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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r 02. 2024

향적산 순례길 3

무상사~향적산방~향적산 정상~향국암~무상사 6.7km


오전 11시, 몇 개 남지 않은 고구마 두 개 반을 삶아 어제 토마토 스파게티에 넣어 먹고 1/4 남은 브리치즈와 상하목장유기농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오늘이 음악가 스메타나의 생일이란 걸 알았다. 10년 전 갔던 체코 비셰흐라드의 그의 무덤이 떠올랐다.  


정오가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향적산에 가서 커피를 마셔야지.'

커피를 별로 마시지 않아 지난 12월에 선물 받은 친환경공정무역 원두커피가루가 아직도 남아있다. 물을 끓여 드립을 하여 148ml 스테인리스 플라스크에 담았다.

급하게 양말을 두 개 겹쳐 신고 어제 입었던 옷을 입었다. 점퍼 주머니에 330ml 생수와 카메라와 휴대폰과 플라스크와 손수건을 넣었다. 배낭이 없으니 몸자보 대신 앞치마를 입었다. 털고무신을 신고 집을 나섰다.


어젯밤 쫄쫄 틀어놓은 수돗물이 수도꼭지에서부터 얼음기둥이 되었다. 콩이 물그릇은 두 개 다 꽝꽝 얼었다. 어제보다 더 춥다. 옷이 얇지만 움직이면 춥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향적산으로 향했다. 산 아래에서 체력 소비를 줄이고 싶었다. 중요한 건 등정이니까.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트렁크에 있는 등산화를 신었다. 어제는 진흙이 묻는 게 싫어 10년 된 등산화를 신고 올랐었는데, 확실히 짱짱한 신발이 도보를 경쾌하게 해 주었다. 스틱을 짚고 무상사 뒤편으로 올랐다.


향적산 정상 1.6km.  어제 절골에서 내려온 길 옆으로 등반길이 있는 걸 보았다. 그 길이 궁금해 오늘도 나선 것이다. 이러다 향적산이 뒷산이 되겠네. 등산로 초입에 무속기도 도량 세 군데 표지판이 있다. 그 때문인지 길은 사륜구동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였다. 딱딱한 흙길로 된 꾸준한 오르막은 재미도 없고 힘도 든다.

좌측의 연화사를 보면서 우측으로 가니 향적산방이 있었다. 으슥한 골짜기에 가건물 같은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그 앞에 보이는 전망은 산 중에서도 우물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입구에는 나무에 팻말을 박아놓았다.


나무가 아프지 않겠어요?


그 길이 등산로가 맞나 하고 밧줄 따라 더듬어 올라가는데 밧줄 안쪽에 있는 바위와 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형상이 기묘했다. 신기해서 셔터를 누르다 보니 그곳이 바로 기도터였다. 산방이 산장인 줄 알았던 나는 등산로 초입에서부터 안내 돼 있던 여러 무속기도 도량이 그곳에 다 몰려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계룡산에서 이어진 산자락이라 영험한 곳이 많은가? 기이한 형상의 나무나 바위에 기도하는 토테미즘이 무속과 결합해 현대사회에도 공존함은 종교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바위에 얽힌 나무 끝이 어디인가 보려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무와 바위 풀샷은 왠지 조심스러워 올리지 않습니다


바위 뒤 물가에 밧줄 표시가 있는 곳에서부터 산행 기분이 들었다. 오르막을 쭉 가다 보니 지난번 왔던 길과 만나 진흙으로 된 한 길로 이어졌다. 등산화에 진흙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다 보니 어제 보았던 하얀 눈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정상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 소리가 와글거렸다. 토요일이니 어쩔 수 없다. 계룡시가 보이는 전망대에 십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서있다. 그중 한 남자가 나를 보더니 "초록별 안녕"이라고 내 앞치마 앞면을 읽는다. 꾸벅 목례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정상으로 가는데 뒤에서 "뒤로 돌아."소리가 난다. 그곳에서 산 아래를 보던  사람들에게 돌아서 나를 보라는 게 역력했다. 역시 맞았다. 누군가 내 앞치마 뒷면의 글씨를 소리 내어 읽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지구는 없다."

"환경운동하나 봐."


서둘러 정상으로 가서 앞치마를 벗어 스틱에 끼워 사진을 찍었다. 뒤에 사람들이 많이 기다려 앞치마를 제대로 찍을 여유가 없었다. 얼른 사진 찍고 항상 가던 그 자리로 내려갔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어떤 등산객이 그곳엔 항상 자리가 없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내가 갈 땐 늘 비어있다. 방석도 없으니 맨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플라스크 뚜껑을 돌려 열렸다. 향적산방 전까지도 따뜻하던 커피는 다 식었고 너무 썼다. 식사 후 향적산에서 커피 마시려던 낭만은 시늉만으로 그쳤다.

