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人_웹진] 기억의 신기루-양배추는 그냥 양배추
주의사항1. 유래가 아닌 유례
‘유례’의 사전적 정의는 ‘같거나 비슷한 예’. 그러니까 양배추의 유례란 양배추와 같거나 비슷하다는 뜻이다. 남자의 기억이 양배추 속으로 들어갔단다. 양배추? 웬 양배추? 왜 양배추?
주의사항2.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오
인물들을 파악 하려고 하지 마라. 저이가 과거에 어쨌고, 현재 어쩌고 있으며, 미래 어쩔 것인지 파악하려고 하는 순간... 끝장이다. 다만 보라, 그리고 함께 있어라. 지금 존재하라.
주의사항3. 웃음을 참지 마시오
그들이 당신을 웃기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이 우스웠다면 그저 웃어라. 남들과 다른 타이밍에 웃음이 나오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반대로 눈물이 나면 울어도 좋다. 그렇게 하라. 무대 위의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실은 당신 옆자리에 앉은 이도 그렇게 하고 싶다.
이해하려하지 않고 감각한다면, 기억과 개연성을 찾아내려 하지 않고 함께 존재한다면, 왜 양배추인지 추리할 시간에 무대 위의 그들이 되어본다면, 이 연극은 어렵지 않다. 재미있다. 때론 슬프다. 그저 양배추와 같거나 비슷해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맡은 바를 행하기 위해 “왜 양배추인가요?”라는 질문을 관객을 대표해 던져보았다. 수줍은 질문에 따뜻하고 열정적으로 대답해주신, 윤혜진 연출가와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정재성, 오민정 배우, 임윤진 기획PD를 만났다.
임진선
연출님은 이 작품에 대해 먼저 알고 계셨던 건가요?
윤혜진
작품도 작품인데 전 작가를 좋아해서. 마에다 시로의 작품은 굉장히 어렵지만 매력적이거든요. 애정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임진선
마에다 시로 작가의 작품들 중 <양배추의 유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윤혜진
이 작품은 기존의 희곡들과는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어요. 기억의 조각들로 나열되어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흐름이 있는 드라마, 이야기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와는 굉장히 차별성을 가지고 있죠. 편집점이 있는 텍스트여서, 연극적 보단 영화적인 텍스트에 가깝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왔어요. 이걸 영화가 아닌 연극으로 무대에서 올렸을 때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어떤 연극성을 갖게 될까? 생각 했었던 거 같고. 그래서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임진선
오늘이 공연 이틀차인데, 어제 보신 분들과 오늘 보신 관객 분들 반응은 어떤가요.
정재성
스펙트럼이 다양하더라구요. 누구는 쉬웠다. 편했다. 재밌었다. 어렵다. 뭔 말인지 모르겠다. 중간이다. 코미디인 것 같은데 코미디가 아니다. 굉장히 다양해요. 그게 다 맞다고 봅니다.
오민정
번역가 이홍이 선생님은 그 얘길 했어요. 마에다 시로의 작품은 코믹 같은데 웃고 즐기다보면 뭔가 짠- 하고 오는 게 있는 게 특징이라고.
윤혜진
일본에서 마에다 시로 작가를 평가할 때, 마에다 시로의 표현들이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고 해요.
임진선
정해진 틀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쓴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윤혜진
근데 마에다 시로 작가가… 천재라고 할까요? (웃음) 되게 쉽게 쓴 것 같은데 전혀 쉽지가 않아요. 2014년 한일연극교류협의회의 프로그램에서 소개 된 <위대한 생활의 모험> 같은 경우에도 이 모 작가가 너무 맘에 들어서 필사를 했대요. 정말 되게 쉽게 쓰여진 것 같지만 사실 어렵고 촘촘하게 쓰는 작가에요.
정재성
특징인거 같아요. 일본 작가들의 정교함. 이 작품도 처음 봤을 땐 날림이야 뭐야? 했는데. 연습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렇게’ 움직여야 되더라고요, 그렇게 안하면 완전히 다른 게 되어버려요.
임진선
<양배추의 유례>는 주제도 관념적이고 서사도 분명하지 않아서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혜진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의 흐름은 있으나 기승전결이나 원인과 결과 같은 형태로 드라마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해하려고 하면 그 다음 씬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조각난 기억들의 연결들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그냥 그때 그 상황, 지금 이 순간 펼쳐지는 상황들을 눈으로 쫓아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업을 하면서 도대체 이 텍스트는 뭘 의미하는 걸까, 이 장면은 뭘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엔 틀 안에 가둬서 의미화 하지 말자고 했어요. 이 안에 숨어있는 모든 것들이 작품을 만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롭게 해석될 수 있도록요.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이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보시면서는 이게 뭘까, 라는 생각이 드실 텐데. 집에 가서 혹은 먼 훗날, 나와 비슷한 상황들. 나와 만난 연극들 속에서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구요.
