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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겨울답게 나는 법

진정한 친구에 대하여

by 일곱째별


한 달여 전, 절친한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작년에 아빠 돌아가시고 일 년 만에.

짧은 투병생활 끝에 원하시던대로 화창하고 단풍 든 날에 온 가족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누구라도 바라는 죽음을 맞으셨다.

작년에는 영덕에서 강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고를 듣고는 순례 중단하고 시외버스로 포항으로 가서 택시와 기차타고 상경해 지하철 타고 쫄쫄이 복장으로 조문을 했었다.

올해는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주말이라 기차가 없어 가스 냄새 폴폴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 조문을 했다.

구십 대와 팔십 대 후반이셨던 부모님을 여읜 친구는 작년 부친상 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너는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래서 사람은 자기가 당해봐야 알아."


40년 지기 친구와 내 처지가 같게 되기까지 20년에서 40여 년이 걸렸다.

고등학교 친구 모임, 나까지 다섯 중 그 애가 처음이었다.

다들 아직까지도 부모님, 혹은 어머니가 살아계신다.

나만, 나만 그 어린 나이에 엄마를, 그리고 마흔도 되기 전에 아빠를 잃었다.


문제는 그 얼마 전부터 발생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이십 대 중반이었다.

꿈에 그리던 직장을 일순간에 잃고 한창 인기 많던 시절에 오던 연락도 뚝 끊긴 채 생애 최초 무작정 여행을 감행했다. 혼자는 자신이 없어 친구에게 동행해 달라고 했다.


내비게이션은커녕 휴대폰도 없던 시절, 지도를 보고 안동까지 갔더니 어둑어둑해졌다.

친구는 공중전화로 엄마한테 나랑 있다가 하루 자고 다음날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 애 엄마는 난리를 쳤고 친구는 시외버스인가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혼자 무서움에 떨며 헛제삿밥을 먹고 어딘가에서 자고 다음날 청송으로 가서 아는 공중보건의 사택에서 신세를 지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한계령을 넘어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친구가 걱정돼서 전화를 했더니 얼마나 혼이 났는지 한 말,


"우리 엄마가 걔(너)랑 놀지 말라고 했어."


그땐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그런데 잊고 있던 그 말이 최근에 떠올랐다. 친구 엄마가 편찮으시단 소식을 듣고는 더욱 생생하게.

영정사진을 마주했을 때 눈물도 흘렸는데 돌아와선 계속. 살아계실 때도 딸 친구랑은 밥 먹고 가란 말 외엔 대화도 안 하시던 무뚝뚝한 분이셨다. 울 엄마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셨으니 생전에 엄마가 내 친구들에게 하시던 사려 깊은 에티켓을 기대할 순 없었다. 엄마는 내 친구들에게 전화가 와도 존댓말을 하던 분이셨으니까.


속앓이 끝에 상 치르고 나흘째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안부를 묻고 위로를 하다가 급기야는 요즘 힘들다고 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고, 딸 친구가 힘들면 위로해 주고 오라고 해야지, 그렇게 자기 딸만 중요하냐고. 그런 게 가족이기주의 아니냐고. 그 띠 할머니랑 나랑은 안 맞는 거 같다고. 의젓한 친구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달랬다.


며칠 후 초중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에 전화는커녕 문자도 없던 내 전화를 받자 친구는 긴장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너한테 전화 오면 겁나."

"나 00이한테 실수했어."

그리곤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내 친구 엄마들은 아무도 내게 위로 한 마디가 없었냐고, 한동네에서 뻔히 다 알았을 텐데 따뜻하게 대해 준 어른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돌아가신 분의 딸인 친구는 고등학교 때 만나서 내 사정을 자세히 모르실 수도 있었다.)


다른 친구는 말했다.

"네가 허기가 지는구나. 외로운가 보다."

그리곤 그 말을 전한 친구가 잘못했다고, 그리고 그 시절엔 자기 엄마도 시어머니 모시고 돈 벌러 다니느라 우리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 아닌 설명을 했다.


며칠 후 정신이 든 내가 이제 막 엄마 잃은 친구한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문자를 보내자 답이 왔다.

