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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Oct 28. 2023

지리산 순례길

지리산 화대종주


문을 닫기 전 집안을 둘러보았다. 빈 와인병에 분홍, 노랑, 파랑 카네이션이 꽂혀있다. 얼마 전 출간된 생애 첫 단행본. 그 책이 집으로 배송된 날 이어받은 축하 꽃다발이었다. 그토록 간절히 고대하던 책이 나왔다. 그리고 난 떠났다. 3년 전 봄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갈 수 없었고, 작년 유월엔 출판계약 직후 원고 정리 기간이라 갈 수 없었고, 올 유월엔 폭우로 취소했던 지리산. 바라고 바라던 지리산으로.


날씨는 하늘 주관이라 땅에 있는 사람은 주는 대로 받아야 한다. 지리산 등반에 가장 중요한 주변 요소는 날씨. 일기예보에 시월 셋째 주 월 화 수는 사흘 내내 맑았다.      



2023년 10월 15일 일요일

경상남도 산청군 대원사로 가는 길목엔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빛깔 주황색은 감나무의 빛바래 가는 초록 잎 사이에서 풍성함을 더했다.


오전 11시 30분, 산청 대원사 앞에 주차했다. 산청 버스터미널까지 가야 남원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다. 터미널까지는 16km. 대중교통수단이 없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걸어가다가 나가는 차를 잡아야 했다. 마침 삼거리까지 가는 남자분이 SUV에 태워주셨다. 사찰을 찾아다니는 분이셨다. 삼거리에서는 거창으로 가는 여자분이 승용차에 태워주셨다. 젊은 시절 생각난다며. 산에 다니는 분들은 다 인정이 많은 듯하다.


산청에서 간단하게 식사하고 13:54 버스를 탔다. 한 시간 반 걸려 전라북도 남원시외버스터미널 도착. 택시로 간 남원역에서 16:37 기차로 22분 만에 구례구역까지. 구례구역에서 다시 택시로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근처 숙소로 갔다.

오전 8시에 집에서 나와 오후 5시에 도착했으니 출발 지점까지만도 9시간 걸렸다.     

구례 화엄사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에 들었다. 지난 유월에 예약했다가 폭우로 취소할 때 친절하게 환불해 준 기억 때문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2박 3일간 먹을 음식과 코펠과 버너, 옷과 약, 가장 중요한 물통 등 짐을 챙기고 여유분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전복버섯죽과 바나나로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했다.

5시 19분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섰다. 전날 숙소 주인에게서 들은 대로 차가 온 길로 가 오른쪽으로 꺾어 걸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화엄사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내리막길. 이상했다. 마침 어두운 새벽길에 나와계신 아주머니께 여쭤보니 반대 방향으로 가라고 하셨다. 휴대폰 지도 앱을 켜보니 거꾸로 가고 있었다. 되돌아가는데 2km. 거기서 화엄사까지 1.8km 더 올라가자 이미 기운이 다 빠졌다. 배낭은 너무 무거웠고 내 체력은 평상시보다 저조했다. 출발부터 꼬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달리 사태 파악을 한 도반은 내 짐을 달라고 했다. 내 옷과 수저 등의 짐을 더해 족히 20kg은 될 배낭을 난 손으로 들 수도 없었다.      

그래도 아침 7시에 들어선 화엄사 옆 지리산 길은 촉촉하고 선선하니 쾌적했다. 그 시간대 대부분의 등산객 차림은 가벼웠다. 아마 7km 위 노고단까지만 가는 듯했다. 나머지 큰 배낭을 멘 사람들은 등반 속도가 무척 빨랐다. 화엄사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커다란 바위 아래 나뭇가지들을 받쳐놓은 게 있었다. 미황사에서 본 것이었다.


