은 작은 문으로 통해 있어 아기자기함과 실용성을 더했고 대청마루에는 커다란 벽과 창이 있어, 창을 열면 뒤뜰이 보인다. 그리고 마당 한켠엔 꽃이 피어있다.

호연재 뒤편 사당 옆에는 우람한 배롱나무가 아직 자미화가 달린 채 서있었다.    


호연재 내실에서 본 뒤뜰


소대헌·호연재 고택에서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건 고택의 양식도 그랬지만 맨 앞에 조성된 꽃밭이었다. 높은 툇마루에 앉아있으면 아래로 화려한 꽃무더기가 가득한 정원. 그중엔 해남에서 보았던 금화규도 있었다. 조경하는 분의 열정이 느껴졌다.      


이름대로 봄에 갔어야 더 좋았을 동춘당과 호연재 사이 연두색 언덕에 주홍색 꽃무릇이 가득했다. 해남 백련재문학의집 북카페 앞도 꽃무릇이 가득하려나? 내가 아는 그곳도 그러려나? 꽃무릇을 눈에 담고 돌아본 동춘당과 호연재의 정취가 그윽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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