'어려서 나는 널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던 거 같아. 그래서 네가 불쌍하고 늘 안타까운 친구라고 느끼지 못했어. 그저 스스로 길을 잘 찾고 나랑은 다른 길을 가는 친구라고 여겼어. 그건 지금도 그래. 내가 그리 느끼니 주변인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물론 네가 느끼는 결핍은 클 수 있지만 난 느끼지 못할 만큼 당당한 모습의 너야. 네가 갑자기 아기 같은 모습으로 다가와서 당황스러운 내가 몇 자 적어 보낸다.'


또 다른 친구의 문자가 위로가 되었다. 그랬다. 내가 원했던 답이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어린 날 선망의 대상인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게 어느날 속절 없이 무너져내렸던 것이었다.

놀지 말라니,

그런 말은 우리 엄마가 하면 했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었다. 십 년이나 날 보시고도 그런 말을 하신 친구 엄마가 원망스러워서, 엄마 돌아가신 내게 '우리 엄마'가 그랬다는 말을 전한 친구한테 서운해서, 그 말이 30년 후에 기억나 분한 마음과 동시에 나 역시 그동안 누군가에게 그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했을지, 상대에게 직접 하지 않아도 홧김에 한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한으로 남았을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을지, 이래서 불가에서 구업을 짓지 말라고 하지 등등 생각의 사슬이 마음을 옭아매서 힘들었던 한 달이었다.


"우리 엄마가 뭘 몰라서 그러셨지. 내가 널 잘 알잖아. 너는 그런 애가 아니란 걸. 내가 엄마한테 잘 설명할게. 그리고 엄마 대신 내가 사과할게."

그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다. 돌이킬 수 없었다. 아니 그분은 그런 말씀하신 걸 까맣게 기억도 못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 시절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듯 홧김에 하신 말씀이었을 테니. 이후에도 난 그집에 드나들었고 친구 결혼식에 축가도 불렀으니까.


다른 날은 몰라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근래 없이 눈물 뚝뚝 흘리며 성탄 미사에 참석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에게서 메리 크리스마스 문자가 왔다.

어떻게 지내냐고, 방학에 수업은 있냐고,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추우니 감기 조심하고 아프지 말라고.


미안한 마음에 연락 못하고 끙끙 앓던 내게 친구가 먼저 연락을 주어서 고마웠다.

난 여전히 마음 가는 대로 다니고 있고 그 마음은 늘 쓸쓸하다고, 겨울학기는 (4년 만에) 폐강이라고 답했다.



하제마을 팽나무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 영화처럼 흰눈이 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눈보라 치는 나포에 들렀다가 익산 나바위성지성당으로 끌리듯 갔다. 3년 전 도보순례 땐 월요일이라 열리지 않았던 치유의 경당에 들어가 앉자 5년 전 일지암에 처음 갔을 때처럼 통곡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애써 덮어두었던 무언가가 강하게 확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강경성지성당을 지나칠까 하다가 들어갔다. 본당과 김대건 기념관에 들렀다 나오면서 친구에게 답을 했다. 난 여전히 마음 가는 대로 다니고 있고 그 마음은 늘 쓸쓸하다고, 겨울학기는 (4년 만에) 폐강이라고. 내친 김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최근 즉흥적으로 해남, 순천, 벌교, 보성에 이어 나바위성당과 강경성당까지 다시 가보게 되었다. 의도도 계획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세 번째 책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 6년을 되짚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전날 전화 온 걸 못 봤다며.)

40년 지기 친구를 다시 어떻게 볼까 한 달 내 동동거리던 내 근심이 무색하게.

진정한 친구는 그런 존재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끊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르르 풀린 마음으로 마리서사에서 작년 가을에 잡았다 놓았다를 몇 번 하다 결국 못 사고, 다른 책을 사서 팽팽문화제 선물로 나눠준 '새만금 이야기' 대신 올 겨울에 내 품에 들어온 그림책 '농부 달력'을 펼쳐 보았다.


겨울을 겨울답게 난다는 것


거기 내가 원하는 삶이 있었다.


"밥 먹고 읍내에 다녀옵시다." "그러세."


"너희를 위해 남겨 둔 거란다.

겨울은 본디 함께 나는 것이지."


어느새 작은 꽃과 곤충들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나 찾아보슈." "누가 꽃이고 누가 자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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