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0 화 상주 상풍교~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70km
2025년 5월 20일 화요일 상주 상풍교~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70km
5월이 되었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요즘 웬만해선 약속하지 않는데 한 주 전에 미리 전화를 해버렸다. 걱정돼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려온 소현숙은 어떤지 옥상에 혼자 남은 박정혜는 어떤지.
5월 20일 화요일, 새벽 한 시에 눈을 떴다. 주말에 누적된 피로에 전날 전주 전북지방환경청 월요 미사와 저녁 피케팅으로 지쳐 쓰러진 밤잠 이후였다. 새벽에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자전거 뷔나 앞에 달 가방은 그냥 들기에도 무거웠다.
새벽 네 시 반쯤 한 시간이라도 자려고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반쯤 일어나 밥을 지었다. 큰고모가 사 보내주신 냉동 불고기는 전날 해동해 두었다.
오전 열한 시쯤 아점 먹는 내가 새벽 여섯 시에 불고기덮밥을 먹었다. 이런 날은 잘 먹어두어야 한다.
새벽 여섯 시 반쯤 집을 나섰다.
한 시간여 후 대전 주차장 도착. 주차 후 자전거를 꺼내 1.5km 타고 대전역으로 이동.
08:06 김천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 뉴스에서 오늘 낮 기온 대구 30도가 넘어간다고 했다. 오늘의 목적지 구미는 대구와 가깝다.
08:56 김천 도착
09:14 상주행 기차로 갈아탔다.
09:53 도착한 상주역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나무 깔린 레일을 건너 출구로 나와 역을 벗어났다.
망설이지 않고 자전거를 접어 택시에 올랐다. 시골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도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15.5km를 달린 30분 후 기사님도 모르시던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상주역에서 보통 상주보로 가지, 11km 위에 있는 상주 상풍교까지 오는 손님은 별로 없나 보다.
상주 상풍교~상주보 11km
10:35 상주 상풍교에서 출발.
낙동강 따라 내리막 길이라 순탄할 줄 알았는데, 경천대 부근에 깔딱 고개가 있었다. 당일 인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외국 남자 둘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성능 낮은 자전거에 무거운 짐까지 실은 나는 경천대에 올라가 전망을 볼 여유가 없었다. 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전조등을 장착하지 못했으니까.
11:30 하지만 도남서원(道南書院) 앞에선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06년(선조 39)에 창건하여 1676년(숙종 2)에 사액이 되었으며 1797년(정조 21)에 동·서재를 세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다가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1992년 향토 유림에서 강등 등 일부를 건립한 데 이어 경상북도 지원으로 동·서재를 복원, 2002년부터 유교문화 관광개발 사업으로 정허루, 장판각, 전사청, 영귀문고직사, 일관당, 입덕문 등을 건립했다는, 거대한 서원에서 조선 시대 학자들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그들이 이끌어갔을 그 시대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상주보~낙단보 17km
11:40 상주보 도착. 깔끔한 건물 안 화장실을 이용하고 바나나와 단백질바를 먹었다. 인증센터는 정기휴일이라 사람이 없었다.
다시 달렸다. 그간 말랐던 논에는 물이 차올라 있었고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모를 심고 있었다. 지난 세월호 참사 11주기 추모 자전거 순례 르포를 읽고 보내온 곡성 공룡의 문자가 떠오른다.
‘이제 모가 쑥쑥 자라나겠지요
모는 새소리 개구리 소리를 듣고 논으로 나갈 시간을 아는 듯합니다’
낙단보~구미보 19+4=23km
13:26 낙단보에 도착했으나 공사 중이라 인증센터까지 다리를 건너가진 못하고 길가 임시 책상에서 인증 도장을 찍었다. 30미터 반경에 부스가 없어 사이버 인증은 되지 않았다.
길은 비포장도로로 이어졌다. 자전거도로인데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오른쪽으로 추월해 앞에 가 좌회전해 서더니 후진해서 다시 나를 지나쳤다. 운전석은 보이지 않았으나 창 내린 조수석에 앉은 눈이 노란 남자 얼굴을 보았다. 지난 희망 뚜벅이 때 입고 걸었던 ‘한국옵티칼 고용승계 국회가 나서라’ 몸자보를 보고 궁금해서 좇아온 게 분명했다. 앞면에는 ‘박정혜·소현숙 이겨서 땅을 딛도록!’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 자에는 옵티칼 배지를 달았다.
