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밝혔듯이 내가 국민학생일 때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고 어머니와 누나는 야구에 단 1의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 야구 직관은 아저씨들이나 하는 것이었고 야구장은 욕설과 술주정과 난동이 난무하는 상당히 무서운 곳이었다.
이런 곳에 국민학생 혼자 가기는 무리였겠죠;;;
누구보다 열심히 일 하신 어머니 덕에 우리 집 형편은 조금씩 나아져서 단칸 사글세에서 방 두 개짜리 전세로, 그리고 방 세 개짜리 아파트 전세를 거쳐 드디어 방 세 개짜리 번듯한 아파트를 우리 집으로 갖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 타고난 수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모습들을 보고 나니 실로 대단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가세가 나아지는 세월 동안 LG 트윈스는 1990년 창단 첫해에 우승을 하였고 그 후로 한동안 강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귀여운 국민학생에서 징그러운 고등학생으로 훌쩍 자라 있었다.
가정 형편이 나아짐에 따라 나는 다른 친구들 부럽지 않을 용돈을 타 쓰고 있었고 그 또래의 사내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마음 맞는 녀석들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공부도 하고 공부도 하고 몰래 술과 담배에 손을 대고 빨간 비디오 한번 보기 위해 다른 동네 비디도 가게까지 발품을 팔며 바쁘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죽이 잘 맞았던 형택이와 현목이는 공통점이 많았다. 셋 다 남자였고 같은 반인 데다가 빨간 비디오를 보기 위해 발품을 팔았고, 드림 시어터를 좋아했으며 결정적으로 LG 팬이었다!
스톤 누님의 원초적 본능과 드림시어터 형님들
대화의 80% 이상을 빨간 비디오와 드림 시어터와 LG 얘기로 채우던 우리는 언제 한번 다 같이 직관 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결국 1993년 플레이오프 직관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출생 이래 첫 직관이 무려 플레이오프였다니 나는 흥분이 돼서 전날 밤 잠을 거의 설치다시피 했다. 삼성과 만난 플레이오프에서 우리는 먼저 1패를 당하고 있었고 홈에서 열리는 2차전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세 소년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일요일 새벽같이 잠실로 향했다.
인터넷 예매 따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쌩으로 기다렸는데 그 전날 텐트를 치고 잤던 사람들도 꽤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표를 구하고 1루 쪽 내야에 자리를 잡고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자니 주변에 무서운 아저씨들이 많았다. 그때는 그래도 어른 무서워하던 때라 험악한 아저씨들이 내뱉는 온갖 험한 말들에 잔뜩 졸아서, 우리는 우리끼리 있을 때와는 달리 상당히 과묵하고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교양 있는 소년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들이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해도 LG는 시즌 막판까지 2위를 달리다가 하필 플레이오프 상대인 삼성에게 3연패를 당하며 미끄러져 결국 4위로 쳐졌다가 준플에서 겨우 이기고 올라온 터라 아저씨들의 분노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가을 뙤약볕에 얼굴이 점점 벌게져서 옆자리의 팩소주 아저씨와 얼굴색이 비슷해진 오후 2시가 되자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내 생애 첫 직관, 첫 플레이오프여!
온몸에 찌릿한 전기가 돌 정도로 흥분된 상태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LG 김태원과 삼성 성준
경기는 LG 김태원과 삼성 성준의 선발 맞대결로 시작되었다. 8승 투수 김태원과 12승 투수 성준의 대결이었으나 김태원은 그해 2.42의 방어율에다가 4번의 완투와 1번의 완봉을 기록했기 때문에 선발 대결에서 밀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나 경기 초반인 2회에 먼저 1점을 내며 앞서 나가면서 기선을 제압하자 팩소주 아저씨와 우리는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다. 4회에 한 점을 더 내면서 LG 관중석은 2002 월드컵 분위기가 되었고 나의 첫 직관은 승리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경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사실 4회는 무사 만루의 기회였는데 거기서 한 점밖에 내지 못한 것이 못내 찜찜했다.
원래 성준은 상당히 인터벌이 길고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을 즐기는 기교파 투수로 공의 위력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나오는 경기는 항상 러닝 타임이 길었고 그로 인해 상대팀 타자들이나 보는 관중들이나 진이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준이 빠른 승부를 걸어오면서 LG 타자들이 당황을 해서였을까 4회부터 헛방망이질을 하면서 공격이 완전히 죽어버린 사이에 6회에 2점, 8회에 1점을 빼앗기며 3대 2로 역전을 당하고 만 것이다. 8회 1사 만루에서 구원으로 나온 이상훈을 상대로 당시 무릎이 좋지 않았던 양준혁이 2루 땅볼을 치고 전력질주하여 겨우 병살을 면한 장면과 함께 승리의 여신은 삼성 쪽으로 급격히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맞이한 9회 말 마지막 공격.
