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스럽다가도 미소를 짓고 마는 날들

2022년 2월 21일, 깁스쟁이의 일상

by 세언


오늘은 일단 세 시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응급실떡볶이를 시켰는데 배달 도중에 파손됐단다. 재조리를 해드릴까요 아니면 취소를 해드릴까요, 라는 물음에 그냥 푸쉬쉬해져서 취소해달라고 했다. 알림을 확인해보니 고객 요청으로 취소가 되었다며 배달의민족 2천 원 쿠폰이 들어왔다. 그 2천 원이 당장의 나를 밥 먹여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의 나를 밥 먹여주기는 했다. 엽떡 최고!


발도 뭔가 욱신거리는 거 같고 처음 다쳤을 때보다 더 부은 데다가 푸르뎅뎅하길래 갑자기 울적해졌다. 아니 언제 낫는 거야 이거... 깁스를 하자니 부종이 심하고 안 하자니 인대가 고정되지 않는 기분이고. 냉찜질을 하자니 퍼렇게 피부가 죽고 안 하자니 퉁퉁 부풀고. 깁스 풀고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내가 보기에 내려가서도 초장에는 깁스한 채로 절뚝거릴 모양새다.


내일 발목 상태를 보러 통증의학과에 가기로 했는데 그전에 내과를 들러야 한다. 학교에 제출해야 할 건강검진이 우선이다. 결핵검사만 할 일이지 뭐하러 혈액검사에 소변검사까지 한담? 예약해야 하나 싶어서 병원에 전화했더니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라길래 최대한 좋게 넘겼지만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어쩌라고요, 이 학교는 달라는데 나보고 어쩌라고요 진짜.' 아.. 그냥 넘기면 되는데 별 게 다 짜증스럽구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오늘 예민하네. 잘 누그러뜨리자. 스스로 타이르는 수밖에.


이동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다. 굼벵이 프리미엄이라고 명명해주었다.


내려갈 날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왜 이렇게 할 일은 산더미 같게 느껴지는지. 오늘 돌이켜보니 여기저기와 통화하느라 진 빠진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뭐, 공부 벼락치기하는 거야 내 업보이고 감안하고 놀았던 거니까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별로 크지 않지만. (혹은 크지 않은 척하는 것일지도.ㅋㅋㅋ 아 진자 혼난다 이놈아.) 이처럼 별 거 아닌, 금세 처리할 일들조차 고작 왼쪽 발목에 묶여서 모든 것이 굼뜨게 돌아가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운동 못하는 게 제일 짱남! PT도 다 못 받고 내려가네.


이토록 지겨운 순간도 매 똑같이 흐르는 시간에 흘려보내면 될 일이겠지.


그래도 좋았던 순간은 사랑하는 친구들의 졸업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 왕복으로 택시를 탔다는 말에 혹자는 찐 사랑이네 하며 놀라워해 줬지만, 사실 요즘 나는 시간과 건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코 찔찔거리는 스무 살 때부터 옆에서 다 같이 울고 웃고 감각해주어서 고마웠단다. 간만의 외출에 탁 트인 하늘과 차가운 공기를 잔뜩 들이 삼킨 것도 좋았지만, 그 무엇보다 굼벵이 프리미엄을 이해해주는 너희들이 나는 그냥 너무 편하고 행복했다.


코찔찔이들이 언제 이렇게 번듯하게 되어버렸나.


또 좋았던 순간은 엄마 아빠와 두 남동생과의 오순도순한 시간들. 내 병 수발하느라 고생하는 동생 놈들은 덩치야 산만해도 사실 이만큼 잔망스럽고 사랑스러운 애들도 없다. 픽픽 까불어도 그게 다 애교인 걸 알아서 푸스스 웃음만 난다. 또, 요즘 한창 바쁜 아빠와 주말에 외출하며 함께 쇼핑을 다니는 게 오랜만이라 행복하다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나도 엄마를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여름에 꼭 데리고 가겠노라 다짐하기도 했고.


이날 새로 산 운동화는 아직 못 신겠지만 언젠가 두 발 다 끼워 넣고 그때 본 포니테일의 여학생처럼 교정을 달릴 어느 아침을 상상해봤다. 또, 이번 기회에 장만한 커피머신 덕에 마음 곳간이 든든해지기도 하였다. 나는 솔직히 누군가가 술을 끊을래 커피를 끊을래 물어온다면, 여러분들은 놀랍겠지만 술을 끊는 게 나을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술 없이도 즐거운 밤은 성립하지만 카페인 없는 아침은 너무 기운 빠지는 걸.


오늘 눈 떠보니 갑자기 완전체 앱등이가 되어버린 일도 꽤나 즐겁다. 이 와중에 눈치 없는 애플워치는 나보고 오늘 stand goal을 채우지 못했다며 삑삑거린다. 이놈아, 내 발목 상태를 보고 그런 소리를 해라!


아이폰-아이패드-에어팟-맥북-매직마우스-애플워치, 원래 다 살 계획은 없었다. 모두가 어느덧 내 삶에 처들어왔을 뿐이다. 하핫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다. 그럼 다시 정진하고 2월을 잘 갈무리해보쟛.




p.s. 요즘 Frank Sinatra에 흠뻑 빠졌다. 지금도 With every breath that i take 듣는 중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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