소현숙 조직부장은 희망버스 다음 날인 476일째 극심한 치통과 체력 저하로 내려왔다. 혼자 남아있는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제일 걱정이지만 피치 못하게 내려온 소현숙 동지도 걱정된다. 더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하고도 명예롭게 내려오지 못하고 미안해하며 내려와야 했던 그이의 심정이 어떠할까. 생을 걸고 투쟁한 그이와 먹튀기업 니토덴코를 싸잡아 ‘사죄’라고 명명한 표어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햇볕이 따가웠다. 그래도 열심히 달렸다. 낙단교 부근에 오른쪽으로 식당들이 보였으나 굶을 생각에 지나쳤다. 그런데 옆으로 다리를 두 개나 더 지나며 2km 직진하니 웬 차 한 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길은 모르고 휴대전화기 지도 앱은 열리지 않고 날은 덥고 물어볼 사람 한 명 없으니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땡볕에 왕복 30분을 허비하고는 하는 수 없이 지나쳤던 식당 중 2층에 올라갔다. 주인에게 길을 물어보니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친절한 응대가 고마워 비빔밥을 한 그릇 시켰다. 육회 비빔밥에서 육회는 빼고.
오후 두 시. 한산한 식당에서 달걀프라이도 없는 채소 비빔밥에 된장찌개로 식사했다. 20분이면 밥을 먹는다. 앞으로는 그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14:20 낙단교 건너 자전거도로에 올랐다.
14:31 구미시 진입
금계국이 양 옆으로 가득한 자전거 길과 오른쪽 아래로 펼쳐진 습지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경관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태양은 뜨거웠고 나는 금세 지쳐버렸다. 자전거 타는 내가 이렇게 더운데 옥상의 박정혜 동지는 얼마나 더울까. 5월에 더위가 와 버렸으니 앞으로 여름을 어떻게 날까. 작년엔 얼린 생수병을 껴안고 버텼는데 그 여름을 다시 맞아야 하는가. 더위 걱정이 폭염 공포로 바뀌는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했다.
구미보~자하헌자전거휴게소~한국옵티칼하이테크=12.5+5.6=18.1km
15:51 구미보 도착
편의점이나 가게 하나 없는 낙동강 길은 뜨겁고 길었다. 그사이 나는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한 손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강 가운데 있는 사무소 전망대도 300m 더 가야 하니 강변 자전거 휴게소 달궈진 의자에 뻗어버렸다. 잠시 후 역시 나처럼 지친 남자분이 땀을 뚝뚝 흘리며 뜨거운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분이 혼자라서 그랬을까 길을 물어보았다.
“저어, 제 휴대폰에 지도가 보이지 않아서 그러는데 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어디 가시는데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요.”
“22km 남았는데요.”
“아흑. 아직도 멀었네요. 낙동강 길 처음 오는데 어떻게 편의점 하나가 없어요?”
“예, 이 길 쉽지 않아요. 10km쯤 가면 휴게소가 하나 있어요. 신식건물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어요. 그리고 장거리 갈 땐 짐을 가볍게 하셔야 해요. (타이어에) 바람도 빵빵하게 넣고.”
“고맙습니다.”
먼저 온 내가 앞서 출발했다.
16:20 자전거 도로 옆에 충전소와 주유소들이 모여 있었다. 막 갈아놓은 밭 사이 고랑을 살금살금 가로질러 주유소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 지친 행색에 들고 있는 물병을 본 주인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가라고 했다. 정신이 없어 온수를 받으려고 하니 주인이 냉수를 받으라고 했다. 물통에 물을 잔뜩 채우고 염치 불고하고 커피가 있느냐고 물었다. 체력이 고갈되고 있는 몸에 카페인이 필요했다. 옆 충전소에 가서 물어도 없다고 했다.
비척비척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도 강렬한 햇살 아래 피어나는 오월의 강변 풍경을 놓치지 못하고 군데군데 서서 사진을 찍으며 가는 둥 마는 둥 빌빌대는 사이, 아까 구미보 인증센터에서 뵌 아저씨가 추월해 가셨다.
“한참 더 가셔야 해요.”
그랬다. 씽씽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보며 내 자전거 뷔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게다가 앞에 매단 가방도 얼마나 무거운지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잘 게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 뚱뚱한 가방을 달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이면 500일 되는 고공농성. 옥상 위 박정혜 혼자 외롭게 두지 않으려고 침낭과 베개, 갈아입을 옷까지 터질 듯 넣은 가방은 여름을 방불케 하는 5월 한낮의 자전거 주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짐을 줄여 무게를 가볍게, 비움실천의 가장 큰 적은 자급자족하려는 자세와 개인용품을 포기하지 못하는 위생개념에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게에는 소현숙 동지에게 줄 선물도 들어있었으므로 나는 고행 끝에 선사할 내 진심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길이었다.
