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반드시 '점프업'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 과정을 운동에 비유하곤 한다. 달리기를 할 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비를 넘겨야 그다음 단계의 속도를 내 몸의 것으로 만들 수 있듯, 사업도 당장은 감당하기 버거운 도전을 통과해야 비로소 한 체급이 올라간다.
2012년 당시 나는 10년 넘게 잔잔하게 회사를 운영해 왔다. 중소기업들의 성장을 돕는 일은 충분히 보람찼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갈증이 있었다. 조금 더 디테일하고 규모 있는 시스템, 즉 SI(System Integration) 사업으로의 진출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나의 첫 '점프업 체급 올리기' 시험대는 국내 유수의 금융 신용평가사인 A사의 웹 접근성 개선 프로젝트였다.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를 우리 회사에서 맡은 건 아니었다. 아주 작은 사이트의 웹 접근성을 작업했는데, 이후로 한 번 더, 그리고 이후로 우리 회사에 전 프로젝트를 맡겨주셨다. 물론 공정한 경쟁 PT 역시 치러냈다.
당시 웹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퍼블리싱까지 겸하던 시절을 지나 웹 표준이 정립되었고, 모바일과 앱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012년, 100인 이상 사업장까지 '웹 접근성' 준수가 의무화되자 이에 대응해야 했다. 나는 이 변화를 몇 년 전부터 지켜보며 공부해 왔기에 자신 있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침 웹디자이너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망해도 같이 먹고는 살겠다"는 든든한 마음이 생겨날 무렵이었다. 하지만 10년 차 오너임에도 내 밑바닥에 깔린 자존감은 여전히 낮았고, 이 프로젝트는 그 자존감을 증명해 내야 하는 나와의 싸움과도 같았다.
수주 후의 현실은 처참했다. 이걸 전쟁통이라고 말하면 비유가 적절할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나의 명백한 인사 실패였다. 30여 명 규모의 프로젝트에 들락날락 최종 80여 명이 동원될 만큼 현장은 통제 불능이었다. 이를 핸들링할 역량이 부족했던 나는, 실력을 검증하기보다 당장의 규모를 채울 사람을 찾는 데 급급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프로젝트 매니저(PM)는 학력을 위조한 자였고, 심각한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심지어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어느 날은 그의 담당 의사가 나에게 전화까지 했었다.
8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된 현장에서 그는 조증이 오면 지키지 못할 약속을 고객사에 남발했고, 울증이 오면 분노를 참지 못해 집기를 부수며 고객사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나는 매일 그를 말리고 달래며 현장을 지켜야 했다. 기술자가 아니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었다. 지체상금과 계약금을 생각하면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첫 아이를 유산했다. 슬퍼할 시간도, 몸을 추스를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술 후 이틀 만에 다시 여의도로 향했다. 차가운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퇴근하는 직원들을 붙잡고 현황을 물었다. 이미 우리 프로젝트에 대한 상황이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는 더 찾을 퍼블리셔도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퍼블리셔들을 위해 호텔을 잡고, 인력 수급을 위해 온종일 채용 사이트를 뒤졌다. 내 제정신이 아닌 몰골을 보며 고객사 직원이 건네준 과일 주스 한 잔. 걱정해 주던 그 따뜻한 온기 덕분에 나는 겨우 숨 쉬고 버텨낸 것 같다.
다행히 프로젝트 막바지에 만난 전문 퍼블리셔 팀장의 도움으로 프로젝트는 기적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0개월의 사투 끝에 계산된 지체상금은 2억 원이 넘었다. 이것은 경영적 수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사인 A사는 지체상금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셨다. 감당하지 못할 리스크를 자초한 대형 사고를 고객사의 믿기지 않는 선의와 천운이 덮어준 셈이었다.
이 프로젝트 중간에, 나의 박선옥(지금 20년 차 근무 중)도 너무 힘들어 퇴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둘은 여의도 한 커피숍에 앉아 울면서 서로를 달래고 의지했다.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다. "나를 믿지 못하느냐. 나는 너를 믿는다..." 우리는 서로를 믿었고, 의지했고, 결국 프로젝트 마무리까지 함께 했다. 마지막 문서를 작성하고, 나에게 "대표님 끝났습니다" 하고 다가오던 선옥 부장의 얼굴이 생각난다. 결국은 끝냈다. 해냈다.
이 '힘들었던 레퍼런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금융권과 대기업의 연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의 이름 앞에 '금융권 전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프로젝트의 단위 자체가 달라졌다. 에이전시에게 레퍼런스는 단순히 포트폴리오 한 줄이 아니다. 그 프로젝트는 회사의 존폐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이름 있는 레퍼런스를 하나 해냈고, 이후에도 종종 고객사는 몇 개의 사이트를 의뢰해 왔다. 엉망진창으로 해냈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업무를 주셨던 A사 여러분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어요.
나는 턱끝까지 숨차게 만들었던 이 프로젝트로 첫 아이를 잃었다. 축하할 새도 없었고, 밤새 눈물에 베갯잇을 적신다는 말의 경험도 해봤다. 대신, 평생을 함께 갈 동료를 얻었다. 나의 평생 반려 직원인 박선옥 부장과 더욱 단단해졌고, 그녀는 그 이후로도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근무 중에 있다. 우리는 지금은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안다. 내가 유일하게 회사에서 눈치 보는 직원 중 하나다.
나는 생각해 본다. 점프업이란 무엇인가... 아주 처음, 내가 첫 글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건 내 욕심에 의한 선택이다.
나는 그 프로젝트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대신,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준비되지 않은 성장은 독이며, 점프업은 기회가 아니라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선택이라는 것을.
나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