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순례길 완주 2

20260303 화요일 군북역~말이산 가야 고분군~함안역 17km

by 일곱째별


노동과 구도(求道)


2026년 3월 3일 화요일 군북역~말이산 가야 고분군~함안역 17km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평소에는 아침 식사를 걸러도, 걸을 때는 에너지 비축을 위해 숙소에서 뭐라도 챙겨 먹는데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함안역에서 8시 6분 무궁화호를 타고 8시 12분에 군북역에서 내렸다.

국군복지단과 군북 3·1 기념체육관을 지났다. 군북에서 함안으로 가는 79번 함마대로 역시 1차선 도로에 인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도로공사 중이었다.


9시 27분, 군북에서 함안으로 넘어갔다.

이날의 화두는 ‘노동’이었다. 전날 데려다준 사람의 말이 다음 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와 나눈 이야기와 표정과 분위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예민한 데다 평소 자극이 적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에 모든 현상에 온몸으로 반응한다.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는 것처럼 영상과 소리가 세밀하게 기억되기에 저장 용량이 크다. 그만큼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니 쉬이 지친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고찰은 나쁘지 않았다. 중년 여성에게 이삼십 대처럼 며칠씩 하는 밤샘 작업이나 남성에게 유리한 육체노동 등 물리적 중노동은 무리다. 하지만 이슈와 아이템 선정이나 전체 맥락 파악이나 글쓰기 등 경험치를 활용하는 정신노동은 젊은 세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에게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하지만, 간혹 그들에게서 듣는 지혜로운 조언이나 너그러운 포용은 얼마나 귀한가.


“괜찮아, 잘했어, 밥 먹자, 내가 곁에 있잖아, 잘 자.” 등등의 따스한 말들.


노동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일차적 이유로 필요하다면,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 때의 말처럼 경제적인 노동이 어디 있는가. 소소한 다정함 외에도 결정적인 순간을 파악하는 혜안이나 통찰 등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노동의 폭은 매우 넓다. 정신노동도 육체노동 못지않은, 어쩔 땐 그보다 더 강도 높은 노동이니까.

함안에 들어서자 길가에서 매화꽃 핀 가지를 보았다. 봄이 왔다.

백새마을 왼쪽 길가에 1919년 3월 군북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 조주규, 조석규, 조형규의 묘도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오른쪽 몇백 미터 거리에 폐건물이 된 한국특수견훈련학교가 보였다. 그곳에서 훈련한 개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지금 다른 개들은 더 좋은 곳에서 훈련하고 있을까.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에 눈길이 간다.


우시장, 남문마을을 지나 가야에 들어섰는데 저 멀리 고분군이 보였다. 말이산 가야 고분군이었다. 그때부터 지도에 상관없이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경주 대왕릉보다 아담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고분들은 둥글둥글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 입구를 찾지 못하고 어느 집 밭을 지나 고분으로 올라갔다. 누런 잔디로 덮인 고분들은 동산처럼 봉긋봉긋 연결되어 있었다. 그 능선 따라 올라가는 길이 그리도 푸근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해발 60미터 안팎의 작은 봉우리들이 최대 지름 40.2미터로 물결처럼 흐르듯 줄지어 있었다.


2014년에 유럽 음악가들의 무덤을 찾아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나 체코의 비셰흐라드 등에 갔었다. 그때 인가 근처에서도 무섭지 않은 공동묘지를 보고 한국의 공동묘지와는 다른 문화에 놀라워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무섭지 않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경주나 공주 대왕릉과는 다른 친근하고 다정한 무덤이었다.


말이산 가야 고분군








함안에는 아라가야역사순례길이 있음을 4년 전에 보고 지나갔었다. 다시 오면 가야 고분군에 와보고 싶었다. 그 고분군 사이사이를 혼자 걷고 있는데 다리는 좀 아팠지만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둘레둘레 4킬로미터를 돌고 돌아 아래 함안박물관으로 내려갔다.



