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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Apr 20. 2017

당신의 목소리를 빌려줘요

소수자의 목소리 담은 연극 <2017 이반검열>

성소수자 청소년과 세월호 생존자가 차별 당했던 당시의 경험담을 말하고 있는 공연 장면 (출처: 남산예술센터 )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말이 있다. ‘정상인’, ‘일반인’ 같은 말이다. ‘정상인’은 국어사전에서 ‘상태가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사람’이라고 나온다. 곧 의문이 생긴다. 탈이 없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제대로인 사람’은 어떤 누구를 설정하고 있는가? ‘일반인’의 뜻도 살펴보자. ‘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이라고 나온다. ‘특별한 신분’이나 ‘보통의 사람’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헷갈린다면 이 단어들의 반대어를 생각해보자. ‘정상인’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음. ‘혼이 비정상인’일까? 도대체 ‘일반인’이 아닌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러한 검열은 비단 예술계 블랙리스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단어에서 ‘정상’과 ‘일반’을 기준으로 보편을 설정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검열이 작동한다. 지난 4월 6일부터 16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렸던 연극 <2017 이반검열>은 바로 이 문제를 파고들고 있었다.


                                  남산예술센터 외부 모습(좌), 남산예술센터 내부 모습(우)


이반적으로 봤을 때


작년 어느 술자리에서 나를 포함해 4명이 앉았는데, 우연히도 나 혼자만 이성애자인 적이 있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그들의 고민도 들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남자친구/여자친구 있으세요?’라는 흔한 질문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달았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술자리에 앉은 4명이 이 세계의 전부라면, 그들이 ‘일반’이고 이성애자인 내가 바로 ‘이반’이 아닌가?  

‘이반’은 사회적으로 ‘일반’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성소수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면서 시작된 단어다. 연극 <2017 이반검열>에서는 이 의미를 확장하여 사회적 소수자를 광범위하게 일컫고 있었다. 공연은 성소수자 청소년과 세월호 생존자, 유가족들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은 ‘특별한 신분의’, ‘탈 있는 사람’ 즉, ‘이반’의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연극은 ‘이반’들이 얼마나 ‘정상’을 부르짖는 사회에서 폭력을 경험해왔는지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연극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어떤 차별과 폭력이 구체적으로 가해지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상을 꼬집고 있는 공연 장면 (출처: 남산예술센터)


말을 빌려오는 재현의 방


소수자나 피해자를 예술 작품으로 재현할 때 창작자는 윤리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상투적인 문법으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면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연출가는 관객으로부터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또 사려 깊지 못한 재현방식이 표현 대상을 오히려 볼거리로 전락시키거나 심지어는 2차 폭력이 될 가능성도 많다. <2017 이반검열>은 그런 면에서 재현 방식이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재현방식은 대상을 바라보는 연출가의 태도와 직결된다.  

아마 연출가는 소수자의 언어를 자신의 능력과 경험으로는 재구성할 수 없음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2017 이반검열>에서 나오는 모든 대사는 단 하나도 새롭게 쓰이지 않았다. 원래 있던 말들을 그대로 배우의 입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연주 연출가는 이 극을 준비하면서 차별과 배제를 당했던 소수자들의 구술 인터뷰를 접했고, 이 대사를 대체할만한 대사를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말을 그대로 빌려오는 재현방식을 사용한 것이었다. 

훈련된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지만, 실제로 그 인물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배우는 단지 목소리를 빌려주는 일종의 매개자에 불과했다. 동시에 어떤 대사를 얼마나 들려줄 것인지는 연출가의 명백한 구성이었다. 따라서 <2017 이반검열>은 논픽션이면서 픽션이고, 극이면서도 다큐멘터리이기도 했다.     


                          차별이 혐오와 학살로 이어졌던 과거사를 재연하는 장면  (출처: 남산예술센터)


통합의 의미


대선이 다가오면서 누구나 ‘통합’을 외치고 있다. 그들은 분열은 안 된다며 통합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을 ‘하나로’, 혹은 ‘한마음으로’ 만들겠다는 지도자를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겠다며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가해왔는가. ‘정상’ 이데올로기는 성소수자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는가. 통합을 강박적으로 외치는 사람일수록 소수자는 언제나 ‘나중’의 문제일 뿐이며, 우리는 그런 사례를 항상 목격해왔다. 김규항 평론가가 SNS에 쓴 글을 보고 많은 공감을 했다.  


한국 사회의 숙제는
통합이라는 헛소리.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통합할 수 없는 것,
통합해선 안 되는 것들을
통합하려는 폭력의 역사였다.
사회는 통합할 수 없다.
통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를 없앤 사회, 파시즘이다.
한국 사회의 숙제는
통합이 아니라 제대로 된 분열,
즉 민주주의다.
- 평론가 김규항 


<2017 이반검열>은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얼마나 소수자를 차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보기를 멈추고, 이제는 이반적으로 사회를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2017 이반검열>은 이연주 연출가가 구성했으며 극단 ‘전화벨이 울린다’의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한국 예술계에서 일어난 검열사태에 맞서는 연극인들의 프로젝트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에 참여했던 <이반검열>을 발전시킨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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