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책의 제목을 『아무튼, 이슬아』라고 쓴다. 아! 이거 아니지. 『아무튼, 노래』로 다시 정정하고 작가 이슬아의 이름을 적는다.
난 이슬아의 팬을 자처한다. 그녀의 책은 몇 권을 제외하곤 거의 다 읽었다.『아무튼, 노래』 이 책이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는 있었다. 도서관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그녀의 책을 검색할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 제목으로 봐서 단순히 노래에 관한 책일 것이라 짐작하고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슬아는 직접 노래도 부르고 만들 줄도 안다. 유튜브 채널이나 강연, 북 콘서트 그리고 결혼식에서도 그녀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영화 <미나리>의 O.S.T도 불렀다. 코로나 시절 극장에 남편과 나 단둘이 영화관을 통째로 빌린 것 같은 착각을 하며 봤던. 영화가 끝나고 엔딩 장면이 올라갈 때 극장 안에 울려 퍼지던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뜻밖에도 경주에서였다. 가족들과 경주 여행 중 황리단길을 거닐다가 <어서어서>라는 서점을 발견했고 이런 관광지에 서점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평소 책을 좋아하는 딸과 나는 혼이 책에 이끌리는 듯 그대로 서점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오른쪽 코너에 장식품처럼 쌓여있던 위고의 아무튼 시리즈였다. 거기서 맨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이 바로 이슬아의『아무튼, 노래』였다. 여기서 또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를 만나네, 나는 그저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작고 얇은 편이다. 곳곳에 배치한 경고문(판매할 책이니 두 손으로 조심히 봐달라는 안내문)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책의 표지가 이미 접혀 굳어져 있었다. 표지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노래방이 있는 거리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아주 잠깐, 학창 시절 토요일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던 추억이 생각나 정감이 갔다. 괜히 겉표지를 쓱 만져 보고 경고문에 유의해 조심히 책을 펼쳤다. 노래를 제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문 가수도 아닌 그녀가 왜 노래에 관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읽었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가 있었다. 그리곤 책을 내 가슴에 꼭 품었다. 나로서는 아주 드물게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결정을 내린 것이다.
경주 여행의 기념품으로 추억될 이 책을 난 한 번에 읽지 않고 날마다 아껴서 글 한 두 편씩 야금야금 읽는 중이다. 그때마다 난 '역시 이슬아가 이슬아 했네.' 했다. 그러다 <허전하고 쓸쓸한 날 너의 벗 되리> 이 글을 읽고는 '이슬아가 이슬아보다 더 잘했네.'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어떤 울림이 되어 지금 나를 쓰게 한다. <허전하고 쓸쓸한 날 너의 벗 되리>는 이슬아의 헤어진 연인 하마의 할아버지 장례식에 다녀온 일화를 담았다. 말하자면 전 남자 친구의 할아버지 장례식에 간 건데 그것도 좀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장례식장에서 그와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슬퍼할 그를 위해서, 혹은 전 여자 친구인 그녀에게 심드렁하게 웃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갑자기 윤복희 님의 <여러분>을 부르게 되는 대목이었다. 내가 꼭 그때 극장에서 들었던 것처럼 그녀의 맑고 여린 목소리가 그렇지만 과장되게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둘은 같이 웃었고 그녀는 목이 메어 온다.
"나는 너의- 여엉원한- 노래야아-
거기까지 부르고 나니 어쩐지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분명 웃기려고 시작했는데.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주책맞게 목이 메었다.
진심으로 너의 기쁨이 되고 싶어서였다.
가사들이 입 밖에 나오자 모를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얼마나 커다란 우정의 노래인지. 불러보기 전엔 진짜로는 알 수 없던 마음이었다. 하마와 나 사이에 마지막까지 남을 문장이 그 노래에 있었다.
나는 너의 친구야."