노고단 대피소는 공사 중이고 다음 대피소는 연하천. 화엄사에서 연하천까지는 17.1km. 헤맨 거리에 화엄사까지 합치면 약 21km. 그런데 화엄사에서 노고단 구간은 악 소리 나는 오르막 돌길이다. 평지에서도 하루 21km 걷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10kg 이상 되는 배낭을 메고 그 길을?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까지 숱한 길을 걸어왔던 것처럼.

 

첫 번째 임무는 오후 1시까지 노고단 통과. 연하천 대피소에서 온 문자에 의하면 그랬다. 4시간에 오르막 7km. 돌계단과 돌길을 기어올라 극적으로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는 간신히 한 시 직전이었다. 대피소 직원은 연하천 대피소 예약 문자를 보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조금 가서 쉴 만한 데를 찾아 앉았다. 발열 식품에 아까운 생수를 붓고 10분간 익히니 밥이 완성되었다. 이름은 김치찌개인데 맛은 라면 잡탕, 평소라면 먹기 힘든 맛이었다. 맛없는 식사로 보충한 에너지보다 짐에서 물 1리터라도 줄어드니 조금이나마 다행이었다.      

식후 쉴 틈도 없이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아니 오르락내리락했다. 지리산은 흙보다 돌이 많다. 밟는 면이 딱딱한 돌인데 불규칙하게 울퉁불퉁하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디를 밟을지 본능적인 판단으로 시신경과 뇌 운동에 긴장과 피로가 쌓인다. 게다가 딛는 충격이 만만치 않다. 스틱이 있으니 발뿐만 아니라 팔에도 힘이 들어가는데 나는 오른쪽 어깨가 성치 않은 상태였다.      


살살 불편하던 팔 때문에 서울 정형외과에 갔을 땐 엑스레이를 찍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니 더 아프면 오라는 말을 들었고, 예전 다니던 한의원에서 침 맞고 부항 뜨니 통증이 심해졌다. 등반 전 주에 시골 동네 통증클리닉에서 초음파로 보니 맙소사 근육이 좀 찢어졌고 석회가 조금 끼어있다고 했다.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를 들었다. 주사는 무서워서 거부했고, 물리치료라도 한 번 더 받아보려고 했지만, 수업이 늦게 끝났다. 그 상태로 산에 오른 것이었다. 건강한 몸에 최상의 몸 상태로 올라도 힘들 종주, 그것도 가장 험하다는, 구례 화엄사에서 산청 대원사까지인 화대 종주에 나는 대책 없이 무모하게 도전하고 말았다.


3년 전 봄에 철쭉 핀 지리산에 갔었다. 하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대피소 예약이 불가했다.

그때 고리봉까지 갔었다. 2km만 가면 있는 작은 고리봉인 줄 알았는데 만복대와 정령치휴게소 지나 있는 8.2km 거리의 큰 고리봉이었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8시까지, 왕복 16.4km를 날다람쥐처럼 뛰어갔다 왔었다. 그때 멨던 5kg 이하의 카메라 가방은 무거운 짐 축에 들지도 않았다. 그게 내 첫 번째 지리산 등반이었다.

며칠 후 성삼재에서 2km 노고단까지 갔다 온 게 두 번째.

다음 해 정령치에서 800m 고리봉까지 갔다 온 게 세 번째.

그다음 해인 작년에 혼자 백무동에서 5.8km 장터목까지 왕복 11.6km 갔다 온 게 네 번째.

산책 거리에 가까운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뺀다 해도 화대 종주까지 하면 지리산에 세 번 갔다 온 게 충분할 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리산 삼도봉


오후 다섯 시. 세 시간에 노고단에서 5.1km 지점 '전북, 경남, 전남 삼도를 낳은' 삼도봉에 올랐을 때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와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전화를 해 보았다. 연하천 대피소였다. 왜 아직 안 오냐는 것이었다.

“지금 삼도봉인데요.”

“아니 이제 거기까지 오면 어떡해요? 거기서 여기까지 봉우리를 두 번 더 넘어야 하는데. 여섯 시까지 들어오란 거 모르셨어요?”

