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강태완 추모
산본역에 내리자 흰 눈이 폴폴 내렸다.
장례식장을 찾아 지하 복도로 들어섰는데 마침 아는 얼굴과 마추쳤다.
그이가 밴드 붙인 내 손을 보고 물었다.
"혹시 화상 입으셨다는 분이세요?"
어떻게 안 것일까?
아담한 빈소 영정 사진 앞에
흰 국화를 놓고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렸다.
일어나 마주한 어머니의 손은 따뜻했다.
어머니 옆에 외국에 있다던 누나가 서 있었다.
접객실에는 고인의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상장과 사진이었다.
제30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과 전태일 평전도 있었다.
고인이 대학교 2학년 때 전태일 이소선 장학금을 받고 사 본 책이었다.
그의 작업복 옆 모니터 속에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0월 19일에 촬영한, 아래 영상의 고인 분량 풀영상이었다.
다섯 살에 한국에 왔으니 고인에게 한국어는 모국어였다.
https://youtu.be/_CI-cSPTZDY?si=kvsdr-6_xq5LKtDj
내 옆에는 조근조근 설명해 주는 그이가 있었다.
두 주 전 전주 전북도청 앞에서 그이가 고인과 중학교 때부터 친구라고 해서 진짜 동네 친구인 줄 알았다.
명함을 받아 들고 그 안에 새겨진 글씨, 박사를 보고는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왜? 이주노동자랑 박사랑 친구일 수도 있지 왜 아니라고 생각해?"
내 편견을 질책했다.
그이의 이름은 아주 먼 옛날 한남동 산동네 외가에 가면 막내이모 방 책꽂이 꽂혀 있던 프랑스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작가 이름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빈 방에 서서 그 소설을 다 읽었다.
아마 그 책이 내가 맨 처음 읽은 긴 분량의 외국 소설이 아니었을까?
그 작가랑 같은 발음의 이름을 가진 이가 박사 논문을 쓰던 시절,
군포에서 2년 간 함께했던 어머니와 고인.
모자는 한국에서 '없는 사람처럼, 신호등 빨간 불에 건넌 적 한 번 없이' 살았다고 한다.
왜 아니었겠나.
언제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쫓겨날 수 있었기에,
정말 착하게 살았던, 착하게 살 수밖에 없던 이주 아동, 소년, 청년이었던 고인.
고인은 체류 자격을 위해 자진 출국해서 몽골에 갔다와야 했고,
국적 취득을 위해 전라북도 소재 회사에 취업했고 애사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취업 후 체류증을 받자 운전면허증을 취득해서
사고 일 주일 전에 소원이었던 엄마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던 고인.
회사로 돌아가면서 크리스마스에 오겠다고 인사하고 갔다는데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2024년 11월 8일이었다.
사고 원인을 고인의 '애사심과 책임감'으로 돌린 회사의 책임을 통감하는 공식적인 사과와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요구하며 35일이나 미뤄진 장례.
12월 10일, 유족과 회사는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회사는 책임을 통감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회사는 사과문을 작성해 홈페이지에 올리고, 2024년 12월까지 게시한다.
-회사는 행정청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되, 특히 다음과 같은 유족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긴급 정지 기능 등 우선 개발 및 적용, 장비 운용 시 충분한 안전 공간 확보, 유족이 지정하는 대리인에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대한 확인)
-회사는 산재신청과 관련해 적극 협조한다.
-회사는 소정을 합의금을 유족에게 지급한다.
고인은 약속대로 크리스마스 전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비록 애통하게도 갈 때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의 장례식장엔 어머니도 누나도 있었지만,
어머니 곁에 늘 함께였던 친구가 있었다.
(아침까지도 관련 기사를 취합하다가 내 글을 읽었다던.)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소망했던 대학생 친구처럼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연구하고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친구가.
대화가 끝나갈 무렵,
어느새 내 앞에는 모니터 속 태완과 그의 친구 사강이 함께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