겨우 러닝타임 2시간이 겨우 지났을 무렵에 벌써 마지막 공격이라니 우리는 성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린 것이었다;;;
마지막 공격에서 대타로 나온 첫 타자 김영직이 우익수 앞 안타를 치고 나가자 LG 응원석에서는 다시 한번 활화산 같은 응원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선두 타자가 출루를 했으니 어떻게든 한점 정도는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들뜬 LG 응원석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풍선처럼 팽팽하게 텐션이 올라가 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1루 대주자로 그가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윤찬.
그리고 LG 벤치는 또다시 대타 작전을 걸었다. 대타로 나온 타자는 최훈재. 상당히 높은 정확도를 가진 중거리 좌타자로서 그 상황에서는 최적의 카드였다. 얼굴에 수염 자국이 선명한 그는 상당히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고 분명 뭔가 한 방 터뜨려 줄 것만 같은 포스를 내뿜으며 타석에 들어섰고 기대감과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김영직과 최훈재
쩌는 포스를 내뿜으며 타석에 선 최훈재의 방망이가 삼성 류명선의 손을 떠난 공을 통타 하는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우익수 쪽으로 날아가는 강한 타구를 보며 1루측 LG 관중석은 모두 안타를 확신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1루에 있던 대주자 윤찬도 관중들과 같은 생각이었을까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치타처럼!
적토마처럼!
그야말로 폭주기관차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뛴 윤찬은 홈플레이트에 도착하며 환한 미소와 함께 만세를 불렀고 그와 동시에 이광환 감독과 3루 주루 코치였던 이종도 코치와 잠실 구장을 가득 메웠던 관중들 모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약 2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때까지 들어봤던 세상 험한 욕이란 욕은 다 들었던 것 같다.
본헤드 플레이. 정말 그렇게 큰 경기에서 그런 어이없는 본헤드 플레이는 단연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외야에 플라이가 떴을 때 태그업 준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윤찬은 경기장 분위기에 들떠서였는지 그 기본을 지키지 않았고 타구가 뜨자마자 미친 듯이 뛰었다. 3루에서 주루 코치가 스톱 사인을 보냈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너무나도 잘 맞은 타구이긴 했지만 최훈재가 날린 공은 우익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고, 윤찬이 홈 플레이트에서 만세를 부름과 동시에 1루에 공을 던져 더블 아웃. 병살타!!
그다음 타자 송구홍이 바로 안타를 쳤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순간이었다. 안타가 터지긴 했지만 이미 병살타로 끊긴 흐름을 다시 이어 가기는 역부족이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2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마도 94년 월드컵 볼리비아 전의 황선홍이 아니었다면 윤찬은 지금까지 단 한 경기로 인해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본헤드 플레이 하나로 2연패에 빠진 LG는 그 후 2승을 했으나 결국 2승 3패로 탈락하였고 3루 코치였던 이종도는 그의 폭주를 막지 못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해임되고 말았다.
볼리비아 전의 황선홍. 난 정말 저 때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믿을 수 없는 결말을 보고 난 우리는 야구장을 빠져나와 집까지 가는 내내 그를 욕했다. 그게 선수냐, 나라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등등 그는 우리 사이에서 오징어처럼 잘근잘근 씹혔다. 어디 우리뿐이었을까 그 경기를 본 모든 사람들과 그 사건을 전해 들은 모두에게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였다면 온갖 악플이 그를 괴롭혔겠지;;;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윤찬은 선수로 대성하지 못하고 백업 선수로 뛰다가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분명히 패배는 쓰고 패배를 부른 결정적인 실수는 실드 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고 나 역시도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이불 킥 한 사건 몇 가지는 기억이 난다. 윤찬도 그런 실수를 한 것뿐이었지만 그 무대가 너무 컸다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었다. 당연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최선을 다 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수 하나로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그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던 그날의 내 모습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부끄러워진다.
누군가의 실수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고 과하게 분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날카로운 첫 직관의 추억을 남겨 준 폭주기관차 윤찬 선수가 더 이상 그 일로 고통받지 않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