“화엄사 가는 길에서 헤매서요.”

“화엄사에서부터 왔어요? 그럼 더더욱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 다시 노고단으로 가서 재워달라고 하든지 화개재에서 뱀사골로 하산하세요.”

대피소 직원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말했다.

“네?”

“거기서 봉우리 두 번 넘으면 아홉 시예요. 어둡고 야생동물이라도 나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위험해서 안 돼요. 어제도 한 사람이 우겨서 오다가 퍼져서 결국 한밤중에 출동했어요.”

“가서 잠만 자면 안 될까요?”

“여기 소등해요.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세요?”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느냐는 말에 단념했다.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지리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노고단까지 5.1km를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화개재로 향했다. 산은 금세 어두워졌고 기온은 내려갔다.      


그날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별똥별이 떨어졌을 때 나는 소원을 빌었다.

"전쟁이 그치게 해 주세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일 년 반 넘게 계속되는 중에 얼마 전인 10월 7일에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2023년 10월 17일 화요일      

새벽 5시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토끼봉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구토가 시작되었다. 오르막 한 발 한 발마다 구역질을 해댔다. 호흡 곤란 정도가 아니었다. 위에 탈이 난 게 분명했다. 토해야 올라가니 토끼봉인가. 위로만 게워내는 것도 아니었다. 위아래 정신없이 배설되는 통에 허리를 숙였다 폈다, 배낭을 멨다 풀었다 정신이 없었다.

6시 반쯤 되니 해가 떠올랐다. 간신히 토끼봉을 넘고 명선봉도 넘으니 연하천 대피소가 나왔다.

그 가파른 능선을 넘는 동안 도반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연신 토하면서 오르막을 오른 후 헐떡이며 물을 찾는 나를 위해 자신에게 남은 소량의 물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양보했다.


오전 9시.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현미누룽지를 끓였다. 탈진한 나는 끓인 누룽지는 못 먹고 한 숟갈 한 숟갈 컵에 담아준 누룽지 끓인 물만 마셨다. 두 컵쯤 마셨을까. 몸에 온기가 돌며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하산할 기운도 없는 채 하산을 결정했다. 그리곤 테이블에 엎드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따끈한 밥물이 속을 푼 것인지 따사로운 햇살이 생체리듬을 안정적으로 만든 건지 잠에서 깨고 나니 움직일 수 없던 몸이 풀렸다. 종주를 이어갈 수도 있을 듯싶었다. 거기서 내려가면 다음에 또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컸다. 그리고 다음에 연하천부터 이어하는 건 종주가 될 수 없다.      


지리산에선 대피소 예약이 필수니 다음 대피소인 벽소령 대피소 예약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장터목 대피소를 취소하고 벽소령 대피소로 예약했다.      


정오가 지나 출발했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3.6km만 가면 있는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오후 세 시쯤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해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내 속은 햇반에 끓인 물을 부어 먹는 것만 허락했다. 벽소령까지 오면서도 끓여서 식힌 숭늉으로 속을 달래주었다.

시월 초지만 산의 밤은 꽤 쌀쌀했다. 대피소에는 개인 난방이 됐고 온풍기도 틀어져 있었다. 다음 날 장터목 대피소를 예약했다. 산에서 가장 필요한 건 물과 온기, 잠자리와 화장실. 그게 해결되니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용 와이파이가 없지만 체크해 본 이메일엔 급한 업무 메일들이 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리산에 와있다. 하산 전까진 종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다음 날 새벽 5시 반에 오트밀로 식사를 하고 6시쯤 출발했다. 그런데 무엇이 몸에 안 맞았는지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또 구토를 시작했다. 누군가 용변을 보고 간 듯한 자리엔 새하얀 물티슈들이 널려있었다.  그 자리 어디쯤 비탈에 앉아있는데 수태라도 시킬 듯한 신령한 지리산 바람이 엉덩이를 시원하게 스쳤다. 그래서인지 그냥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덕평봉과 칠선봉과 영신봉을 지나 6.3km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반.