한 남자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지만 저 남자의 특별한 사건이나 삶이 아니라, 저 남자가 내가 될 수도 있고 너도 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임진선
왜 양배추일까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오민정
그 얘기 우리도 했었던 거 같아요. 왜 양배추지? 왜 작가가 하필 양배추를 선택했을까? 이상한 얘기들 많이 나왔어요. 뇌 모양을 닮았다 라든지. 일본에선 아침에 매일 양배추 먹더라, 이런 얘기도 하고. 근데 마에다 시로 조사하면서 찾은 인터뷰에서 봤어요. 작가는 양배추의 종류처럼 사람들도 양배추의 종류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 했다고 하더라구요.
정재성
근데 꼭 양배추가 아니어도 될 것 같아요. 맥거핀이라고, 히치콕이 자주 쓰는 방식이죠.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게 양배추가 아니라 호두일수도 있고, 호두의 종류도 가지가지고. 양배추도 종류가 있지만 그 안에 생긴 모양은 다 다르니까. 그래서 유례죠. 비슷한 예.
윤혜진
맞아요. 저희가 마에다 시로를 잘 알진 않지만. 마에다 시로가 했었던 작품들을 보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마에다 시로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되게 심오하죠.
임진선
작품에서도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게 전개하지 않잖아요. 그게 기억의 파편이라는 주제를 얘기하는 것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고. 상황 상황들이 재미있었어요. 무대는 검은 배경에 그네 두 개 뿐이었어요. 기억의 공간을 상징하는 무대인가요?
윤혜진
무대는 대본에 굉장히 충실했는데요. 지문에 “무대에는 그네 두 개만 있다”.
정재성
“어디든 되고, 어디든 아니다.”
윤혜진
그네 사이즈는 저희가 분리시킨 거예요. 앞쪽을 남자의 그네. 뒤쪽은 남자 기억속의 그네.
임진선
또 춤이 계속 나왔는데요.
정재성
춤은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윤혜진
어떤 춤을 춰야할 것인가. 잘 추진 않을 것 같고, 막춤도 아닐 것 같고. 그래서 리서치를 많이 했어요. 마에다 시로가 만들었던 영화도 비슷한 코드가 많이 나와요. 일본영화에서도 힌트를 많이 얻었어요.
정재성
춤이면서 춤 같지 않은걸 찾기 위해서 다양한 자료를 찾고 많이 시도했어요. 이걸로 해보자 해서 진행해보고, 아닌 것 같다 하면 폐기. 아닌 것 같다 하면 또 폐기. 전 세계의 이상한 춤은 다 뒤져보고. 동물행동도 찾아보고. 하여간 되게 이상한 춤.
윤혜진
하지만 되게 열심히 추는 춤. 목숨을 다해.
오민정
조연출도 다 붙어서. 그 대사가 뭐였죠? 애들도 죽을힘을 다해...
임윤진
“애들도 목숨 다 해 하는 거야.”
윤혜진
네 그런 춤이었어요. 목숨을 다해.
임진선
사실주의연극에서는 인물에게 전사와 드라마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잖아요.
정재성
전사 없고, 드라마 없고, 캐릭터가 없고. 대표 이름만 있죠. 여자. 남자. 신. 동생. 사람이 대본을 받으면 아무리 드라마 아닌 대본이라도 드라마처럼 이해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야기도 완전 다르고. 어떻게 하지 고민을 많이 했죠. 저는 ‘나구나’ 했어요. “나다. 내가 현재 기억을 잃었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저한텐 어제가 없으니까. 처음 누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할까. ‘인류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다’라고 어떤 사회학자가 얘기했는데. 그럼 그럴 수 있겠다. 두려움이겠다.” 기억은 잃었지만 사람은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생각했어요. 관객이 이해가 될 것 같다 하면 하는 거고 아니다 하면 바꾸고. 그래서 오래 걸렸어요. 말이 안 되니까. 재미있는데 말이 안 되니까.
