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3월 4일의 기록
모든 게 지난 1년 뒤에 다시 읽어보니 그때의 고민이 가슴 한가운데에서 찰랑이는 게 느껴진다. 이후에도 도통 앞을 모르고 가는 길목에서 종종 헤매겠지만, 이제는 내가 만들어나간 자기 확신에 어느 정도 형체가 있다고 믿고 살아가련다. 내가 내린 선택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단 한 번도 복사하지 않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곱씹으며 썼다. 생각이 스밀 공간이 없도록 빽빽하게 쓰고 싶었건만 사실은 온통 엎질러진 상념 위에 놓인 글자 나열에 불과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평생 갈 질문일 테고, 한없이 가볍대도 더없이 무거울 화두일 테다. 어떻게 살면 좋지.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면 사실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일지.
하고 싶은 게 뭣도 없던 때보다는 하고 싶은 게 많아진 상태가 더 바람직한가? 증명을 생략하고 0보다는 N이 더 바람직하다고 가정해보자면, 그 범주에서 10년째 맴돌았던 나 자신이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10년 전 같은 질문이다. 좀 더 구체화됐거나 기회비용을 체감하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재능이 있었군요." "재능은 무슨 열심히 한 거지." "OO님도 노력충인가요?" "나도 나이를 먹고 느낀 거지만 웬만해서는 열심히 하면 돼. 근데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거고, 여기서 방향을 잘 잡아주는 역할이 중요한데 이게 쉽지가 않지."
10년 전과 차이가 있다면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부터 선택을 하는 일만으로는 모자라다는 점과, 여전히 모조리 경험해보자고 외칠 수는 있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시간의 유한성을 절감한다는 점, 그렇기에 나는 어쨌건 간에 알아서 선택을 해야 하며 결정한 일에 걸맞은 비용을 과감히 투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저리도 겉으로는 반듯해 보일지언정 짓무른 글자들을 늘어놓지 않고선 못 배겼던 이유는, 어떻게든 내려버린 결정에 따라 열심히(앞선 일갈에 따라 열심이지 못한 경우는 제외한다) 살았는데 사실은 정말 원한 게 아니었다거나 맞는 옷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자신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는 열심히가 바로 그 방향을 잘못 잡은 열심히는 아닐까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래, 다다른 곳이 정말 막다른 골목은 아니겠지만.
이쯤에서 1/4을 남기고 다 못 읽은 소설책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방금 과녁 정중앙에 활촉이 꽂히는 듯 생각났다. 밀란 쿤델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도입부에서 토마시가 테레자를 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확신에 차서 Einmal ist keinmal를 외친 순간부터 재회하자마자 후회하는 장면과, 결혼 후에도 여러 여자를 만나는 한편 그녀에게 유일한 사랑을 느끼고, 또 다른 한 번뿐인 선택으로 그가 유리창을 닦는 데 이르기까지 등을 모조리 목격한 독자로서 그처럼 쉽게 Einmal ist keinmal를 외칠 자신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렇다. 인생은 길고 현재는 짧고 젊음은 정해져 있다. 모든 일은 어차피 그 순간 한정으로 단 한 번밖에 겪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당연히 불완전하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불가피하게 완전하다.
2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