발열 식품을 먹었다. 대피소에는 햇반과 생수만 판다. 라면은 산 위에서 가장 귀한 식량이다.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주는 줄 알았다면 맛없는 발열 식품 대신 조미김이나 밑반찬을 싸 오는 거였는데 정보가 너무 없었다. 두 개 가져온 버너 중 하나는 쓸 일도 없이 배낭 무게만 더했다.      


세석평전은 평화로웠다. 막 물이 드는 나무들은 산을 알록달록 만들었고 그 위로 평온하게 드리우는 가을 햇살은 비타민 D를 가득 머금은 듯 따뜻하니 영양이 가득했다. 장터목까지 가는 능선도 기대가 되었다. 단풍 같은 건 나이 든 어르신들이나 즐기는 건 줄 알았는데 벌써 그 나이가 된 건지 변화로 조화로운 산 빛깔이 좋았다.     


세석 평전


오후 한 시쯤 출발해 700m를 가니 해발 1703m 촛대봉이 있었다. 그 아래에서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쉬면서 물을 마신 후 빈 몸으로 촛대봉에 올랐다. 저 멀리 천왕봉이 보이는 촛대봉에는 까마귀들이 날아다녔다. 한 마리에게 다른 한 마리가 날아가니 먼저 있던 까마귀가 자리를 옮긴다. 나중에 온 까마귀는 먼저 간 까마귀에게 뭐라고 하는 듯 깍깍거린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온 건데 왜 다른 데로 가니?’

그러는 듯했다.

까마귀는 사람이 주는 간식 맛을 본 것인지 배낭 근처를 배회했다. 까마귀를 뒤로 하고 장터목으로 향했다.

      

촛대봉 까마귀


누가 꽃길이 좋다고 했나. 나는 폭신폭신 탄력 있는 흙길이 가장 좋다. 돌길 가득한 지리산에서 가끔 나오는 편편한 흙길을 걸을 때면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의 두 배 이상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장터목 가는 길 by 도반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3.4km. 오후 네 시쯤 도착했으니 하루 9.7km에 점심시간 포함 10시간이 걸린 셈. 봉우리 다섯을 넘었지만 아주 느린 걸음이었다.      


다섯 시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내 식사는 다시 끓인 물에 만 햇반. 그나마 하나를 다 먹지도 못했다. 바삐 밥을 먹고는 가벼운 몸으로 제석봉을 향해 올랐다. 일몰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는 어두워서 볼 수 없는 제석봉 고사목을 보기 위해서였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고 무상의 세월을 말하는 고사목(枯死木)’은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죽은 나무였다. 허옇게 죽은 나무는 밑동만 남아 자취가 사라져 가고 있었고 개체수도 많지 않았다. 우측 전망대에서 보는 지리산은 겹겹이 층을 이뤄 어디까지가 산인지 모를 물결의 파장처럼 보였다. 가까이에는 물들어가는 황초록이 그 뒤로는 진청색이 그 뒤로는 점점 옅어지는 푸름이 오른쪽에서 퍼지는 태양의 주황빛과 어우러져 일몰 직전 마지막 빛의 향연을 펼쳤다. 해는 산 아래로 지고도 강렬한 붉고 노란빛을 남겨놓는다. 막 몰려오는 어둠의 속도가 빨라 다음 날이면 천왕봉에서 다시 맞이할 해를 기약할 여유는 그 당시 없었다. 그때 나는 시집을 펼쳤다. 종주할 때면 봉우리 봉우리마다에서 꼭 읽으리라 했던 시집.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      


지리산의 봄 4

-세석고원을 넘으며     


고정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 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


철쭉꽃 피던 시절에 고리봉에 갔었다. 그해 오월에서 3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어이없이 무너지는 내 몸을 보았고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왔다. 생은 살수록 막막하고 사랑은 그리움으로 목멘다.      

