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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Dec 13. 2023

향적산 순례길

향적산(575m)


4.6+1.4=6km

미리 언급하면 그리 높지도 않은 향적산을 오르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출판기념회 다음 날, 11월의 한적한 오후가 기울고 있었는데 무턱대고 간단한 배낭을 메고 산 초입까지 걸어갔다.

향적산 2.5km 이정표가 있었다. 포장도로를 조금 올라가니 2.3km.

입산 시작이다. 낙엽이 가득 깔린 산길은 오후 두 시 햇살에 습기를 말리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서서히 올라가다 보니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산길 같았다. 등성이 나무 사이를 헤치고 올라갔다.

지리산 종주 이후로 다시는 산에 오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민폐 끼치는 인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낙엽으로 뒤덮인 산에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능선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능선에 오르자 향국암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오솔길을 따라가니 산길이 끝나고 임도가 나왔다.

이정표에 300m 가면 향국암이 있다고 한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저만치 건물이 보인다. 그런데 승합차가 내려오고 있었다. 차를 세워 물어봤다.

“향적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운전하는 젊은 남성이 말했다.

“한 시간은 가야 할 걸요?”

차 안에는 중년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오후 세 시. 등산하기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좀 태워주실 수 있으세요?”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김장이 담겨 있었다. 봉사하는 분들이라 친절하셨다. 이렇게 늦게 산에 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등산한 지 30분 만에 등반 보류. 10분 만에 평지로 내려왔다. 얼마든지 하산할 수 있었다.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었으니까.

모르는 길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좀 전에 승합차에 타셨던 신도분이 다시 태워주셨다. 혼자 다니면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신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같이 갈 사람이 없는 걸요.

아는 길에 내려주셔서 2km 걸어서 집에 도착.

다시 가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재도전하면 된다.       



7(자)+5km

다음 날은 오전부터 서둘렀다. 그래봤자 11시였지만. 평지에서 걷느라 힘 빼면 안되겠어서 자전거를 타고 산 입구까지 갔다. 헬멧도 안 썼지만 아는 길이라 조심해서 달렸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안전벨트 없이 탈것에 올라있으면 좀 불안하다. 오랜 세월 자동차에서 익힌 안전수칙이 몸에 배어있어서 그렇다.

산 입구 전봇대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등반을 시작했다.


11시 30분. 향적산 2.3km. 어제 갔던 길이라 그런지 낙엽 덮인 산길이 눈에 익었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2년 전 해남 땅끝천년숲옛길을 걸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11월이었고 산에는 낙엽이 가득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놀랍게도 같은 날짜였다.)

어디선가 쿵쿵쿵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인가 귀 기울여 봤더니 가슴에서 나는 심장 박동 소리였다. 오르막이면 과호흡이다. 이 무슨 증세일까?      


12시. 향국암에 도착했다. 중년 남성 서너 명이 하산하면서 묻는다.

“향적산까지 올라갈 거예요?”

“네”

“거기 빡세다고 하던데.”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갈 거니까.

가파른 암자에서 본 산 아래 전망이 시원했다. 아직 산은 푸르고 골짜기와 이어진 평지에는 인가가 보인다.

잠시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일어났다. 거기서부터는 정말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난간의 밧줄을 잡고 가파른 계단을 수직으로 올라가야 했다. 300m 올라가니 다시 능선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700m. 왼쪽 아래는 논산시가 오른쪽 아래는 계룡시가 보이는 능선을 타고 북진했다.

절반쯤 왔을까? 커다란 바위가 가로막혀 있었다. 바위를 타고 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스틱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짧은 거리라 만만히 본 것이었다. 하지만 바위 타는 데 스틱까지 있었으면 더 힘들 뻔했다. 바위를 넘다 보니 아래로 길이 나 있는 게 보였다. 멀쩡한 길 놔두고 바위를 넘고 있는 꼴이었다. 천왕봉 가는 길에서도 그랬다. 길지도 않은 1.7km에서도 나는 막판에 길을 잘못 들었다.      


바위를 넘고 오솔길로 된 능선을 쭉 따라가니 향적산 정상(575m)이 나왔다.

12:44. 2.5km에 소요시간 1시간 14분. 괜찮은 진행이었다.


