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한방의 추억_94 한국시리즈 #2

by 김팀장

느긋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LG는 태평양에 무려 11.5게임이나 앞서 조기에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을 정도로 압도적인 팀이었고 1차전 선발은 이상훈이었으니 말이다.


94년의 이상훈은 18승으로 해태의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ERA 2.47을 기록한 에이스였다.

상대 선발 김홍집도 12승 3패 ERA 3.20을 기록하며 태평양의 에이스 역할을 했으나 임팩트에서는 이상훈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1차전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다.

팀타율 0.244의 태평양은 전체 꼴찌였고 LG는 0.282의 팀타율 1위 팀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 해 태평양을 상대로 13승 5패였다. 그냥 우리 밥이었다.

설레발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앞선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이 ERA 1위 정민철과 이상목, 구대성이 버틴 한화를 무너뜨리고 올라왔다는 게 살짝 신경 쓰이긴 했지만 LG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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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이상훈과 김홍집


너무나도 평온한 맘으로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 지금쯤 학교에서 교실 이데아를 몸소 체험하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리며 내일 학교 가면 적당히 아픈 척해야겠다, 다음 주까지 넘어가면 다음 주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댈까, 우승하는 장면은 꼭 지켜보고 싶은데... 등등 온갖 잡생각을 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어차피 우리가 이길 건데 뭐...



화요일 밤의 경기는 3회말에 유지현의 희생 플라이로 LG가 먼저 1점을 내면서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태평양 타자들이 심심찮게 출루하면서 계속 기회를 만들긴 했지만 조금 불안하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막강한 구위로 찍어 누르는 삼손 앞에 그들은 그저 물방망이로 보일 뿐이었다.


여유롭던 경기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4회, 5회, 6회... 회가 거듭될수록 LG는 김홍집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변변한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고 이상훈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하게 찍어 누른다기보다는 꾸역꾸역 막아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작년 플레이오프 2차전의 악몽이 떠오르던 찰나, 결국 7회초에 문제가 생겼다.

7회초 선두 타자였던 김동기는 바운드가 큰 땅볼을 쳤다. 체공시간이 긴 땅볼이었지만 발이 느린 김동기였기 때문에 땅볼 아웃이 예상되는 타구였다.


아... 그런데... 그런데...


LG 2루수 박종호가 러닝 스로우를 노리다가 공을 흘려보내 외야로 굴러갔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공을 유격수 유지현이 재빨리 따라가 잡아 들어 2루로 던지려고 했지만...


받을 사람이 없었다. 어이없게도.


땅볼 타구를 잡으려던 박종호가 관성에 의해 2루에서 멀어진 동안 3루수 한대화도, 1루수 서용빈도 2루 커버를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발도 느린 김동기가 무주공산인 2루에 걸어 들어가게 만들어 주고야 말았다.

마치 서용빈과 함께 조깅하듯 말이다.


건실한 2루 수비를 보여주던 박종호가 그 공을 흘린 것도, 내야수 중 그 누구도 2루 커버를 안 들어가고 넋 놓고 있던 것도 우주의 기운이 태평양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큰일이다. 큰일. 뽀송뽀송 하던 겨드랑이에서 땀 한 방울이 똑 떨어지고 있었다.

우주의 기운이 태평양에게로...



분위기는 급격하게 뒤숭숭해지고, 타석에는 하득인이 등장했다.

하득인이 누구냐고?

좌투수 공을 잘 치던 전문 대타 요원이었는데 이상훈에게도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은 6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게 된 선수였다.


초구는 번트 모션을 냈다가 스트라이크 하나를 먹은 하득인은 2구째를 잡아당겨 기어코 좌익수 앞으로 적시타를 때려냈고, 그렇게 경기는 1대 1 동점이 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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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득인이라는 선수는 참 특이했다. 좌완 상대 대타로만 나오면 무시무시한 타율을 보여주던 선수인데 그래서인지 이상훈에게도 강했고, 이 날도 역시나 적시타를 쳐냈다.

어깨 부상 때문에 4년 만에 은퇴하게 된 하득인은 특이하게도 배트 손질을 깨진 콜라병으로 했다고 한다.


기회를 잡은 태평양의 정동진 감독은 김인호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해서 1사 2루 기회를 이어갔다.

이상훈은 꾸역꾸역 막아내다 동점을 허용하고 급격하게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다음 타자들인 김용국을 1루 파울 플라이, 염갈량(염경엽)을 포수 파울 플라이로 잡아내며 힘겹게 7회를 마무리했다.


경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자 소파에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긴장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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