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두산 포비아

by 김팀장

phobia.

포비아.

공포증.

울렁증.


네이버에 '포비아'를 검색하면 질병정보 '공포증 : 특정한 물건, 환경, 또는 상황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불안장애의 일종'이라고 나온다.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국한되어 발생하는 공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공포는 지나치거나 비합리적이고, 지속적인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이 유발된다. 공포 자극에 노출되면 예외 없이 즉각적인 불안 반응이 유발되며, 심하면 공황발작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환자 본인은 이러한 공포가 너무 지나치거나 비합리적임을 알고 있으며, 일상생활이나 기타 직업적, 사회적 기능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포증 [phobia]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그렇다, 포비아는 단지 심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 할 수 있다. 비합리적이고 지속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이 유발되어 일상생활이나 직업적, 사회적 기능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무서운 병이다.

직장 내에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있다면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불가능하고 심할 경우 퇴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LG에게도 이런 병이 있으니 바로 '두산 포비아'가 그것이다.

LG는 한 지붕 두 가족인 두산을 상대로 한 상대 전적이 너무나도 나빴는데, 특히 2018년 치욕적인 1승 15패를 당하면서 정점을 찍게 되었다.

속절없이 15연패를 당하고 시즌 마지막 맞대결마저 패한다면 시즌 전패에 빠질 뻔한 위기에서 차우찬의 134구 완투에 힘입어 1승을 거두고는 마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며 차우찬을 백허그하던 유강남을 TV로 지켜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하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서 괴롭다.

한국시리즈 우승한 거 아님.

물론 9회 말 2 아웃 만루에서 풀카운트 승부 끝에 삼진으로 마지막 타자를 잡아낸 상황은 충분히 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울 것까진 없었다. 하지만 LG 팬들 중에 눈물을 흘린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때의 눈물은 그래도 시즌 전패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내가 사랑하는 우리 팀이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그래도 LG 팬으로서 최후의 자존심만은 지켜냈다는 안도의 표현이자 그해 겪은 마음고생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실 라이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두산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다니던 LG 팬들에게 2018년의 대참사는 초딩 시절 드림랜드에 놀러 갔다가 중학생 형아들에게 삥 뜯겼던 것만큼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정말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원래 내가 반에서 1등이었고 우리 부모님이 더 부자라 1타 강사 출신 쌤으로 과외도 시켜 주는데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형편의 옆집 전학생이 겨우 동네 학원만 가끔 다니면서 매일 전교 1등을 한다. 그러면 부럽고 샘이 나기는 해도 견딜만하다. 그런데 걔가 학교 일진이라 나를 매일 두들겨 패고 삥 뜯는다고 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두산을 대하는 LG 팬들이 딱 그렇다.


그런데 원래 LG가 두산한테 그렇게 맞고 다녔었나?

우선 LG는 MBC 시절을 포함해서 올해까지 2437승 2529패 125 무의 전적으로 승률 0.491을 기록하고 있는 팀이다. 팩트만 보자면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욱 익숙한 역사를 지닌 팀이라는 것이다.

반면 두산은 OB 시절 포함 2620승 2366패 104 무의 전적으로 0.525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LG보다 강한 팀이었다는 것은 물론이요 원년부터 역사를 이어온 팀들 중 삼성 다음으로 승률이 높은 팀인 것이다.

그러니 속은 쓰리지만 두산에 상대 전적이 밀리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이다.


그럼 도대체 얼마나 밀리고 있는 걸까?

MBC와 OB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프로야구 초창기 MBC - OB 시절에도 상대 전적에서 밀렸다. 그 당시 OB는 2000년대의 두산만큼 강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년 우승팀이었고, 꾸준히 3~4위권을 오가며 MBC보다 주로 한 두 계단 높은 위치에 있던 팀이었다. 그러므로 8년간 승률 0.476은 이해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러다 1990년 MBC가 LG로 바뀌면서 LG의 짧고 빛나던 전성기가 찾아오고 반대로 OB는 2000년대 비상에 앞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LG와 OB라는 이름으로 9년간 맞붙어 LG가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기간은 나의 중, 고딩 시절부터 군대 가기 전의 리즈 시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의 리즈와 LG의 리즈가 함께 만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절일 것이다.


두산이 OB이던 시절의 전체 상대 전적은 163승 142패 11 무, 승률 0.534로 LG가 확실히 우위였다.

문제는 두산이 두산이 되고 난 후이다.

현재 진행형인 올해까지 포함해서 24년 동안 상대 전적에서 앞선 것은 달랑 네 번뿐이었고, 마지막으로 앞섰던 해가 무려 8년 전이다. 그 8년 전인 2014년은 두산 팬들이 '일수 강점기'라고 부르던 최악의 해인데 그때도 겨우 1승 앞섰을 뿐이었다.(두산이 2013년부터 작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2014년 딱 한번뿐이었다. 부럽다, 정말로.)


24년 중 LG 전체 역사에서 암흑기로 분류되는 2000년대 초반은 그렇다고 해도 살림살이 좀 나아진 최근의 전적에서도 크게 밀리고 있는 것은 단지 전력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018년의 굴욕 이후로 두산 포비아는 더욱 부각되었고 LG 선수들은 두산을 만나면 평소와는 다른 플레이로 자멸하거나 믿었던 에이스가 무너지거나, 강력하다던 불펜이 경기 후반에 승기를 넘겨주거나 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자주 보여주게 되었다.

FA가 대거 빠져나가 두산의 전력이 크게 약해진 작년, 와일드카드 두 경기를 치르고 올라온 두산을 상대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맞이한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믿었던 에이스 수아레즈의 다소 모자란 활약과 어이없는 수비에서의 실책, 그리고 득점권에서 역시나 답답했던 공격력이라는 익숙한 패턴을 보여주면서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탈락하면서 역시나 두산 포비아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씁쓸한 시즌 마무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포비아라고 할만한 상황을 몇 차례 겪었다.

고딩 시절의 수학 포비아는 수학을 시원하게 포기하고 수포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말끔하게 해결(?)했었고, 유격 포비아는 군대를 제대하면서 치유될 수 있었다. 첫 직장의 사업부장 포비아는 그 회사를 그만두면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포비아 상황을 이겨낸 적은 없었다. 그 상황을 아예 없애 버리거나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포비아는 이겨내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팬으로서 우리 팀이 특정 상대에 대해서 울렁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깝지만 엄청난 중압감이나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팀의 선수라면 그 고통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울렁증을 안겨줬던 사업부장을 피하기 위해 다리라도 부러뜨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자꾸만 당하고, 주위에서 자꾸만 안된다고 왜 계속 그러느냐고 하면 정말 나는 패배자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스텝이 꼬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 선수들이 두산을 만나면 왜 자꾸 무너지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LG 선수들이 두산 포비아에 시달리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못했지만 공포증을 시원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1할 타자라도 지금 막 들어선 타석에서는 안타를 칠 확률이 반반이다.

그동안 아무리 많이 졌어도 오늘 열리는 경기에서 이길 확률도 정확히 반반이다.

별 거 아니다.

그냥 매일 열리는 경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해서 도망쳤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고 그 기억들은 후회로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팀은 달랐으면 한다.

나와 같은 후회를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는 팀이니까.

그들이 깨지 못한 포비아를 시원하게 깨버리는 대리만족을 시켜줬으면 한다.


두산 포비아? 그런 건 없다.

이런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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