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한방의 추억_94 한국시리즈 #1

by 김팀장

93년 플레이오프의 아픔을 간직한 채로 맞이한 94년은 암울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해였다.

일단 고2가 되면서 야자 시간이 밤 10시에서 11시로 늘어났고, 나의 눈높이는 SKY에 가 있는데 나는 미적분을 피해 문과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수포자의 길로 턴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딱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를 SKY 후보자로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를 곧잘 했던 학생으로서 진학과 관련해서는 응당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설상가상 허슬플레이의 대명사였던 우리 송구홍 형님이 군입대를 하고 LG에서 그나마 장타를 쳐줄만한 타자였던 김상훈 형님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시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상훈 형님의 반대급부로 한대화 형님이 오시긴 했지만 그 당시 나는 그 트레이드에 불만이 많은, 진학 스트레스에 찌든 고2였다.

952838672l-tmrhdqkd.jpg
SE-0be70f4d-e6dc-4445-9c77-80572667913b.jpg
SE-2f38fb3a-2556-42df-9654-19cd87634f4e.jpg
송구홍 / 한대화 / 김상훈

그래서 나는 94년의 LG에 큰 기대 없이 그냥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래도 야구는 꼬박꼬박 챙겨 봤다.


와~~~ 그런데 LG가 초반부터 정말 미친 것 같은 페이스를 보이는 게 아닌가!

유지현(그때는 유지현이었다. 지금은 류지현이지만), 김재현, 서용빈이라는 처음 보는 선수들이 그야말로 날아다니고, 한대화 형님은 결승타를 펑펑 쳐내면서 "김상훈이 누구예요?" 하게 만들었다.

2020091101000997400061823_20200910165318994.jpg 해맑은 3인방


잘 생긴 김재현, 서용빈과 귀여운 유지현은 호감 가는 외모에 실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나는 특히 나와 겨우 두 살 차이이던 김재현에게 정이 많이 갔는데, 야구 엄청 잘하는 형 느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살벌한 빠따질과는 정반대였던 그 특유의 미소 때문인지 동경하는 스타라기보다는 성격 좋은 형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이라는 15승 트로이카에 혜성처럼, 하지만 타자 3인방에 가려져 조금은 조용히 등장한 인현배까지 가세한 선발진에 철벽 마무리 김용수까지 투수진 역시 어마 무시했다.

트로이카.JPG 이상훈 정삼흠 김태원 트로이카 (출처 : 스포츠조선)


아, 맞다. 지금 차 단장님도 94년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셀프 디스 때문인지 선수 시절 별 볼일 없던 선수였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LG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불펜의 핵심이었고 94년에도 61이닝을 던지면서 2승 3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차명석.JPG


신인으로 10승을 거두었던 인현배는 장차 LG의 마운드를 짊어질 선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팔꿈치 부상의 후유증으로 다시는 94년과 같은 임팩트를 보이지 못하고 2000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됐으니, 그가 유일하게 빛나던 그 해가 바로 94년이었다는 점에서도 그해 LG에 대운이 들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인현배 형님은 프로골퍼 생활을 거쳐 현재는 '20TH HOLE'이라는 골프 브랜드 CEO로 활동하고 계시다.

0220b83c7b67255cfd2e9424137d03876b1c99e9f5567edf7f8187aef538c7ac6e84df9377d4c4e63d6329b0f8c57056bf98c81a21b75f0bafc1aaf0fc26b90be52ba087fb1167daa47701158391fa8124159b822f591caa58b1cd8546777f6b.png
인현배.JPG
선수 인현배와 사업가 인현배 (출처 : OSEN)


시즌 초반부터 달리기 시작한 LG는 무려 11.5게임 차로 태평양을 멀찌감치 앞서 별다른 고비 없이 일찌감치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라면 당연히 직관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나는 야자의 굴레에 빠져있던 고딩이었기 때문에 차마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시리즈를 보지 않는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터라 시리즈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묘수를 찾기 위한 장고에 들어갔고 마침내 해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선생님, 저 오늘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수업 끝나고 야자 좀 빠져야겠는데요."

"그래? 왜? 어디가 아픈데?"

"네, 허리가 너무 아파서요."

"그래, 가 봐."


지금 생각해봐도 완벽한 전략이었다.

40대 아저씨였던 담임의 최대 고민이었을 허리 문제를 꺼내 들어 공감을 유도하고, 학기 초부터 그 앞에선 야구 얘기는 입에도 담지 않으면서 설마 하는 한점 의혹 따위 허락하지 않은 용의주도함이라니.

길고 긴 시간 동안 정체를 숨겨왔던 절제와 인내, 그리고 상대방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화두를 꺼내 대화를 주도하는 스킬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들어낸 승리였다.

역시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그렇게 담임의 허들을 가볍게 뛰어넘고 룰루랄라 교문을 나서며 파나소닉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교실이데아를 들으면서 바라본 노을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naver_com_20151126_102040.jpg
파나소닉.JPG
파나소닉 워크맨을 타고 흐르던 태지 형의 "됐어~~ 됐어~~~"


LG의 압승을 앞둔, 모든 것이 평화롭고 청량한 저녁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Chapter 4. 두산 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