향적산 정상


정상 조금 아래 논산시 상월면 쪽으로 널찍한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 앉아 배낭에 준비해 간 사과 반쪽과 삶은 고구마 한 개를 먹었다. 까만 독수리가 휘이익 날아갔다. 만행산 천황봉에서도 본 적이 있다. 지리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걸어온 능선을 바라보니 뿌듯했다.      


향국암~향적산 능선


오후 한 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뒤를 돌았는데 중년과 노년의 경계선에서 한가로워 보이는 남자가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아내가 싸 준 거라며 쑥떡을 먹으라고 나눠주었다. 배고프진 않았지만 권한 성의를 봐서 감사하다며 한 개 받았다.

“등산하기 딱 좋은 몸이에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첫눈에 대뜸 몸평이라니. 게다가 지리산 화대종주 후 진이 다 빠져 손가락 끝이 전부 허물 벗겨져 새로 나고 몸무게도 좍좍 빠져 42kg에 육박해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내 몸이? 등산하기 딱 좋아서 지리산에서 그리도 빌빌댔나? 산꼭대기에서 성인지 감수성 운운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말이 들렸다.

“남편이 군인이세요?”

이건 또 뭔 말인가? 계룡에 군인이 많아서 그런가 본데 처음 본 사람에게 묻는 말치곤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만약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아내가 무슨 일 하세요?”이렇게 묻는다면?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이나 직업이나 거주지나 고향 정도는 물을 수 있다. 그것도 요즘엔 개인정보라 조심스럽다. 그런데 하물며 남편 직업이라니? 거기엔 중년은 대부분 기혼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게다가 배우자의 직업을 묻다니. 떡 외에도 싸 온 과일과 마시던 커피까지 나눠주려던 친절을 마다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지만 한 가지 감사한 건 그분이 무상사로 내려가는 길을 알려 주신 것이다. 덕분에 다시 빡센 향국암 쪽 대신 완만한 무상사 쪽으로 하산할 수 있었다.      


오후 1시 11분에서 30분 만에 네 갈래길 이정표에 다다랐다. 거기서 무상사 1.13km.

향적산 정상에서 1.5km 아래 치유의 숲이 있었다. 치유의 숲 팽나무 쉼터에는 서울 창경궁에서 본 형태의 은행나무가 이파리 하나 없이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이파리가 있을 때 보았더라면 더 인상적이었겠다.    

  

오후 2시에 산을 벗어났다. 거기서 1km 아래. 자전거를 둔 곳까지 쉬엄쉬엄 걸어갔다. 프랑스 파리에서 산 빨간 자물쇠에 묶여있는 초록색 뷔나가 가만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조심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혼자 헬멧도 안 쓴 채 지난 여름밤처럼 사고가 나면 큰일이다.      


산에서 도보 5km.(도보계에는 10.7km. 산에서는 거리가 두 배 정도 더 나온다.)

집에 와 강아지랑 한 바퀴 더 돌아 자전거 7km     


정상적인 산행은 식욕을 돌게 한다. 멸치 다시 국물에 통밀국수를 삶아 넣고 볶은 호박과 달걀지단을 얹어 먹었다. 얼마 만에 해 먹어보는 잔치국수인가. 슴슴한 맛이 내 입맛에는 괜찮았다. 식욕이 없는 요즘 음식의 맛을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다시 못 갈 줄 알았던 산. 비록 지리산에 비하면 1,340.4m 낮지만, 산에 다시 발을 들인 건 나로선 괄목할 만한 일.      


공자 왈(曰)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나는 바다가 강가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가능하면 산이 있는 곳에 살고 싶다. 서울에서는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 기슭에서 살았었다. 산책길이 등산로나 둘레길이었다. 오후 네 시 전후로 산책하던 길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은 멀리 바라보이는 향적산이라도 괜찮다. 등반 후 멀리 평지에서 바라본 향적산은 이전의 향적산과 달랐다. 내가 직접 올랐던 그 산이 저리도 높았나 내심 뿌듯하다. 모르는 산이 아닌 아는 산은 쳐다볼 때 애정이 어린다. 혹독한 지리산 종주로 산이라면 치가 떨릴 줄 알았는데 아직 산을 외면할 순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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