-이슬아, 『아무튼, 노래』 , 105쪽
집에 가면 윤복희 님의 <여러분>을 찾아 듣고 싶다. 이슬아가 자기의 가슴을 꾹꾹 눌러가며 불렀을 그 노랫말들을 내 가슴에 하나하나 담고 싶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일지. 진심으로 상대의 기쁨이 되고 싶은 마음이 어떨지 알고 싶다. 허전하고 쓸쓸할 때 벗 되겠다는 그 약속을. 이렇게 길고 긴 약속을 난 그 누구와 할 수 있을까.
장례식을 치르는 그들을 보며 나는 10년도 더 지난 할머니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새벽 엄마는 내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할머니가 너를 찾는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난 당장 일어나지 않고 다시 자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잠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평생 잘 수 있는 잠. 그때 나는 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라고. 할머니가 오늘은 당장 떠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부인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저 게을렀던 걸까. 그게 뭐였든 간에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난 잠깐 그 잠을 이기지 못해 할머니의 임종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나에겐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았다.) 베개를 베고 이부자리에 똑바로 누워계신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의 얼굴을 살며시 매만졌다. 몹시 차가웠다. 그러나 할머니 얼굴에 스며든 그 표정은 모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할머니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다.
엄마는 가끔 내게 말한다. 할머니가 너를 마지막으로 찾았다고. 네 이름을 불렀다고 말이다. 그러면 난 그 순간을 그만 얼버무리고 싶다. 그날 내게 남은 얼룩들이 다시 살아나 내 가슴을 꽉 조여 오는 것만 같아서다. 그때 내가 엄마 전화를 받고 한숨 더 잤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그저 숨 한번 크게 쉬고 넘기려 한다. 넘기려 해도 넘겨지지 않는 것이 얼룩져있다. 그것이 지금 나를 아리게 한다. 책에서 그들의 장례식을 거쳐, 임종 때 마지막으로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을 듣고 나자 나의 얼룩들은 또다시 살아난다. 마치 언제든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꺼낼 수 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아 아예 잊어버리고 싶은 그 얼룩들을 나도 모르게 마주하게 된다.
이슬아는 하마의 할아버지와 마지막 대화에서 그가 좋아한다는 노래 <My Way>를 불러드리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불러드리질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정말로 불러드렸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노래를 미루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담담하게 "참 좋았을 것이다"라고만.
나도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때 내가 할머니께 나의 목소리를 들려드렸다면,
내가 옆에서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렸다면,
그날 내가 자지 않고 서둘렀다면,
그랬다면,
화장터에서 하마는 이슬아에게 말한다.
"삶을 구석구석 살고 싶어.
이렇게도 덧붙였다.
대충 살지 않고 창틀까지 닦듯이 살고 싶어."
-이슬아, 『아무튼, 노래』 ,107쪽
하마의 말이 무슨 뜻일지 나는 알 것 같다. 삶을 구석구석 산다는 거. 대충 살지 않고 창틀까지 닦듯이 살고 싶다는 거. 전업주부인 내게도 창틀까지 닦고 산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창틀에 쌓인 먼지나 얼룩 정도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치게 된다. 어쩌다 눈에 띄면 눈 한번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마가 창틀까지 닦고 살고 싶다는 건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하마는 그 어느 때보다 이 세상의 삶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자기의 생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결국 삶은 생과 사의 연속이기 때문이리라. 어떤 죽음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한다. 감사하면서 살도록 한다. 내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일수록 그렇게 느낀다. 그의 몫까지 내가 이어서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진다. 생전 닦지 않던 창틀까지 닦고 싶은 거다.
오늘 당장 창틀부터 닦을까. 그동안 모른 척 지나쳤던 먼지와 얼룩을 다 닦아내면 내 안에 남아있는 그 얼룩들도 지워질까. 그때 내가 철없이 굴었던 행동과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씻겨질까.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만큼은 남겨둬야지. 적어도 그만큼은 할머니를 이어서 나의 생을 살아야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나의 이 생생한 '생의 소리'를 할머니에게 들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