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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Sep 22. 2016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은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 <무라>

어느 봄날, 겨울눈이 미처 다 녹지 않은 산허리를 끼고 차를 달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아들이 있었다. 사는 게 힘들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보고 싶었고, 그렇게 부자는 삶의 굽이굽이를 방문하기 위한 열흘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길 위에 선 아들은 아버지 인생의 전부를 묻고자-물어보고자- 했지만, 아버지는 오직 좋았던 것만을 답하고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묻고자-묻어버리고자- 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고, 오랜 시간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이제 이 여행이 끝나려 한다. 분명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아버지의 인생은 이제 아들의 그것 앞에 작별을 준비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연극 <무라>는 철길 아래에서부터 항구와 호수, 거리와 집터, 방과 방 사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하수민 연출이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여행을 모티프 삼아 만든 것으로, 애초엔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영상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가 다시 거기에 허구의 이야기를 입혀 무대화한 것이다. 하여 이 작품에서는 특정 공간과 장소로부터 환기되는 과거의 기억이나 감각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두 배우의 몸과 말뿐이니, 관객들은 그들의 눈빛과 호흡, 침묵과 행간에 의지해 이 여행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하는 동안 아버지가 ‘무라’라는 말을 두 번 쓰셨는데 돌아오고 나니 그 말이 더 큰 의미가 되더라. 극 중 아버지는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부모하고 자식지간에는 무라. 아무것도 없는 기라”라고 말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상 앞에 아들을 마주보고 앉아 잘 먹으라는 뜻으로 “부지런히 무라”라고 말한다. 무대에서는 다른 것들을 다 걷어내고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그 인물들 각각을 오롯이 보여주고 싶었다. 말하자면 표정과 움직임으로서의 지표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해 가는지 눈여겨 봐주셨으면 한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집을 나갔고, 길바닥에서 잘 거면서 희한하게도 양복은 챙겨 입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파서 앓고 있는 세 살배기 아들을 내다 버렸고, 간신히 살아나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책가방 대신 지게를 메게 했다. 살기 위해 집을 나선 아버지는 온갖 군데를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어머니를 만나 꽃 같은 시절도 보냈고 동글동글한 아들이 마냥 예쁜 날도 있었다. <무라>의 아버지는 스스로의 인생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면서도 아들 앞에서는 한사코 밝은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싶어 한다. 허세를 부릴지언정 원망하지 않고, 과거를 외면하는 한이 있어도 현재에는 떳떳하다. 아버지 역할의 배우 김홍파는 이런 인물에 대해 그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이 인물은 자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들과의 여행에 선뜻 따라나서는 것도 떠나기 전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인데, 아들은 계속 아픈 것들을 들춰낸다. 그저 부지런히 먹고 열심히 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아들 덕분에 마침내 아버지는 가슴 깊숙한 곳에 있던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오히려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작품을 하면서 나와 아버지, 그리고 나와 아들 사이를 돌아보게 되는데, 우리 사이도 이 부자지간처럼 평소에는 별 대화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우리만의 믿음, 말이 필요 없는 소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극이 사회 전반적으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아들은 살고 싶었다


아들은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행 내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이 아버지와 비교해 어디가 닮았는지, 혹은 어떻게 다른지 관찰한다. 짐짓 아버지의 말에 박자를 맞춰 주다가도 정색하며 따져 묻고 홀로 생각에 잠겨 자기 안으로 침잠하길 반복한다. 아들은, 미움인지 미안함인지 설명할 길 없는 내면의 갈등이 배음(背音)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도록 내버려둔다. 그러고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른다, 사는 게 힘들다고 아버지 앞에서 운다. 아들 역의 배우 서동갑은 이러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숙제’라고 이야기하며, 이 인물이 아버지를 찾아간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진짜 인생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극 중 아들은 아버지가 무엇을 덮어버리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 역시 힘들 때마다 떨쳐 버리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니 단지 그것이 좋은 기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진실을 감추려드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기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결국 부딪치고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이런 순간들도 지나가겠지만, 그래서인지 이 여행 자체가 아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삶,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인생, 그것이야말로 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 제공]




일시: 9월 7~25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 화 쉼 (14일~16일 추석 공휴일 6시)

장소: 대학로 나온씨어터

작·연출: 하수민

출연: 김홍파, 서동갑

문의: 070-8719-0737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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