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5) 영어교육, 단 한가지의 정답

빨리 말고, 오래 가는 영어 이야기

by 세우담

학기 말 마무리로 다소 늦었지만 돌아왔다.


그리고 영어교육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 될 이번 글에서는

영어 교육 방법도, 자료도, 루트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타이밍보다 지속성이고, 환경보다 태도이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핵심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래서 마지막은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럼, 영포자가 되지 않고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늘 같았다.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살아온 영어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마지막 글에서는 영어 교육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한 명의 영어 학습자로서의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글을 읽는 엄마들, 특히


1) 우리 아이가 영어를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아닐까 걱정하는 엄마

2) 영어유치원 안 보낸 게 평생의 실수가 될까 불안한 엄마

3) 내가 영어를 못해서 아이 인생을 망치는 건 아닐까 자책하는 엄마


이들에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이론이 아니라 사례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나는 영어유치원을 다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틀어서도

영어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 것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어릴 때 해외여행은 커녕 중국이나 일본 같은 가까운 외국에조차

나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영어 과목에 있어서 1등급을 유지했고,

서울에 위치한 모 대학과 모 대학원에서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으며,

말하기나 토론, 쓰기, 문학, 언어학 수업까지 영어 관련 과목은 대부분 A+를 받았다.

그리고 동일한 영역(말하기, 쓰기, 문학, 언어학, 영어교육에 대한 지식)에 대한 시험을 보는

영어 임용고시에서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합격했다.


회화에 있어서도 외국에 나가면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발음에는 어느정도 한국인의 억양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음은 정말 어렵다...)

한국인들이 듣기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할 정도의 영어를 한다.


이 정도면 흔히 말하는 영어 잘하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영어를 잘하지 않았다.

영어는 나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능력이 아니었다.

모든 건 유치원 시절 한 번의 충격에서 시작됐다


나의 영어 인생에 첫 시작은 미군부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친척 덕분에

미군부대를 방문한 날로부터 시작된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외국인을 실제로 보았고, 처음으로 영어를 들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던 사촌오빠가 그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어린 나에게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말이 통한다는 게 신기했고, 외계인처럼 보이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말도 안 되게 멋있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저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이지?’


영어가 단순한 과목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처럼 느껴진 첫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부탁해 사촌오빠가 공부한 책과 CD를 받았고,

엄마는 매일 밤 자기 전 그 영어 CD를 틀어주시어 나는 매일 영어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리고 유치해 보일 수 있으나 내겐 결정타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시절 유행하던 해리포터였다.


나는 그 당시 (사실 지금도) 해리포터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호그와트에 가서 살고 싶을 정도였다.

책을 읽을수록, 영화를 통해 볼수록 그들이 쓰는 언어, 문화, 세계관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들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성적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그 세계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였다.

교육과정에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 “I’m fine, thank you.”를 배울 때조차

나는 마음속으로 호그와트의 헤르미온느가 된 것처럼 빙의해서 말하려 애썼다.

영어를 공부하는 순간만큼은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감각은 그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영어에 푹 빠져버린 나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고,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초기자금을 모아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배워 가지게 된 영어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캐나다는 다문화 사회였다.

억양도, 영어 수준도, 배경도 정말 다양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캐나다 국적을 가진 백인들 중에서도

프랑스 문화권인 퀘벡에서 살다 온 사람들의 영어였다.


그들은 분명 백인이었고, 분명 영어 원어민이었지만 영어에는 뚜렷한 프랑스어 억양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들을 “영어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억양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되었고, 사회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 완벽한 영어라는 것도 사실은 하나의 환상에 가깝구나.


이 경험을 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영어교육 현장을 보니 엄마들의 편견이 더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인 선생님이면 영어는 믿을 수 있지 않나요?”

“북미 선생님이 가르치면 발음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영어학원이나 영어 문화센터에 있는 백인 강사들 중 상당수는 미국이나 캐나다 출신이 아니라

유럽 출신의 비원어민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동유럽, 남유럽, 북유럽 출신으로

자국에서 영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영어를 쓸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된다.

반대로 필리핀이나 싱가폴 출신 선생님들은

발음이 훨씬 명료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도 편견으로 배제된다.

이게 바로 엄마들이 영어를 바라보는 시선의 현실이다.


요즘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영어의 억양을 분석해주는 어플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영어 발음을 녹음하면 “미국인”, “영국인”, “한국인” 이렇게 판별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테스트하면 미국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똑같이 영어유치원을 나왔으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에서 영어를 지속적으로

배우고 있는 아이에게 다시 테스트해보면 대부분 다시 한국인으로 나온다.

이는, ‘미국인과 같은 완벽한 영어’를 기대하며 영어유치원을 보낸 부모에게는 실패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국에서 살게 될 아이에게 한국인 억양이 섞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이민을 노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사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미묘하고, 사실상 부질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미국인의 영어’를 위한 영어유치원이라는 환상에 매료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나는 엄마들에게 먼저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영어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라.


영어는 완벽해야 시작하는 언어라던지, 완벽하기 위해 일찍 배워야 하는 언어가 아니다.

미국인과 똑같은 영어를 해야 의미 있는 언어도 아니다.


영어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도구이고, 세계를 넓혀주는 창이며,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언어다.

그걸 아이가 느끼게 된다면 영어는 결국 스스로 배우게 된다.


나처럼 강한 동기가 생기면

아무리 환경이 부족해도, 시작이 늦어도, 영어는 인생에 있어서 계속 따라온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영어는 빨리 시작한 아이라던지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시작한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동기를 가진 아이의 언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엄마들에게 꼭 하고 싶은 또 한 가지의 말.


그러니까, 강요하지 말자.


엄마의 초조함과 불안은 아이를 앞서가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 안에 막 싹트기 시작한 ‘영어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감정,

‘말이 통하면 세상이 넓어질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을 조용히 꺾어버린다.


영어를 어렵게 만드는 건 아이의 능력이 아니라, 아이보다 먼저 불안해지는 어른의 마음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발음도, 조급한 커리큘럼도 아니라,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틀려도 괜찮아.”

“영어는 너를 더 자유롭게 해줄 거야.”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엄마의 믿음이다.


동기가 살아 있는 아이는, 언젠가 반드시 스스로 영어를 다시 찾는다.

그때까지 엄마는 아이의 속도를 믿고 그저 곁에서 즐겁게 함께해주면 된다.


그게 내가 영어를, 그리고 영어 교육을 대하는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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