오민정
3~4년 전에, 한창 신기루만화경에서 낭독모임 같은 걸 하고 있었거든요. 이 작품은 그때 처음 봤어요.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근데 이건 공연은 좀 힘들 거 같애. 나보고 이런 거 하라고 하면 못할 거 같은데? 하면 내가 보러가야지 그랬는데… 역시 직접 실연하는 건 다른 문젠 거 같더라구요. 근데 의외로 작업은 다 같이 즐겼던 거 같아요. 큐빅을 푸는 것처럼.
정재성
제일 힘든 건 어느 정도 톤으로 해야 하는지. 톤이 참 미묘해요. 조금만 달라도 다른 얘기가 되니까. 지금 저희가 최선을 다해 찾은 건 지금 보여드리는 공연인데, 이게 정답이라고는 말 못해요. 해답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정도. 다른데서 만들면 또 다르겠죠?
임진선
그런 과정이 작품이 하는 얘기와도 또 닮아있네요.
정재성
이 작품이 요구하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오민정
이 작품을 하면서 가장 든 생각은 내가 내 자신에게 얼마만큼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정직한가? 더 정직해야하지 않을까?
정재성
그게 세트의 도움도 없고. 음악의 도움도 없고. 75분을 때워야 하니까. (웃음)
임진선
최근 사실주의 서사극이 많이 사라지는 추세예요. <양배추의 유례>도 서사위주가 아닌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구요.
윤혜진
이건 되게 연극적인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에다 시로의 글쓰기는 훨씬 현실적이고 현재를 감각하는 글쓰기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 삶이 기승전결에 의해서 만들어진 드라마처럼 흘러가지 않잖아요. 제가 집에 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마에다 시로의 글쓰기는 굉장히 현실적인 글쓰기라 생각해요.
정재성
21세기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이야기 보다는 현재성. 요즘 유럽 쪽 연극은 몸을 많이 쓰죠. 미술사도 그렇잖아요. 그림에 대상을 지우고 그 다음엔 그림 그리는 사람도 지우고. 그 다음에는 두 개를 설명하는 것도 다 지워버리고 이게 미술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극도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게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거는 언제 얘기해도 되니까. 언제 해도.
임진선
‘기억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기억은 완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잖아요. 저는 연극이 기억과 마찬가지로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순간 존재하고,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그 기억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매력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연극은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연극이 완전해진다는 게 뭘까요?
정재성
텍스트만 남는 것. 텍스트만 있으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나면 끝이죠. 현장성이고. 그게 연극이 아름다우면서 연극의 한계인거죠. 연극 자체가 그런 거니까.
윤혜진
연극은 그냥 세계가 종말하기 전까지 계속 현재랑 같이 흘러가니까. 완전을 마침표로 찍지 않는 다고 한다면, 연극은 지구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완전하지 않을까요. 완성되는 과정을 따라간다고 해야 하나. 계속 존재하지 않을까 싶어요.
임진선
멋있는 말인데요.
윤혜진
좀 어렵죠. 기억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이걸 쉽게 얘기하자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나의 기록들 있죠. 나의 환경들, 나의 과거들, 나의 이력들 같은 것들로 나를 판단하잖아요. 과연 그것이 이 사람의 존재를 다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여기 딱 존재하고 있는데. 왜 이것만으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 그래서 인간은 자꾸 부질없이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잘 만들기 위해서 미래에 희생한다고 해야 하나.
정재성
미래에 저당 잡혀 사는 거지.
윤혜진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일본의 희곡들을 공연으로 접할 때면 긴장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희곡 특유의 일상적인 듯 비일상적인 정서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인데도, 나에게 쉽사리 곁을 주지 않기 때문에다. 연인의 심리를 궁금해 하듯 “왜 양배추일까”를 추리하며 봤더라면 왜 양배추인지 알지 못한 채로 극장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공연을 관람하니, 나름 만족스러운 답을 가지고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양배추는 그냥 양배추였다.
6월 21일에는 극작가뿐만 아니라 배우, 연출, 방송작가, 영화감독까지 섭렵한 <양배추의 유례> 작가, 마에다 시로가 공연을 보러 온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번역한 이홍이 번역가, 윤혜진 연출가와 함께 공연이 끝난 후 작가와의 만남을 가질 거라고 했다. 아… 이런 미래라면, 저당 잡혀도 좋지 않을까.
사진 _ 김지성 jasonk17@naver.com
임진선 극작가
2015년 <먼로, 엄마> 로 처음 관객들을 만났다.
앞으로도 꾸준히 글 쓰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은 사람.
lovely_m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