17:11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아저씨 안내대로 현대식 건물에 자전거 휴게소라고 쓰여있었다. 길 위에 자전거를 두고 급경사 길을 내려갔다. 냉장고에서 카페라테와 평소에 마시지 않는 콜라와 이온 음료, 세 캔을 꺼냈다. 무인 가게인 줄 알고 바코드를 찍는데 주인 여성이 들어오셨다. 평소 마시는 브랜드가 아니었는데도 카페라테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작년 9월에 동해안 부곡 터미널 부근 편의점에서 만난 로드바이커가 탈진 상태에서 마시라고 알려준 비책, 콜라까지 마시고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9km는 더 가야 하는데 5.6km 사잇길이 표시되었다. 요호.
17:40 금오공과대학교를 끼고 동산을 넘어 도로로 나왔다. 저 멀리 아파트가 보였지만 길을 건널 줄 몰라 반대 방향으로 갔다. 하는 수없이 카센터에 들어가 길을 물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돼요?”
“니토요?”
주인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본사가 일본 회사인 니토덴코임을 알고 있었다. 알려준 길은 간단했다. 역주행 방향으로 찻길 따라가면 되었다.
사람 사는 동네로 나오니 교차로에 파란색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저만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출발부터 사진으로 소식을 전한 이지영 사무장에게 전화했다.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고. 사무장은 외부에 있고 공장엔 지회장이 있으며 저녁에 대선 후보가 온다고 했다. 평소 SNS를 하지 않으니 늘 소식에 어두워 전혀 몰랐다.
지난가을 부산에서 구미까지 160km, 올겨울 구미에서 서울까지 350km 걷는 동안 한 번도 오지 않던 정치인 중 마지막 날 참여한 한 명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필 내가 고공농성 500일을 함께 맞으려고 499일째 자전거 순례하는 날. 순수한 순례가 정치 행보와 같은 날 겹치니 맑고 고운 옹달샘물에 커피믹스 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낯가림에 상관없이 제발 누구라도 와서 보고 느끼고 알려야 하는 고공농성이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고공의 시간은 하루라도 짧아질 것이다.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넘었는데 금방일 줄 알았던 산업단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에서 건너 트럭 운전사께 공장 위치를 물었다. 순간 왼쪽 종아리 근육이 수축하며 경련이 일었다. 땡볕에 영양보충제 하나 없이 달려온 70km. 탈진 직전이었다.
마침내 양포교가 보이자 우회전했다. 지난 2월 7일, 북풍한설에 길을 나섰던 희망 뚜벅이가 떠올랐다. 다시 좌회전해 인도로 접어들자 눈시울이 왈칵 더워졌다. 그 길 위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부채로 얼굴 가리고 걷던 박문진과 김진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하 10도 엄동설한이 영상 30도를 웃도는 초여름으로 변한 석 달 만에 그 길을 거슬러 가는데 고공의 박정혜는 아직도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18:27 마침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도착.
불탄 공장 텅 빈 주차장을 자전거로 돌았다.
“박정혜 동지, 박정혜 동지.”
불러도 옥상 위에 사람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순례의 당사자 박정혜와는 인사하고 싶어서 사무장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린 것이었다. 아마도 종일 달궈진 텐트에 기진맥진 누워있을 테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노조사무실 쪽으로 갔다. 사무실 앞에 최현환 노조위원장과 여성분이 서 있었다. 오른손을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멋지게 구호를 외쳤어야 했는데 당시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반갑기만 했다. 자전거에서 하차하고 두 팔 벌려 최현환에게 갔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어디선가 신유아 문화연대활동가가 나타났다. 그이는 불탄 공장에 인형들 텐트를 만들고 있었다. 고공 위 박정혜가 외롭지 않게 인형들이 함께 있었다.
지회장이 가져다준 냉수를 마신 후 땀에 절은 얼굴과 쉰내 나는 몸을 씻어야 하는데 노조사무실 화장실 세면대엔 본사 측 단수조치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변기 물도 폐수라 변기 안이 불그죽죽 변색되어 있었다. 생수를 조금씩 따라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와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의기양양 이야기했다. 오는 길에 승용차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내 몸자보를 보고 따라왔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말하면서도 느꼈다. 땡볕에 70km를 달려온 결과치곤 참으로 조촐하다고. 나는 결국 갖가지 원료를 섞어 향신료 한 방울을 짜내듯 노력 대비 극소량의 소산이 나오는 순례를 한 것인가. 하지만 하늘은 내 정성을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그런 게 치성이고 기도다.