 

*


지리산의 봄 5

-백제와 신라의 옛장터목에서      


고정희


황산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측백나무의 어린 가지를 키우는 기슭에서

신라의 삼천군마가 뛰어놀았다지오니까

풀벌레 울음 소리 자욱한 수풀에

찔레꽃 향기 부서지는 날

등에 화살통을 멘 신라의 군졸들이

말갈기를 휘날리면서

무진벌 하늘에 시위를 당겼다지오니까

벌들은 저마다 주어진 길을 돌고

접시꽃 같은 백제 처녀들의 가슴에

나당연합군의 장칼이 꽂혔다지오니까

밤꽃 비린내 골짜기를 타고 흘러

이 마을 저 마을에 토악질 소리

입덧하는 여자처럼 오월이 흘러갔다지오니까

몸푸는 여자처럼 유월이 오고 말았다지오니까

논두렁 밭두렁에 개구리 울음 소리

입다문 백성들의 장송곡이 되었다지오니까

이름없는 송장들은 수장 암장 합장 평쳤다지오니까

청산에 솔바람 들바람 강바람 소리로 살어리랏다지오니까

풀잎처럼 눕는 백성 되었다지오니까          


*


지리산의 봄 4에 이어 5를 교대로 낭독하자 바람이 찼다. 어둠은 쉬익 쉬익 바람과 함께 산 아래에서부터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났다. 네 시에 역시 뜨거운 물에 만 햇반을 몇 숟갈 떴다.

4시 40분쯤. 두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등반을 시작했다. 제석봉까지도 가파른 오르막인데 거기서 내려가서 천왕봉까지도 암벽등반에 가깝다. 대부분 천왕봉 일출만 보고 중산리나 백무동으로 내려가기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지 않고 가볍게 등반을 했다. 하지만 화대 종주는 천왕봉에서 유평리로 내려가야 하기에 내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다.

구역질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과호흡으로 내 산행은 지나가는 사람이 다 알 정도로 요란했다. 헛구역질로 허리가 꺾인 어느 지점에서였다. 관목에 랜턴이 비쳤는데 그곳에 새집이 있었다.      


“여기 (집을) 지으면 어떡해? 잡아 먹혀.”     


해발 1800m는 족히 넘는 고도지만 까마귀나 독수리가 나는 곳이었다. 둥지 크기로 보아 작은 새일 텐데 고 아기들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런데 당시 내가 남 걱정할 때였나? 생존에 관한 한 새들이 나보다 고수일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어둠을 뚫고 헤드 랜턴에 의지해 산행했는데 천왕봉에 다다르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해발 1915.4m 천왕봉에 도착하니 6시 10분. 1.7km에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구름이 걷히고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천왕봉 일출. 나는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아빠께 감사했다. 그리고 험한 산길 내내 나를 지켜준 내 발과 등산화와 든든한 도반에게도.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일출


6시 반이 지나 해가 하늘로 떠오르자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6:50 하산을 시작했다. 대원사까지 11.7km.

한 시간 후 가파른 중봉을 지나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두 시간 후 써리봉까지 지나니 10시 반에 4km 아래 치밭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발열 식품을 몇 술 뜨며 한 시간가량 쉬었다. 내가 중간에 낙오할까 봐, 그래서 대피소까지 오기 전에 식사하게 될까 봐 도반의 배낭엔 물이 담긴 페트병이 있었다. 나로 인해 계속 무리한 산행을 하고 있었다.


11시 반에 다시 출발, 하산이 걱정스러운 도반이 다시 내 짐의 일부를 자신의 배낭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이후로는 완만한 돌길이었다. 오른쪽으로 지리산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닿아보진 못했다.

오후 3시에 산길을 벗어났다. 예상보다 빠른 하산이었다.      