휴대폰에서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제2번 몰다우를 작게 틀었다. 현지에선 몰다우강을 블타바강이라고 한다. 10년 전 블타바강을 보면서 한강을 기억했었다.


나는 한강이 있는 서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수십 년 살았다. 한강을 오고 갈 때는 대교를 건널 때뿐 한강변에 산 적도 한강 근처에서 놀아본 기억도 거의 없다. 하지만 서울의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저 멀리 한강이 보였고 그 물줄기는 언제나 아련함을 불러일으켰다. 20대 중반에 방송사 프로그램 종영으로 한순간에 직장 잃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겠다고 10년 된 중고 프라이드를  몰고 안동 지나 청송에 갔다 한계령을 지나온 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돼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때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울에 들어서자마자 축제처럼 환하게 빛나던 야경이 그렇게 안심이 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역시 서울 사람이구나. 도시를 떠나면 무섭구나,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곳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싫어하던 산을 이렇게 혼자 타고 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14분 가까이 되는 그 곡을 앉아서 다 듣기엔 땀에 젖은 옷에 찬바람이 닿아 추웠다. 계룡시를 향하는 전망대로 가보았다. 풍수지리사가 아니더라도 높은 산에 올라가면 어느 지형이 양지바른 지 보인다. 저만치 아주 좋은 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신도안면 골프장이었다. 골프 치는 사람들은 골프장에 뿌려지는 제초제로 인한 주변 토질오염의 심각성을 알고 있나 모르겠다.  


음악이 다 끝나자 바위 쪽으로 향했다. 향적산을 좀 아는 사람은 나처럼 정상 근처에서 추위에 떨지 않고 하산하는 길목의 바위 아래에서 간식을 먹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쪽에서 누군가 무얼 먹는다. 오늘 그곳에 있던 남자는 7~80년대 가수 이은하의 노래를 크게 틀고 있었다. 타산지석. 내가 튼 클래식이나 그가 튼 가요나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임을 알았다. 세 번째 만난 큰 바위는 이제 친근한 느낌이 든다.


향적산 정상에서 능선 따라가는 길


능선에서 향국암으로 내려가는 급경사에서부터는 뛰기 시작했다. 이제 길이 익숙하다는 증거다. 절까지 들어가지 않고 입구 의자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내려갔다. 어제 세 시간 걸렸는데 오늘은 두 시간에 주파하고 싶었다. 향한리와 무상사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0.9km 내려가면 두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길로 내려가면 공용주차장까지 그만큼을 더 올라와야 했다. 어제 가본 길을 택했다. 다시 오르막 내리막 또 오르막 내리막. 마른 낙엽에 등산화에 묻었던 진흙이 떨어진다. 어제는 길을 물어보던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향적산에는 골짜기마다 물이 많다. 하지만 식수는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제 차에서 꺼내와 마셨던 500ml 물은 하산할 때까지도 이가 시리고 남겼는데 오늘 거실에서 가져온 330ml 물은 온도도 양도 적당하다. 거리 대비 필요한 물의 양을 가늠한다. 길이 익숙할수록 걸음이 빠를수록 물은 덜 필요하다. 산에서 짐 없이 다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점점 더 가볍게 다니리라. 그래도 무사할 수 있다. 갈림길에서 무상사까지 2km에 34분 걸렸다. 총 6.7km에 2시간 20분 소요. 이 시간을 얼마나 더 단축시킬 수 있을까?



집에 돌아오니 콩이가 좋아서 겅중겅중 뛰었다. 그런데 다리가 아파 바로 산책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좀 쉬었다가 다시 나갔다. 목줄 잡을 힘도 없어 콩이를 풀어주었다. 콩이는 뛰어갔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산책을 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콩이는 무얼 많이 먹었는지 아니면 어제 뛰느라 못 보았는지 오늘은 세 번이나 변을 본다. 네 다리 중 오른쪽 뒷다리 하나를 들고 힘쓰는 콩이를 기다려준다. 내가 계속 가면 그 애가 급해서 볼 일을 못 볼까 봐 가만히 서 있는다. 그렇게 쉬엄쉬엄 한 바퀴 돌고 와 사료를 주었다. 어디선가 하얀 고양이가 나타났다. 이제는 고양이가  나타나면 계단 모퉁이에 사료를 따로 부어준다. 하얀 고양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다가와 사료를 먹는다. 내가 준 사료를 때마다 먹으면서도 내가 조금만 다가가도 달아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콩이가 먹는 걸 지켜본다. 다 먹고 난 콩이를 빗질해 주고 인사한다.


"안녕. 잘 자. 내일 봐."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께 오늘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걸 보여드립니다.

좋은 건 저 멀리 산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집 앞 돌틈에 있더라고요.

 

올해 첫 민들레, 이토록 찬란한


                 

우효의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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