저녁 7시가 넘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배현석이 붙이는 파스와 근육통약 스프레이를 가져다주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도 모였다. 특수장비 스카이 차량도 대기했다.
밤 8시에 대선주자 차량이 도착했다. 현수막에는 노랑 연두 주홍색이 섞여 있던데 노란 옷을 입은 후보가 내렸다. 대선 후보가 스카이 차량으로 고공에 올라 박정혜와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와 자서전에 사인을 해주고 선거운동을 하고 갔다. 소란했던 사람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새벽 6시 반부터 운전하고 기차 타고 택시 타고 네 시간 걸려 상주까지 가서 10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8시간 동안 70km 자전거 타고 구미공장까지 온 내 순례와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대선 후보 한 명 온다니 곳곳에서 수십 명이 그 밤에 나와 모였고 실시간 방송이 되었다. 그래서 유명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걸까. 문득 기륭전자 투쟁 때 송경동 시인 부상 이후 포크레인에 올라가 단식까지 한 자신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던 김형우 동지의 말이 기억났다. 하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듯이 어느 누구의 공만으로 무엇이 성취되지 않는다. 크든 작든 각자의 쓰임이 있을 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내 작고 소박한 자전거 순례에 그날 위로가 한 마디 있었으니, 순례 시작과 중간과 끝에 사진을 보낸 보인, 청명, 니키, 지영, 완두, 리현 중 완두의 메시지,
‘예수님은 그대 맘을 아실 것이요!’
그 밤 노조사무실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서 갖고 간 침낭과 베개를 펴고 잠이 들었다. 고공농성 499일째였다.
다음 날 깨고 보니 호텔이 따로 없었다. 전주 전북지방환경청 앞 새만금 신공항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촉구 농성 천막에서 들리던 차량의 굉음과 도시 소음 하나 없이 아늑하고 고요함에 새삼 놀랐다.
고공농성 500일 차, 날은 밝고 기온은 급격히 높아질 듯했다.
새벽 6시 반부터 화장실 청소와 현관 신발과 우산 정리를 하고 창틀의 먼지를 닦았다. 노조원과 연대자의 호흡기 건강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전날부터 주방에 갇혀 탈출을 위해 유리창에 박치기하고 있던 어여쁜 작은 새도 바깥으로 나가게 해 주었다.
저만치 이른 아침에 변기용 물탱크를 채워주는 남자분이 계셨다. 나야 고공농성 500일이 되도록 하루 와서 부산을 떨지만, 그런 분들의 노고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가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전 9시, 대구 KBS에서 고공농성 500일 취재하러 나왔다. 반갑고 고마웠다.
5월 19일 자 한겨레 신문도 고마웠다.
9시 반, 노조원들이 왔다. 새 인형도 왔다.
나는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간 <굴뚝새와 떠나는 정원 일기>를 소현숙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지난 4월 26일 ‘고용승계로 가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희망버스’에서 쓴 편지대로.
희은 동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사양해서 대신 나영 동지가 내 자전거를 타보았다. 잠시 자유를 느꼈다. 정혜 동지도 어서 내려와서 자유롭기를.
오전 10시에 말벌 동지 셋이 왔다.
십 분 후, 오후 3시에 예정된 평택 한국니토옵티칼 앞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지회장 차에 자전거를 싣고 20여 분 걸리는 구미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사무장 전화로 내가 무거운 가방을 두고 왔음을 알았다. 잠시 후 노조원과 사무장이 구미역으로 가방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 자전거 순례가 끝났다.
오전 10시 51분 대전행 기차에 올랐다.
이 이야기를 당일엔 피곤해서 못 쓰고 다음 날인 오늘 쓴다. 5월 22일 오늘은 고공농성 501일째. 510일은 김재중 택시 노동자의 고공농성 최장기일수. 오는 5월 31일이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의 고공농성도 510일이 된다. 6월 1일이면 511일로 성별 불문 국내 최장기 고공농성이 된다.
일본 먹튀기업 니토덴코는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외국투자기업의 횡포와 한국인 노동자들의 피해는 계속될 것이다. 2025년 6월 3일 대선 후면 달라질까. 아니 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