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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r 01. 2024

향적산 순례길 2

무상사~치유의 숲~향적산 정상~향국암~무상사 9.5km


삼일절을 맞아 등산을 했다.

자전거 뷔나를 꺼내려 나가 보니 콩이 물이 얼었다. 그렇다면 영하인데, 난 회색 집업 슈트에 10년 전 산티아고에서부터 입었던 얇은 누비 점퍼만 입었다.

바퀴를 보면 날뛰듯 좋아하는 콩이를 그냥 두고 떠날 순 없었다.

배낭 멘 채 뷔나를 타고 콩이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콩이를 묶어두고 길을 떠났다.


향적산에 가까이 갈수록 오르막이다.

예전에는 끝까지 올라갔었는데 지난번부터는 막판에 내려서 끌고 간다.

자전거에서 내리니 과호흡이 왔다.

철인2종 경기 같다.


연초 종합건강검진 때 의사가 갱년기에 호르몬 감소보다 더 위험한 건 근육 손실이라고 했다. 특히 심장을 감싸고 있는 근육이 사라져 무섭다고 했다. 몸에서 가장 근육이 많은 허벅지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오르막에서 과호흡이 오고 헛구역질을 하는 건 몸이 감당을 못하고 있다는 표시다. 지리산에서 끔찍하게 겪지 않았나.


11:45 무상사 앞 주차장 기둥에 자전거와 헬멧을 묶었다. 근처에 자동차가 가득한 걸로 보아 등산객이 많은가 보다. 몇 분 후 스틱을 짚고 향적산 치유의 숲으로 올라갔다.

10분만에 치유의 숲에서 맨재로 넘어가는 지점까지 올랐다.

12:04 물탕이라는 기도처 같은 곳을 지났다. 지난달에는 의젓한 백구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다.

12:12 쉼터가 나왔다. 군사지역 근처다.

지난달에 올라갔던 길을 따라갔더니 15분 후 밧줄 난간이 있는 오르막이 나타났다.

2월 13일에 멈춰 돌아갔던 지점이다. 이번에도 땅은 시커멓게 젖어 있었다. 올라가다 보니 눈이 쌓여있었다. 지난겨울 마지막 눈이 아닐까?

 

산에는 아직도 눈이


12:56 향적산 정상에 올랐다. 간간이 오르내리던 등산객은 사라지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난 11월에 갔던 논산이 보이는 바위로 살짝 내려갔다.

그리고 배낭에서 의자를 꺼냈다. 의자를 조립해서 놓고 그 위에 앉았다. 안정적인 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방석보다 기분이 좋았다. 낡은 텀블러에 타 온 블랙커피는 식어서 미지근했다. 두 모금 마시고 뚜껑을 덮었다. 사과를 꺼내 껍질째 와삭와삭 먹었다. 그러면서 어제 들었던 브람스의 인터메조 2악장을 들었다. 시작 지점의 고통은 언제 그랬냐 싶게 기분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은 한 곡을 다 들을 때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어떤 남자가 내 옆까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음악을 껐다. 그 사람은 되올라갔다. 다시 고요해졌다.  


발 앞에 고인 물은 얼음이었다. 까마득한 아래로 듬성듬성 앙상한 나무들이 가득한 산 허리에는 까마귀가 날고 그 아래로는 오솔길이 구불구불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좁은 길이다. 산 위에서 보면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작디작다. 꽤 걸었다고 해도 산 위에서 보면 한 뼘 남짓한 거리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나 보다. 산 위에선 산 아래 인간 군상이 하잘 것 없어 보이고 따라서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사는 모습 또한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에.


굽은 것이 어디 길뿐이랴


북쪽에서 오른쪽으로 찬바람이 몰아쳤다. 의자 옆에 뚫린 구멍으로 엉덩이가 시렸다. 분위기 잡다 얼어 죽겠네. 의자를 분해해서 배낭에 넣어 메고는 다시 정상으로 올라왔다. 계룡시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내려갔다. 능선 타고 가는 길이었다. 가다가 거대한 바위를 만났다. 지난번에 바위 위로 기어올라 타 넘었던 그 바위. 이번엔 옆으로 난 길을 잘 찾아서 돌아갔다.


