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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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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y 20. 2024

thanks Greenhouse Music room

비닐하우스 음악실에 감사합니다


산책길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2년 전 담양에서 단풍나무로 기어올라가는 찔레꽃가지를 못 알아보고 낫으로 댕겅댕겅 잘랐던 기억이 납니다. 싫어하는 나무조차 구해주려 했던 마음 때문에 단풍나무가 정면에 보이는 집에 가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 눈만 뜨면 거슬릴지언정 그 나무를 잘라낼 수는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나무 자체는 죄가 없으니까요.


찔레꽃 향기를 맡아보고 개천으로 떨어진 찔레꽃잎이 예뻐 사진을 찍으려고 몸을 숙였을 때 그 옆에 똬리고 있는 뱀을 보았습니다.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뱀은 자고 있던 걸까요, 죽은 척한 걸까요?

대낮이라 그늘까지만 산책을 하고 돌아옵니다.

콩이는 이제 목줄이 없어도 돌아가자고 손짓하고 몸을 돌이키면 저만치 갔다가도 돌이켜 옵니다.


숨은 뱀 찾기


때아닌 봄달에 전기요금 폭탄을 맞고는 음악 트는 것도 절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초저녁 산책을 나갔더니 비닐하우스에서 제가 늘 듣는 KBS CLASSIC FM이 나옵니다. 그 비닐하우스에서는 온종일, 심지어는 밤새도록 라디오 토크쇼가 나왔었습니다. 그동안 식물들이 잠도 못 자고 정말 괴롭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닐하우스에서 며칠 전부터 클래식이 나옵니다. 아마도 앞집에 이사 온 제 영향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조용한 시골에선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거든요. 일 년 넘게 창을 타고 넘어간, 제가 튼 음악이 마을 식물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제 마음은 기쁩니다. 어쩌면 그집 자녀들이 알려준 주파수일지도 모르겠네요. 클래식 음악 듣는 식물이 잘 자란다죠? 저 또한 산책길에서 음악을 스쳐갈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마을의 오월


시골에 와서 보니 오월이 돼야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동산 아래 텃밭은 어찌나 예쁘게 가꾸었는지 다른 마을에서 틈틈이 와서 농사짓는 것으로 보이는 나이 든 부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어제는 두 분이  창고 같은 가건물에 벽채를 덧대더군요.


오늘은 드디어 논에 못자리가 등장했습니다. 개구리가 개굴개굴 신나게 울어댑니다. 4년 전 원주 5월의 밤이 기억납니다. 지난 가을 겨울 슬며시 마을에 들어와 땅을 갈고 농막을 지은 어느 집은 어느새 온실과 집 둘레를 꽃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작고한 시인 기형도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지만 저는 질투하지 않습니다. 질투란 비슷한 처지일 때 하는 겁니다. 지금은 그저 부러운 눈길로 남의 정원을 지나치는 것, 거기에서 그칩니다.


다음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에서 제가 좋아하던 대목입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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