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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Oct 21. 2023

콩이의 시선

이층집 정원일기


이층이 조용하다. 음악소리도 사람소리도 나지 않는다.

햇빛의 온도가 낮아지자 이층집사람은 하루에 두 번도 밖으로 나온다.

명절에는 주인집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온다. 그리고 내게 온갖 먹을거리가 쏟아진다. 앞집까지 도합해 먹고 남은 갈비조각을 헹구지도 않고 간이 밴 채 와르르 밥그릇에 던져준다. 다 깨지고 더러운 플라스틱 그릇에서 얼마 전 이층집사람이 사준 스테인리스로 바뀐 밥그릇에.

이층집사람이 사료를 주면 주인어르신은 아까도 줬다고, 고양이가 다 먹는다고 하신다.

내가 밥 먹을 때면, 아니 이층집사람이 내려오면 어느새 다가와 있는 하얀 고양이. 눈이 찢어지고 배가 늘어진 하얀 고양이. 내가 잠시만 딴청을 하면 내 밥을 홀라당 다 먹어버리는 하얀 고양이.


얼마전 이층집사람이 주인에게 사료가 없다고 걱정을 했다. 주인어르신은 선물 받은 걸 내주시면서 비싼 거라 다른 거 안 먹으면 어쩌냐고 하셨다. 작은 봉지에 포장된 사료는 커다란 통에 비해 양이 너무 적었다. 가끔 고양이가 사료 넣어둔 통을 쓰러뜨릴 정도로 가볍다. 사료통에 사료가 가득 담겨있을 때는 이층집사람도 하얀고양이를 반겼다. 가끔 사료 한 줌을 계단에 따로 뿌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이층집사람이 내 그릇에 사료를 부어주고는 말했다.

"먹어. 고양이 주지 마."

깜짝 놀랐다. 항상 내게 올 때마다 나타나는 고양이에게 "안녕, 고양이, 고양이 왔어?"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말은 주인이 하는 말이었으니까. 옆에 있으면 닮나 보다.


얼마 후 이층집사람이 사료를 사왔다. 그리고 짱짱한 주황색 가볍고 굵은 새 줄도 사왔다. 원래 있던 1미터짜리 줄에 120cm가 더해지니 내 반경이 넓어졌다. 주인어르신은 "콩이 호강하네"하신다. 지난번에도 사료가 떨어졌는데 주인집에서 사오지 않자 이층집사람이 10kg 사료를 배달시켰다. 그때는 돈을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더 비싼 3kg짜리 사료를 사왔는데 아는 척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비싼 거 먹인다고 뭐라 하신다. 내 입장에선 싸구려 사료나 동네 사람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 갖다 주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층집사람은 내가 밥 먹을 때 옆에서 지켜본다. 사료를 부어주고 가면 번번이 내가 먹는 대신 고양이가 먹어치우는 걸 알아차린 듯하다.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이층집사람은 쪼그리고 앉아 지켜본다.

그게 좋다. 간간이 "아유~ 잘 먹네." 칭찬해 주는 것도 좋고, 내가 먹는 동안 털에 붙은 지푸라기나 풀씨를 떼어주는 것도 좋다. 덕분에 요즘은 하루 두 번 꼬박꼬박 밥을 잘 먹는다.  


이층집사람은 요즘 나랑 산책할 때 줄을 풀어준다. 팔이 아픈지 내가 당기는 힘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줄을 푼 나는 쌩쌩 달려가다 뒤를 돌아보고 이층집사람이 오는 게 보이면 또 달려간다. 따로 가는 듯 함께하는 이 산책은 서로 편하다. 나는 이층집사람이 따라오는 걸 확인하면서 내 속도로 신나게 갈 수 있고 이층집사람은 줄에 당겨오지 않고 천천히 제 걸음을 걸으니 둘 다 자유롭다.

우리의 코스는 거의 매일 정해져 있다. 농로를 따라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면서 윗마을 쪽으로 빙 돌아온다. 그렇게 돌면 2km 정도 된다.


헐떡헐떡 돌아온 나는 발칵발칵 혀로 물을 핥아먹는다.

이층집사람은 사료를 퍼준다. 그리고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내가 다 먹으면 일어나 간다. 이층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나를 쳐다보며 인사한다.

"잘 자."


*


이층집사람이 내려왔다. 커다란 배낭을 등에 메고 두 손 가득 큰 봉투를 들고 낑낑거리며.

나는 반가워서 팔딱팔딱 뛰었다. 이층집사람은 내게 밥과 간식을 주고는 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지난 어느 밤,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비를 맞고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차가 집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헤드라이트가 꺼지자 이층집사람이 나왔다. 나는 기뻐서 겅중겅중 뛰었다. 

"왜 비를 맞고 있어?"

그새 비쩍 마른 이층집사람은 내게 와 측은한 듯 말하며 사료를 그릇에 부어주고는 젖은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곤 차에서 커다란 배낭을 꺼내 메고 올라갔다. 한참 후 물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이층집사람은 내게 사료와 간식을 주고 차를 타고 나갔다. 이번엔 언제 돌아올까 온종일 기다렸다. 이층집사람이 없고 주인집도 없는 날은 산책을 못 한다. 그리고......

밤이 되자 차소리가 들렸다. 아픈듯 초췌한 이층집사람이 차에서 내려 내게 왔다. 사료통에 사료를 꺼내 그릇에 부어주는데 먹지 않았다. 이층집사람이 물그릇을 보더니 놀란다.


"어머 물이 없어?"


이층집사람은 후다닥 그릇에 물을 담아 계단에 놓는다.


벌컥벌컥벌컥벌컥벌컥벌컥벌컥벌컥

나는 세차게 혀로 물을 핥아마셨다.


"세상에. 하루 종일 물도 못 마셨어?"

이층집사람은 나를 안쓰러워하는 듯 이웃 사람을 원망하는 듯 중얼거렸다.


그릇이 금세 싹 비워졌다. 이층집사람이 다시 물을 떠다 주었다.

이층집사람이 새로 사준 스테인리스 그릇은 깨끗하지만 자그마하다. 그래서 사료는 가득 담기지만 물을 담아놓기엔 매우 작다. 물은 전에 있던 낡고 더럽고 뻘건 플라스틱 그릇에까지 두 그릇이었는데 그걸 누가 치웠다. 나는 다시 물을 마셨다.


"아- 콩아. 어쩜 좋니. 널."


이층집사람이 내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은 이층집사람 치마폭에 몸전체를 기대며 부비적댔다. 더러운 내 몸의 털이 이층집사람의 울재킷과 청치마에 들러붙었다. 평소 깨끗한 외출복으론 내 곁에 오지 않는 이층집사람이 오늘은 가만히 있는다. 그 몸이 떨린다. 흐느끼는 소리도 난다. 일층 센서등은 벌써 꺼지고 사방이 깜깜하다.  

나는 이층집사람이 좋다. 어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음악을 틀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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