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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Aug 07. 2015

대중문화 아이콘과 현대미술의 성급한 만남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피스마이너스원>의 아쉬움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아이콘인 지드래곤과 서울시립미술관이 함께 연 전시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는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난해한 현대미술이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활용해 재치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길 기대한 관객에게 엉성한 전시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시도에 대한 가능성의 여지는 남아 있다.


2년 전 런던에서 디자인 큐레이션이란 다소 생소한 분야의 공부를 하고 돌아왔을 때 지인들은 하나같이 런던에서 뜨는 문화 트렌드를 물어왔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대답 대신 늘 얘기한 사람이 있었다. 대단한 미술관 관장도 아니요, 유명 작가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런던의 명물, 까만 블랙캡(런던 택시)에서 만난 이름 없는 택시 기사였다.



런던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자연사박물관에 가려고 블랙캡을 탔다. 실핏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런던의 골목길을 요리조리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던 택시가 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기사가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전시 봤어요? 며칠 전 봤는데 인생 최고의 전시였어요. 데이비드 보위, 우리의 우상을 박물관에서 만나다니요!” 예순 언저리, 정수리에 흰 서리가 제법 내린 노년의 기사가 가리킨 건 자연사박물관이 아니었다. 바로 맞은 편 V&A(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던 데이비드 보위 회고전 <데이비드 보위 이즈>였다.



어느 나라든 택시 기사는 그 나라 민심, 민도의 바로미터다. 타자마자정치 얘기를 늘어놓는 한국의 택시에선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한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한 세대를 풍미한 팝 아이콘을 올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려는 박물관의 유연함도 놀라웠다. 미술관은 미술관다워야 하고, 박물관은 박물관다워야 한다는 해묵은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그렇다고 그 수준이 퍽 감동적이지도 않은) 우리네 문화 기관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나중에가본 보위 전은 기대 이상이었다. 단순히 그의 음악 세계를 조명한 것이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패션 디자인, 비디오 아트, 사회상까지 아우른 입체적인 전시였다. 대중의 환호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드래곤을 모티프로 기획된 전시 <피스마이너스원>은 팝 아이콘과 작품의 유기성, 개별 작품과 작품의 유기성이 떨어져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대중 엔터테인먼트와 공립미술관 협업의 온도차


몇 달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드래곤 전시를 연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거부감보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이 앞선 건 ‘블랙캡의 추억’ 덕분이었으리라. 고백하건대 ‘GD(지드래곤)’를 ‘Good Design(굿 디자인)’의 약자로 아는 선배를 한심하게 봤지만, 나 역시 20여 년 전 서태지에 꽂혀 있던 대중문화의 주파수를 그 이후로 돌려본 적이 없다. 지드래곤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관장 하나 제대로 못 뽑아 미술계 담론을 전혀 주도하지 못하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이렇다 할 이슈 없이 고인 물이 된 우리 미술계에 지쳐 있는 요즘, 간만에 논쟁거리가 생겼다는 자체가 반가웠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린 지드래곤의 전시 <피스마이너스원>은 감탄보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이번 전시는 표면적으론 지드래곤과 서울시립미술관의 협업이지만, 엄밀히 말해선 연예기획사 YG와 미술관의 협업이다. 먼저 제안한 건 YG 쪽이다. 최근 유통, 요식업까지 사업을 확장한 YG가 하이엔드 컬처인 아트 비즈니스에 손을 뻗는 첫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전략을 가장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YG의 ‘대표 상품’이 지드래곤인 것이다. 당연히 YG로선 지드래곤을 전면에 내세워 ‘지드래곤의, 지드래곤을 위한, 지드래곤에 의한’ 전시를 원했다. 



미술관 측은 지드래곤이라는 관객 끌기용 호재의 입성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순수 미술을 다루는 공립 미술관으로서 마지노선을 무너뜨리지는 않으려고 고심한 듯하다. 미술 전시를 강조하기 위해 지드래곤 자체를 부각하기보다는 지드래곤의 이미지와 현대미술의 공통점을 ‘실험성’으로 보고 이를 강조하려 했다. 그 핵심인 작가 선정을 두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개막 몇 주를 앞두고 무산 위기까지 갔다는 걸 보면 쏟아질 비판에 대한 미술관의 부담이 적잖았던 것 같다.




엉성한 기획, 주먹구구 진행이 낳은 아쉬움


양측의 입장 차가 전시 군데군데 드러난다. 입구에 들어서면 나오는 ‘(논)픽션뮤지엄’은 지드래곤의 가상 박물관이다. 지드래곤이 소장한 트레이시 에민의 네온 작품, 에토르 소트사스·장 푸르베 같은 디자인 대가들의 빈티지가구가 아티스트 그룹 패브리커가 연출한 공간 안에서 지드래곤의 사진과 함께 백화점식으로 나열돼 있다. 지드래곤을 보기 위해 온 관객은 눈을 반짝이고, 미술을 보기 위해 온 관객은 갈피를 못 잡는다. 



이 방을 벗어나면 유니버설 에브리싱, 소피 클레멘츠 등 해외 유명 작가들과 권오상, 진기종, 방&리, 송동현 등 국내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지드래곤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만든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가 그와는 관계없는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어떤 맥락에서 둘을 함께 전시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별개의 전시라면 차라리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겠단 생각마저 든다. “전시 초대를 받기 전까지 지드래곤이란 인물은 전혀 몰랐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서 기존 작품을 조금 수정해 가져왔다”는 한 영국 작가의 고백은 이 전시가 주도면밀한 기획이 결여된 채 주먹구구로 진행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대중으로부터 냉정한 평가를 채 받기도 전 예상 밖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한류 스타의 티켓 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주리라 철석같이 믿었던 중국과 동남아 팬들의 지드래곤 사랑도 느닷없이 찾아온 메르스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권오상 작가의 <무제의 G-Dragon, 이름이 비워진 자리>


대중과 현대미술의 좋은 접점이 다시 마련될 수 있길


며칠 전 다시 찾은 전시장은 한산했다. 그나마 삼삼오오 교복 차림으로 와 트레이시 에민의 네온 작품 앞에서 셀카를 찍어대는 고등학생 관객이 위안이 됐다. 그들에겐 영국 yBa(young British artists)를 이끈 핵심 작가의 작품이란 사실보다 ‘지디 오빠’의 소장품이란 게 더 중요한 듯해 보였지만 어쨌든 작품 설명은 한 번쯤 봤으리라. “저를 보러 왔다가 작품 이름 하나, 작가 이름 하나 외울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미술 공부 아니겠어요?” 간담회에서 말한 지드래곤의 바람이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때마침 오디오 가이드 속 지드래곤이 대본 읽듯 어색하게 현대미술 담론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뚝 말을 끊는다. “어휴, 제가 말하고도 뭔 말인지 모르겠네요!” 풋, 관객들의 웃음이 새 나왔다. ‘그래, 한류 아이돌도 어렵다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해!’ 지드래곤의 솔직함이 현대미술의 난해함 앞에 잔뜩 긴장한 관객의 숨통을 틔워줬다. 그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는 아직 못 될지언정 젊은 관객이 미술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누가 알겠는가, 지드래곤을 보러 미술관을 찾은 10대 관객이 런던 블랙캡 기사의 나이가 됐을 때, 지드래곤이 데이비드 보위 같은 베테랑 뮤지션이 됐을 때, 한국의 문화 수준이 우리가 지금 부러워하는 예술 선진국의 그것을 능가하게 될지.




글 김미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미술, 건축,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영국 킹스턴대에서 큐레이팅 컨템퍼러리 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았다.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 이 글은 「문화+서울」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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