큰바위 무늬


정상에서 700m 가면 향국암으로 가는 300m 급경사가 나온다.

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는 그 길은 치유의 숲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 비해 관리가 부실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을 내려가다 눈에 띄는 나무가 있었다. 종류가 다른 두 나무인데 그 둘이 서로 비껴가며 자라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이니 서로 다른 곳으로 가진 못하고 상생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느 하나 죽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살아남는 식물. 식물도 저렇게 공생하는데 사람은 어찌 그러지 못할까. 사람에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


어우러진 나무 둘


향국사(향국암)는 지난번과 다르게 인기척이 없었다. 앉을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돌아 나오는데 풍경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종 아래 네 발로 된 막대에 매달린 물고기가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건 나무나 물고기나 마찬가지. 눈에 띄게 산에서 움직이는 나는 스틱을 길게 늘여  임도 따라 아래로 종종 내려갔다. 마을로 가는 길과 무상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가다 보니 0.9km만 가면 마을인데 무상사로 가는 길은 2km였다. 자전거를 찾으러 가야 해서 더 먼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처음 가보는 길인데 깊고 아늑했다. 가끔 겨울을 못 이기고 뿌리가 뽑힌 건지 가로질러 누운 나무들이 있었다. 화목난로가 있다면 땔감으로 가져가면 좋으련만.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등성이 사이사이에는 나무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산책로로 제격. 종종 가고 싶은 길이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다 위를 보았는데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사이좋은 나무들

 

무상사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갔다. 총 9.5km를 걷고 세 시간 만에 다시 만난 뷔나는 그대로 있었다. 자물쇠를 풀고 비니 위에 헬멧을 쓰고 뷔나 위에 올랐다.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하산길. 그 길에 갈 때마다 작년 여름 낙차가 떠오른다.  


지난 번 자전거수첩을 사며 다운 받은 '자전거행복나눔' 앱에 보니 다음과 같은 안내가 있었다.

"자율안전확인대상공산품의 안전기준" 개정에 따라 2010년부터 생산되는 자전거는 앞브레이크와 왼쪽, 뒤브레이크가 오른쪽입니다. 이전에 생산된 자전거는 앞브레이크 오른쪽, 뒤브레이크 왼쪽으로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80년대부터 자전거를 탔으니 왼쪽 뒤브레이크에 손이 익었던 것이었다. 그 길을 다시 갈 때마다 그때 왜 내가 왼쪽 급브레이크를 잡았을까 분석해 본다. 아무리 복기해 봐도 나는 앞사람과 부딪힐까 봐 브레이크를 잡았다. 상대가 다칠까 봐 내가 다친 것이었다. 그랬다. 다 가진 다른 달에 하루를 더하느라 제 날짜를 빼앗긴 2월처럼 나는 늘 남 생각을 먼저 했었다. 너무 많은 배려로 인해 항상 이중으로 복잡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언제나 수고가 몸에 익었다.


분홍 장갑을 꼈는데도 내리막 쌩쌩 바람에 손이 시렸다. 집에 와 보니 그 사이에 콩이 물은 또 얼어있었다. 콩이와 다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삼일절을 맞아 향적산에서 독립을 기념했다.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다.

이 곡의 표제 '황제'는 어느 황제에게 헌정하는 곡이어서 아니라, 베토벤의 친구 출판업자 J.B. 크라머가 "이 작품의 구상이 크고 감명의 숭고함이 마치 황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년 전 정읍에서 다시 찾은 평화의 봄날 이 곡을 듣고 눈물이 났었다.

(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5-정원에 피어난 봄)

https://brunch.co.kr/@2b53c094f8864b1/17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평화로움을 누리고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니 삶이 평온하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2nd mov) Pf. Seongjin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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