부감으로 박물관 뒤편 연못과 조경을 보니 일본 교토에서 본 카츠라 리큐와 슈카쿠인 리큐가 떠올랐다. 작년 2월 일본 친구네 가는 길에 교토의 정원을 탐방할 때만 해도 다음에 누군가와 다시 오고 싶었다. 나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볼 때 늘 누군가가 떠올랐다. 다음에 그 사람과 다시 와서 함께 보고 싶었다. 좋은 옷을 볼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늘.

그런데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에서 알아차렸다. 어제오늘 이틀간의 이번 걸음에서는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음을. 이제 내가 오감으로 느끼는 순간에 나를 생각하지도 않고 곁에 있지도 않은 다른 사람을 끼워 넣지 않았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대로 혼자 즐기고 있었다. 십 대 이후 수십 년 만에 달라진 내 모습이었다. 나는 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았었다.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처럼. 그런데 정말 이제는 아무도 마음에 없었다. 연말연시에 일방 폭격처럼 일어난 혹독한 사건들이 나를 달라지게 했다.

언덕을 내려왔다. 박물관 입구에서야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음을 알았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화요일인데도 휴관이었다.


길 따라가다 보니 예쁜 마을이 있었는데 도동마을이었다. 함안咸安이 한자로 모두 평안하다는 뜻임을 알고는 함안이 좋아졌다. 도동마을처럼 무덤 아래 살면 더 평안할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나는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오전 11시. 엊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공복이라 배가 고팠다. 차에서 조끼를 엎었는지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초코바도 없었다. 사탕 한 알 입에 물고 길을 헤맸다. 도동마을에서 돌아 나와 다시 함안대로를 찾아 2.4킬로미터 걸었다.


정오가 되어 마침내 무진정(無盡亭)에 도착했다. 무진정은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진사시와 중종 2년(1507년)에 문과에 급제한 무진 조삼 선생이 함양 · 창원 · 대구 · 성주 · 상주의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내고, 1542년에 후학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함안면 괴산리에 짓고는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이라고 이름 지은 정자다. 앞 면 세 칸, 옆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 아래 가운데 방 한 칸과 사방으로 뚫린 문이 있다. 방은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크기였다. 1976년에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천천히 보고 또 보고 정자와 호수까지 둘레둘레 무진정을 맴돌았다.



무진정


무진정에서 본 연못


무진정 아래 연못


4년 전인 2022년 1월, 혼자 걷던 첫날 괴항마을 무진정을 보고는 첫눈에 반했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어 그냥 지나치며 속으로 다음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와야지 생각했었다. 함안은 지난 8년 동안 했던 7번 국도와 남도 도보 순례 중 포항 청진의 작은 교회 말고, 누군가와 다시 와보고 싶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순례를 떠날 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예정하지 않기에, 이번에도 혹시 길에서 어떤 인연을 만날지 몰랐다. 그런데 함안에 다시 오면서 혼자여서 참 좋았다. 그렇게 군북에서 함안까지 12킬로미터를 돌고 돌아 17킬로미터나 걸었다.


오후 한 시에 들깨국수와 보리밥으로 첫 끼니를 먹으며 진해에서 가덕도 구간을 이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사흘 전에 보낸 교정 원고의 수정본과 표지 추가 본이 도착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이만하면 됐다. 어차피 남은 구간은 진해·창원·부산으로 이어지는 공단이었다. 포항 남구 청림동에서 형산강까지 포스코 포항제철소처럼 건너뛰어도 되는 구간이었다. 이것으로 남도 순례길을 완주했다. 세 번째 책 <낮고 느린 걸음으로>의 출간을 앞두고 이 정도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이제 나는 정말 홀로 섰다.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벗들을 향한 마음 또한 집착이라면 이젠 그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동안 정말 감사하고 고마웠다고. 지난 8년 동안 그대들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있음만으로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했는지 모른다고. 가장 절박할 때 제일 먼저 찾은 이들이 그대들이었다고. 하지만 이젠 사람 그만 의지하고 하느님만 찾으란 뜻으로 알겠다고. 이 모습이 그대들이 긴 시간 그토록 응원하고 바라던 독립의 모습이라고.

이번에 나는 순례자가 아닌 구도(求道)자로 길 위에 섰다. 앞으로 길 위에서 찾을 그 무언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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