대원사 가는 길에 만난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사흘 동안 식사라곤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일정이 하루 늘었는데도 기십 만 원어치 사간 간식도 남겼고, 먹은 것도 별로 없이 매일 새벽마다 토해내던 나는 산채비빔밥 한 그릇을 천천히 꼭꼭 씹어서 다 먹었다. 산 위에서 내 몸이 음식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식사 후 도반의 짐에 있던 내 코펠과 옷을 받았다.

거기서부터 대원사까지는 1km. 화대 종주 총 44km. 화엄사까지의 4km를 합하면 48km 중 내 짐의 무게를 내가 모두 감당한 건 고작 1km뿐이었다.

네 시 반쯤 차를 세워 둔 대원사 앞으로 왔다. 식사 시간 두 시간 포함 9시간 걸렸다.      

2박 3일 예정이던 지리산 화대 종주는 2박 4일이 걸렸다.

산행 내내 질문했다. 왜 산을 타는가? 누구도 내 짐을 다 들어줄 수 없고 나를 업고 갈 수도 없다. 누구에게도 짐 전부를 맡길 수 없고 내 발로 걸어가야 넘을 수 있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가야 하니 성취와 성공의 순간이 있으면 반드시 하락세도 있다. 그런 면에서 산행은 인생과 같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인생. 쉴 때마다 물통을 뽑아주며 함께는 가도 대신 가 줄 수는 없는 인생. 그러나 함께 가는 이가 없다면 혼자서는 수월히 갈 수 없는 인생. 저질 체력에 무리한 산행으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인 지리산 종주는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첫날인가 둘째 날 어디선가 버려진 페트병을 주워왔지만 대신 내게서 발생한 쓰레기는 모두 도반의 배낭에 있었다. 그는 내겐 귀인이었으나 나는 적어도 산에선 그에게 민폐였다.      


크고 쓸쓸한 집에 돌아왔다.

분홍과 파랑 카네이션은 시들었고 노랑 카네이션만 생생했다. 병의 물을 갈아주고 노란 카네이션만 꽂았다.


다음 날 출강을 했다가 퍼뜩 놀랐다. 하루 계룡산 종주를 하고도 며칠 계단을 내려가기가 힘들었는데 나흘이나 지리산 종주를 하고도 발톱이 좀 아프고 발에 물집이 생겼을 뿐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함께한 이에게 절절한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덜 아픈 만큼 상대는 더 아플 것이기에. 어쩌면 그것이 숙원이던 지리산 종주를 마쳤는데도 기쁘지 않은 이유인지도 몰랐다. 이번 종주는 내 힘으로 한 게 아니었다. 내 배낭에는 탈핵 몸자보와 노란 리본과 빨간 동백꽃 배지가 달려 있다. 지리산에서 본 어떤 배낭에도 그런 표시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지리산에 올랐던 사람 중 제일 비실댔다. 순례라고 하기에 순례자의 자세가 매우 부족했다. 남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 짐을 남에게 맡겼으며 건강한 이의 발걸음을 지체시켰다. 이미 다친 발가락으로 야크를 자처한 도반의 헌신과 희생으로 종주한 이번 산행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혼자 설 수 있는가. 온갖 추접스러운 꼴 다 보이고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어야 함을 이제야 안다. 내 인생에 매우 험난한 산을 함께 넘은 도반. 도반이 없었다면 종주하지 못했을 지리산.


산티아고 순례길도 7번 국도나 18번 국도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짧은 시간 고강도 등반으로 전문가에게나 어울릴 지리산 화대종주.

오랜 시간 간절히 갈망하던 지리산.

지리산은 이제 내게 지독히 아픈 산이 되었다.

아마도 다시 지리산에 가지는 못 할 듯하다.


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아름다움과 감사,

파란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행복,

노란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경멸, 거절, 실망.

노란 카네이션이 시들었다. 꽃을 버리기 전에 쓰기 힘들었던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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