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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y 08. 2024

향적산 순례길 4

향적산 치유의 숲~향적산 정상~향국암~무상사


'비가 그치면 무성해질 거야.'

사흘 내내 내리는 창밖 빗 속의 앞산을 보면서 되뇌던 말이다.


오늘 아침엔 햇살이 빛났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전화로 처리하고는 정오가 되자 첫 식사를 했다.

쌈채소를 손으로 찢고 썬 사과와 바나나에 수제 요거트를 뿌리고 반숙으로 삶은 달걀을 뒤늦게 얹은.

식사하면서 책을 뒤적였는데 문장이 좋았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실까 했는데 불현듯 향적산에 가서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냉장고에 커피가 세 캔 있다.

두 개는 오래전에 선물 받은 것이고 하나는 작년 8월 말 강경에서 2+1 산 기억이 난다.

유통기한이 모두 6월이다.

6월 전에 다 마셔야 한다.



부랴부랴 산행 준비를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한전전기검침직원이었다.

일 년 정도 만 원 대였던 전기요금이 2,3월에 2만 원대가 나오더니 4월 치가 206 kWh로 3만 원이 넘었다.

전기난로 트는 계절도 아니고 4월엔 집을 비운 날도 많았는데 이상해서 검침 신청을 했다.

하지만 검침 결과는 정상이었다.

전기 쓰는 거라곤 냉장고와 노트북과 음악 듣는 폰과 스피커. 가끔 인덕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 집이라면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련만.......



자동차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일단 콩이랑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 그냥 갔다가는 서운해서 한참을 짖기 때문이다.

한 바퀴 돌고 나면 지쳐서 엎드려 있는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주고 나서야 한다.


큰 배낭을 등에 메고 향적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무상사 앞 주차장에 자전거와 헬멧을 묶어놓고 출발.

오후 2시였다.


향적산 치유의 숲 차도로 올라가 맨재로 향했다.

꽃길에 철쭉이 다 피고 질 동안 못 와 봤다.


첫 쉼터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 평평한 옆길로 돌기 시작했다.

물이 많은 향적산이라 바닥에 질척한 곳이 군데군데 나왔다.

그럴 줄 알고 10년 된 등산화를 신었다.  

10년 된 배낭에 10년 된 티셔츠에 10년 된 등산화.

모두 산티아고에서부터 썼던 것들이다. 7번 국도순례도 남도순례도 했고 지리산(등산화는 빼고)도 갔다.

그렇지만 스틱은 올해 생일 선물로 받았고, 지난번 서울 청계천에서 산 물통 꽂이와 휴대폰 주머니를 시험 사용해 보았다.


지리산 종주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물통 빼주는 사람이었다.

물 한 번 마시려면 배낭을 풀고 내려놓고 배낭 옆 주머니에 있는 물통을 꺼내 마신 후 꽂고 다시 메는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누군가 옆에서 물통만 빼줘도 배낭을 풀고 내려놓진 않아도 됐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얼마 못 가 물 때문에 계속 쉬는 건 나와 동행인 모두를 더 지치게 했었다.


그 후 나는 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계속 고민했다.

호스가 달린 물통이 장착된 초경량 배낭을 고르다가 제품이 없어 물통 주머니를 샀다. 그리고 얼마 후 카메라와 휴대폰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도 샀다. 선물이다. 이제 나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배낭을 풀지 않고 물을 마실 수 있다.


도보순례와는 달리 산행이나 자전거 주행을 하면 옷과 장비에 민감해진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점점 효율적인 걸 찾게 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니까.

물론 나는 아직 둘 다 초보라 어떤 장비가 좋은지 잘 모른다.


평일인데 산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간편한 복장에 빈손에 목걸이 명찰을 단 걸 보니 사복 입은 군인들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왔는데 산길이 초행길 같았다. 무성해서였다.

한참을 산을 둘러가니 물이 펑펑 나오고 계단이 이어지는 지점이 나왔다.  

쉬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정상이 나왔다.

오후 3시.

한 시간 걸렸다.


사진 한 장 찍고 옆 절벽 바위로 가는데 누군가 그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기 바다가 보여."


설마. 서울에선 웬만한 산에 올라가면 저 너머 한강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금강이 보일 리, 서해가 보일 리 만무했다.  

배낭에 넣어간 의자를 꺼내 조립했다.

의자를 펴고 앉아 영양바를 씹으며 셋 중 내가 산 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식사 때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산 아래 풍경보다 책 속의 문장들이 더 시선을 끈다.


모자를 썼지만 땡볕이었다.

옆에 보이던 능선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무성해졌나 싶었다.


까마귀 한 쌍이 아주 가깝게 산 아래에서 횡으로 날아갔다.

다정한 것들을 보면 살짝 샘이 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접어 넣었다.

35분이면 지금까지 중 최장시간 머물렀다.


뒤를 돌아보니 제단 뒤 태극기가 펄럭인다.

사진 한 컷을 찍었다.

펄럭이던 태극기가 사진 속에서 정지됐다.

나는 시간을 잡아챈 걸까?


정지한 태극기


의자를 접어 위로 올라갔다가 방금 앉았던 곳이 전에 늘 앉았던 곳이 아님을 알았다.

가려다 말고 다시 절벽 위 바위로 갔다. 그곳에선 늘 바라보던 능선이 보였다.  


이걸 구분하지 못하다니


훨씬 안정적인 그 바위 위에는 나무그늘이 있었다.

다시 의자를 조립해서 펼쳤다.

그리고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었다.

딱 좋았다.

다음엔 독서하러 산에 올라와야겠다.

책이 정말 흡입력이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갑자기 꿈이 기억났다.


엄마가 옷을 사는 꿈이었다.

이것저것 옷을 사시는데 나는 옆에서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골라서 입어본 보랏빛이 섞인 패딩 점퍼는 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얼굴이 밝았다.

지금의 나보다 열일곱 살 젊은 엄마.


꿈이 떠올랐는데 눈물이 흘렀다.


아침에 큰고모께 용돈을 부쳐 드렸다.

얼마 전 학생에게 2인분에 만사천 원짜리 국밥 사주러 가다가 아무도 없는 30km 구역에서 신호를 못 보고 지나가다 놀라서 섰다. 교통신호는 칼같이 지키는데 정말 안 보였다. 얼마 후 13만 원짜리 벌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착한 일을 했다가 왜 벌금을 낼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벌금 낼 돈으로 용돈을 부쳤다.

벌금은 나중에 내도 되지만 오늘은 어버이날이니까.

그래서 꿈에 엄마가 나오신 걸까.

평소에 잘 나오지 않으시는데....... 산소에 다녀왔다고 기뻐하신 걸까?


4시가 되자 일어났다.

나뭇잎은 무성했지만 향국암까지 25분.

무상사 2km와 향한리 0.9km 갈래길까지 10분.

더 먼 산길을 넘고 넘어 5시가 막 넘을 때 산에서 빠져나왔다.

산에서 2km를 30분에 주파한 건 평지와 다름없는 속도니 잘 넘은 편.


하산길에 아무도 없더니 차가 가득하던 주차장엔 두 대만 남아있었고 뷔나는 세 시간 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쭉 달려 집으로 왔다.

배낭을 차에 놓고 콩이와 다시 한 바퀴를 돌고 왔다.

둘이 걸을 땐 콩이가 내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주니 나도 자전거 속도를 늦춰 콩이가 따라오기 쉽게 해 준다.


그러고 보니 밥도 안 먹은 채 산을 넘었네.

날이 빛나서 숲이 무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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