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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잉툰 Feb 14. 2021

뜯박이라는 이름의 실수의 필연성

쏘잉과 회복탄력성의 상관관계


재봉을 시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초보인 주제에 정리해 놓은 부자재 리스트가 있다. 크게 필수품과 추천템으로 나뉘는데,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하는 부자재로는, 우선 가위와 실이 필요하다. 누구든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또 봉제를 할 때 천을 고정할 시침핀도 필요하고 플라스틱 집게도 유용하다. 그럼그럼, 필요하겠지. 그런데 재봉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지 못했던 필수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실뜯개”였다. 저렴해 보이는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꽤나 단순하게 생긴 이 도구는 잘못 재봉한 곳을 뜯어 내는 도구이다.




재봉 커뮤니티에서 자주 쓰는 “뜯박”이라는 표현이 있다. “뜯고 박고”의 줄임말인데 용례로는 “오늘도 뜯박 지옥에 빠졌어요.” “뜯박하느라 힘들었어요” 등, 자꾸만 실수를 해서 실뜯개로 재봉한 곳을 뜯고, 다시 박기를 반복하는 동작을 일컫는 말이다. 


뜯박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막상 달고 났더니 안과 밖이 바뀌었다거나, 이상한 곳에 달았다거나, 비뚤게 달았다거나. 나는 아직 초보라 그러려니 하지만 종종 제아무리 무림고수라도 잠깐 집중이 흐트러지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고 하니, 실뜯개는 누구에게나 필수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뼈에 새길 수 밖에 없다


재봉에 걸리는 시간보다 뜯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다반사다. 조심하지 않으면 원단에 흠집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 작업이지만 나름대로 집중을 요한다. 뜯고 나서 남아 있는 실의 잔해들을 제거하는 것도 꽤나 귀찮은 일이다. 한번 만들어 봤던 옷이라며 만만하게 보고 급하게 재봉하다가 뜯박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뼈에 새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뜯박은 언제나 옳다 


실수를 발견한 순간 큰 한숨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어떤 실수냐에 따라 3초 내외로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한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까 (무시할 수 없는 실수도 있다), 아예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 (천이 있다면, 이게 더 빠를 수도 있다). 집에서 편하게 입을 계획인 내 옷인 경우 무시하고 넘어갈 때도 있다. 하지만 주저하다 실뜯개를 집어든 그 순간을,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일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뜯박은 언제나 옳다.  


뜯는 것은 언제나 옳지만, 잦은 뜯박 사태는 재봉 권태기, 일명 를 불러 올 수도 있다. 어려운 옷에 도전해서 자꾸만 뜯박을 해야한다면 잠시 넣어두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옷을 한 벌 만들고 다시 도전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고수들의 조언에 공감한다.


재봉을 하다보면 실수는 워낙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한번의 실수에 자책하다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다음 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뇌 속에라도 메모를 하고 지나가야 한다. 어떤 때에는 도저히 뜯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 중도 포기를 해야되는 경우도 생긴다. 비록 내가 이제껏 투자한 시간과 자원은 아까울지라도 너무 마음쓰지 말고 넘어가자.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차마 버리지 못하고 서랍 한 구석에 넣어둔, 초록 원피스가 되려다 만 천조각이 떠올라 마음이 쓰려온다.


심리학에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의미하는 말이다. 쏘잉을 하며 회복탄력성이 길러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 같다.


봉틀러에게 천국이 있다면

봉틀러에게 천국이 있다면 다시는 뜯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아닐까. 실뜯개 들고 대기하다가 대신 뜯어주는 천사들이 있다던가.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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