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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개인전 <노아의 방주>

상처 입은 현대인의 동화

by 서울문화재단
더 즐겁고 다 행복한
상처 입은 현대인의 동화
강호성 개인전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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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좋은 소리>


슬픈 표정으로 울거나 허공을 초점 없이 응시하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이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임은 분명하다. 한창 웃으며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지은 채 망연자실한 모습의 아이들을 표현한 저 그림의 사연은 뭘까.

강호성 작가의 개인전 <우리 시대의 동화 : 노아의 방주>이 열리고 있는 성북구에 위치한 서울예술치유허브에서 2층 갤러리 맺음을 찾아갔다. 마침 갤러리에 작가가 나와 있어 오랜 시간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https://youtu.be/yx5qEuLkdcY

강호성 개인전 '노아의 방주' 영상 보기



슬픈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이들의 표정

각기 다른 미술 전시를 방문해보면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강호성 작가의 개인전도 발걸음을 전시장 안으로 옮기자 곧바로 묵직한 공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러한 느낌을 받으며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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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울고 있는 아이, 날아가 버린 새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 기도하고 있는 아이, 말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서로 앉은 채 각자의 시선을 훔치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국화 재료로 비단에 곱게 채색한 형식의 그림이었지만, 눈빛을 잃은 아이들의 표정이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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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소망자리>


‘순수’한 아이들의 동화적인 이미지로 ‘상처’를 말하는 역설적인 표현 방식, 어떻게 보면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작품 캡션 이외에 아무런 텍스트가 없는 전시장에서 그림을 감상하니 슬픈 느낌과 함께 몇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누구의 상처를 표현하는 것인가? 왜 어린 아이인가? 이런 그림을 그린 작가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전시를 하는 모든 작가는 관객이 ‘열린 해석 가능성’을 가지고 작품 앞에서 자유롭게 유희하기를 원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바로 물어봐야 했다. “왜 그렸나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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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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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산초판자>



예쁘기만 한 그림에서 상처를 공감하는 그림으로

강호성 작가는 예술의 역할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작업을 진행해오다가 최근에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과 상처가 많은 현대인의 마음을 그림을 통해 공감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러한 마음을 먹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세월호 참사였다고 이야기했다. 본인이 가르치는 고등학생을 그리고 있는 와중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진행하고 있는 그림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다른 스토리가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상처받은 현대인’의 이미지를 아이들의 모습으로 투영했다는 것도 사실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고, 상처의 극복을 위해 자신의 결심에 확신을 가졌던 노아의 방주를 차용했다는 설명도 백프로 공감하기는 힘들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들었던 생각은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것. 예술에 대한 정의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예술의 역할’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던 한 작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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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안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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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나의 파랑새>



상처의 극복은 노아처럼

“왜 제목이 노아의 방주인가요?” 재차 질문했고 작가는 자세하게 답해주었다.

저는 <노아의 방주>를 통해 각 개인들에게 공감을 표현하고 싶어요. 그리고 치유의 방법을 남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던 노아의 모습에서 찾고자 해요. 우리 시대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의가 눈앞에서 무너지는 게 낯설지 않죠. 이 와중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커지게 되면서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사회가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각종 어려움에도 자신이 믿는 신념, 그리고 본인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으로 현재의 불안과 결핍을 극복해 나가길 바랍니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대로 ‘정의가 무너진’ 불균형한 사회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상처는 대부분 정치적인 해결을 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지 개인적인 자존감의 회복으로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까? 만약 현대인의 불안과 상처가 개인적인 차원으로 머물러 있다면 위로와 공감만으로도 치유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면, 그때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술로 치유가 가능할까? 공감만으로 치유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할까? 나는 여러 물음을 던졌지만 정해진 답은 없었다.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강호성 작가의 전시를 보면서 품을 수 있는 질문에 각자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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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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