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格)의 옷을 입히다
협회에 참여한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회사소개서 작성'이었다.
이전까지 나의 영업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고객에게 견적서를 보내며 이메일 본문에 몇 줄 적어 넣는 '간단한 회사 소개'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웹 디자인 학원을 수료하며 배운 포토샵 실력으로 사업계획서를 직접 작성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보는 감각은 자부하지만, 그것을 비즈니스 문법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참 미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내 손으로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혼자 만들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내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시각화해 줄 전문가가 절실해졌다.
당시 내가 들고 다녔던 2008년 버전의 첫 회사소개서를 다시 펼쳐보았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없는 문서를 믿고 일을 맡겨준 당시 고객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투박한 레퍼런스 안에는 꽤 괜찮은 기업들의 프로젝트가 섞여 있었다.
문서 작성을 외주 업체에 맡기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의 까다로운 수정 요구를 견뎌낼 곳을 찾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숨막히는 스타일이다. 남들 눈엔 괜찮아 보이는 1픽셀의 오차, 마침표 하나, 띄어쓰기 하나에도 예민함이 폭발한다. 그저 "고치자"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 화가 나 흥분할 정도의 예민함이다. 그러다 보니 더 작업해줄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잡코리아를 통해 만난 인연이 바로 '채*진'기획자 었다. 나랑 동갑인 그는 나에게 수많은 조언을 건네며 회사에 필요한 전반적인 문서 체계를 잡아준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사실 그가 쓰는 문서는 솜씨가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가 가져오는 결과물은 나의 수정이 단 한 번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했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알아서 채워주었다. 나의 투박한 생각과 언어에도 그는 나의 언어를 비지니스 언어로 풀어내 지면에 표현해줄수 있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번 가져오는 그 결과물에 끝없는 집착이 더해서 지속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나의 고객이 나에게 하듯.. 나는 그에게 권위주의적 고객이었을것이다.
그는 홈페이지구축 프로세스에 대한 안내, 우리회사 유지보수 운영시스템에 대한 설명, 우리회사만이 갖고 있는 장점들에 대해 문서로 멋지게 만들어 나갔다. 에이전시 경험이 전무했던 나에게, 다양한 현장을 겪은 그의 합류는 우리 회사의 체급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새롭게 바꾼 소개서는 제안서의 기능을 합친 형태였다. 단순히 우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당신의 브랜드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전략과 감성적인 호소를 담았다.
그 첫 시험대가 바로 '카페 드롭탑' 제안이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하지만 뿌듯했다. 제안서와 견적서를 제출한 후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정돈되었고, 기술적으로 안정된 중견 기업처럼 보이는 문서였다.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재정의한 첫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로부터 12년 뒤, 우리는 카페 드롭탑의 세컨드 브랜드 '필메이트'의 브랜딩을 맡게 된다.)
도전에서 실패해도 기분좋은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도전. 만족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을것이다.
회사소개서(제안서) 의 업그레이드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2010년 이전까지 연 매출 5억 미만의 작은 구멍가게였던 우리 회사는, 소개서 하나를 바꾼 후 매출이 물꼬를 튼듯 높아지기 시작했다. 큰 규모의 고객사들이 먼저 우리를 찾기 시작했고, 문의 전화의 격이 달라졌다. 또한 고객사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물론 회사소개서 하나 달라졌다고, 이렇게 변한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고 고객이 우리를 다시 '리콜'하게 만든 초기 원동력이 된 것은 분명했다.
이후부터는 우리가 고객과 대면미팅을 통해서 어떻게 영업을 성사시키는가이다.
웹 에이전시는 어떤 포트폴리오를 상단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매출의 향방이 결정된다. 우리는 고객의 요구에 철저히 응답하며 디자인 퀄리티를 할수 있는한 최대로 끌어올렸고, 그 결과물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좋은 디자인이 쌓이고,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제안서가 뒷받침되자 조금 더 큰 기업들의 계약이 메이드가 쉽게 되었다.
그러나 그다음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큰 기업의 일을 해내기에 우리 회사의 프로세스는 여전히 체계적이지 못했고, 고객 응대 또한 서툴렀다. 보이는 체급에 비해 내실의 부족함이 컸다.
영업이 우선인가, 내부 인력이 우선인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고민은 여전하지만, 당시에 영업은 일단 해결된것 같아 보였다.
지금의 회사소개서
글을 마치고 다음글을 쓰려다보니 지금의 회사소개서 디자인을 한번 보여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 업로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