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정돈 기술
초등학교 때 나는 책상 서랍을 자로 잰 듯 정리했었다. 맨 윗 서랍을 열면 연필, 지우개, 자, 메모지 등등 문구류가 정리돼 있었는데, 어느 날 열면 연필 한 자루가 비뚤어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내 서랍에 손댔지?"
"어떻게 그걸 알았지? 귀신같네."
동생들은 언니의 면밀함과 뒤따르는 호령에 다시는 서랍 열 생각을 못 했다.
중학교 때 충격적인 사건으로 모든 생활에 일제히 균열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교복 자율화가 되자 방에 옷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 번 입은 옷을 다음 날 또 입을 순 없고, 빨기엔 아까워 쌓다 보니 산더미처럼 되었다. 어쩌다 맘먹고 치워도 며칠 후면 다시 처치곤란이었던 옷들. 마음이 무너지면 생활도 엉망이 된다.
2021년 5월, 정리수납컨설턴트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나는 내가 정리정돈을 체질적으로 잘하는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원래의 나를 되찾았다.
내 경험과 체험에 의하면 그 사람의 방은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보여준다.
수집벽이나 잔걱정이 많은 사람은 물건을 정리하지 못한다. 언제 그 물건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기억과 추억 때문이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누가 준 것, 어떻게 한 것 등등. 아니면 나중에 쓸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준비 혹은 불안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면 정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그게 아니라면 정신 건강의 문제다.
위생개념이 부족한 사람은 쓸고 닦을 줄 모른다. 쓰레기가 쌓여있어도 치울 줄 모른다. 그게 보이지도 않고 치울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흔히 써먹는 '바빠서'란 이유가 제일 큰 비중일 것이다.
그런데 방이 어질러져 있으면 먼지 때문에 건강에도 나쁘지만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쌓여 있는 물건이라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안다는 사람치고 그 물건을 찾기 위해 이 물건 저 물건 들어다 놓았다 하지 않을 재간이 있는 사람은 없다.
많은 물건으로 허덕이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지난번 한강 자전거 순례 후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내리기 전 역에서 어떤 여자가 타서 막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짐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자기 자리 앞과 물건 거치대까지 물건을 쌓아 놓는데 이미 그 사람의 정신없음과 분주함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기운이 내게 미쳤다.
'나도 평소에 저렇겠지? 저러지 말아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역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역시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기차에서 간신히 내리고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선반 위에 고이 둔 헬멧을 놓고 내렸음을 알아차렸다. 그때의 절망감이란....... 서둘러 역무원에게 사실을 알리고 다음 역에 연락해서 다시 그 역으로 갖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역으로 가 헬멧을 찾았다.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정신없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향을 받는다. 바쁜 사람 곁에 있으면 덩달아 조급해지고, 불평불만과 험담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정리정돈이 안 된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수선함이 전이된다.
어제 뷔나의 생일이라 (졸업식도 아닌데)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모처럼 식욕이 생겼지만 일부러 식당에 갈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는데 그 앞에 있던 중국집이 보였다. 평소에도 보던 곳이라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조리사들이 조리모를 쓰고 뒤꼍에 나와 있었다. 책을 반납하고 그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이사 온 지 14개월 만에 처음 가보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미지근한 짜장면은 플라스틱이 아닌 도자기 그릇에 담겨 나왔고 모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조리모 덕분이었다. 조리모를 쓴 요리사가 만든 음식에는 적어도 머리카락은 안 들어갈 것이다. 두 달간 요리를 배울 때, 평소에는 조리복에 앞치마만 하지만 시험 볼 때는 반드시는 조리모를 써야 했다.
평소 같으면 위생 상태 때문에 중국집에 들어갈 때 망설였을 텐데 조리모를 쓰는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조리모란 정돈된 요리의 기본자세를 의미한다.
그 영향이었을까? 다시 정리정돈과 비움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푹 자고 또 자서였을까?
드디어 장롱 서랍을 열었다. 지난가을부터 반년 넘게 방치돼 있던 서랍. 계절도 바뀌겠다 한 번 뒤집어 정리해야지 해야지 했지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컨트롤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엇은 무언의 압력을 계속 가한다.
뒤집어엎고 차곡차곡 개서 넣을 수 있는 기력.
서랍에 옷을 계속 쌓아 밀어 넣으면 아래에 뭐가 있는지 다 뒤집어야 찾는다. 정리해 두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내 경우는 먼저 바지 칸을 정리했다. 개수가 상의보다 적기 때문이다.
일단 서랍의 내용물을 모두 바닥에 꺼내 놓는다. 그리고 물걸레로 서랍 안쪽과 틀을 닦는다. 물티슈를 사용하면 액체 찌꺼기가 남는다. 예상보다 많은 먼지가 닦인다.
겨울 바지는 뒤쪽에. 두꺼워서 말지 않고 반 접어 일자로 펴서 담는다.
춘하추 옷은 앞쪽에, 얇은 옷은 말아서 위에서 보이게 정리한다.
정리정돈 청소할 때 능률이 오르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좋다. 전기요금 폭탄의 좋은 영향으로 거실에 온종일 틀어놓는 음악 대신 방 안 내 가까이에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와 휴대폰을 연결했다. 어쿠스틱 인디음악 등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정리작업에 흥이 난다.
한숨 돌리려고 다용도실을 손댔다. 지루함을 해소하고 먼 목표 사이에 자신감을 충전한다.
창틀에 올려놓은 나비금옥 소국을 가지치기해 주고, 박스를 정리하고 기존 위치를 바꾸니 공간을 두 배나 넓게 확보했다. 재활용함도 따로 만들어 비닐을 버릴 때도 차곡차곡 버리면 공간을 절약할 수 있다. 쇼핑백을 크기 별로 정리하고 비닐을 검정과 흰색으로 나눠 정리해 담는다. 바닥을 비로 쓸고 손걸레로 깨끗이 닦았다. 슬리퍼 없이도 발 디딜 수 있을 만큼 깔끔한 다용도실을 보니 자신감이 붙었다.
참, 몇 주 전에 마련한 기다란 빗자루는 최근 한 소비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나는 보통 샤워하면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그 물에 손빨래를 하고, 그 물로 계단 청소를 한다. 묵직한 스테인리스 대야로 물을 퍼다 현관과 계단에 몇 번이고 부으면 힘이 들지만 기분이 말끔해진다. 그런데 공사할 때 수평이 덜 맞았는지 현관 앞에 늘 물이 고여있었다. 그동안 주인집 플라스틱 마당비를 가져다 물을 쓸어내려갔는데 자루에 담긴 물이 몇 번 팔에 쏟아지면서 마당을 지나다니는 온갖 들짐승들이 옮길 세균이 떠올랐다. 자주 쓸 요량이면 내 것을 마련해도 되겠다 싶어 이사 온 지 일 년도 넘어 큰맘 먹고 사러 갔다.
동네 마트에 있는 단 두 가지 중 1,550원 더 비싼 걸 골랐는데 그 12,550원의 효용가치는 매우 높았다. 일단 하얀색이 시각적으로 깨끗했고 바닥에 쓸리는 느낌도 부드러웠다. 청소 도구가 마음에 들면 청소를 자주 하고 싶어 진다. 나는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쓴 후 물로 깨끗이 세척해서 새것처럼 말려놓는다. 그럼 늘 처음 쓰는 것처럼 기분이 산뜻하다. 그리고 이물질이 없으니 실제로도 위생적이다.
다음은 상의 칸을 정리했다.
옷을 정리할 때는 상하로 쌓지 말고 위에서 볼 수 있게 가로세로로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찾는 옷을 바로 꺼내 입을 수 있다. 상의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속옷과 양말 서랍이었다.
일단 맨 위 서랍에서 내용물을 다 바닥에 꺼내놓았다.
그리곤 커피에 우유를 타서 컵을 들고 산책을 나갔다. 바람 쐬며 중간 휴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콩이와 동네 한 바퀴 돌려는데 반의 반쯤 갔을 때 빗방울이 떨어졌다. 뛰었다. 커피만 타서 나가면 비가 오니 습도와 커피 마시고 싶은 심리의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다시 정리 시작.
잠옷과 속옷과 양말과 손수건은 수첩에 개수를 적으면서 정리해 보았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기록은 불필요한 소비 욕구를 막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소품을 정리할 때는 항상 접어 넣는다!
양말은 삼등분으로 접어 양말 목에 발끝을 넣는다.
팬티도 가로 삼등분 세로 삼등분 접어 허리선에 넣는다.
스타킹도 접고 접어 발 쪽을 허리 쪽 구멍에 넣는다.
모두 위에서 볼 수 있게 쌓지 말고 가로로 정리한다.
색깔별로 정리하면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서랍 위와 거는 옷 사이 공간을 정리한다. 이곳에 막 쌓아놓으면 은근히 지저분하다.
참, 버릴 옷은 망설이지 말고 버린다.
이번에 안 입는 운동복과 낡은 속옷을 몇 벌 비울 수 있었다. 점점 더 비울 예정이다.
이렇게 옷장 정리정돈 마무리.
내 경우는 시작부터 중간까지는 깔끔하게 잘하는데 항상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다. 작업 후반에 가면 기운이 달려 막판 정리를 못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마무리다. 왜냐하면 마무리를 해야 비로소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만약 당신이 확실한 청소 효과를 보고 싶다면 창틀을 추천한다.
모든 서랍을 정리하고 옷장에 걸린 옷들을 계절과 색깔 별로 정리해서 걸고 난 후, 손걸레로 바닥을 싹 닦는다. 밀대로 미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게 먼지를 닦아낼 수 있다. 그다음 걸레를 깨끗한 쪽으로 접어 창틀을 닦는다. 먼저 창틀 턱과 실리콘을 닦고 바닥 홈을 닦는다. 그럼 놀랄 만큼 시커먼 먼지가 묻어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잠잘 때 호흡기로 들어올 먼지를 싹 잡아내면 개운하고 안심이 된다. 자연히 건강해진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이 더 건강해진다.
만약 지금 정리 정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신을 긍휼히 여기기를 권한다.
심리 상태가 무너지면 정리 정돈할 에너지가 없다. 아니까 이해한다.
얼마나 힘들면 정리를 못할까? 이렇게 먼저 자신을 위로하자.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조금만 힘내자,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자.
오늘 못 하면 조금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도전해 보시라.
정리 정돈하면 비우게 된다. 비우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깔끔한 공간에서 반듯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웃음 띈 미래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