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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ul 13. 2017

④ 육아맘이 바라는 문화정책

[문화+서울] 새 정부에 바란다!

한 토크 프로그램에서 연극을 전공한 초등학교 방과후교사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낯설고 쑥스러워하던 아이들이 수업을 통해 표현력도 좋아지고 훨씬 밝아졌다며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감사의 인사까지 받은 그지만, 계약 만료의 문턱 앞에서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사연이었다. 직장을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더 이상 아이들의 꿈과 함께할 수 없음에 눈물을 보이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연극이라는 것을 경험한 아이들이, 순수한 예술가와 꿈을 나눈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남달라 새로운 것을 알아가거나 도전하는 게 곧 즐거움이었다. 맞벌이인 부모를 대신해 큰아이를 키워준 시어머니는 그런 손자의 성향을 알고는 김치를 담글 때나 만두를 빚을 때도 아이가 할 수 있게 자리를 내주셨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그릴 때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조용히 기다려주셨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상 시간의 여유가 있던 남편은 시간이 날 때면 아이와 함께 전시관이나 체험행사들을 찾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아이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워킹맘에서 육아맘이 된 나는 나름의 기대가 있었다. 이제껏 시어머니와 남편이 아이 곁에서 좋은 조력자가 돼주었다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 역할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 사이 작은아이가 태어났고 미처 경험하지 못한 육아라는 치열한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무엇보다 큰아이를 향한 거절과 이해가 반복되었고 아이를 방치하는 시간도 그만큼 많아졌다. 사설 학원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아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채워줄 수도 있었지만 시간과 돈,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두 아이와 지하철로 움직여 세계요리를 체험하는 한 달간의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몸살로 앓아눕고 말았다.




문화예술, 생활 그 자체가 되길

큰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유일한 곳은 다름 아닌 방과후학교이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자 초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과후학교는 정규 수업 이외에 음악이나 체육, 컴퓨터, 한문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들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적은 비용으로도 다양한 수업을 경험할 수 있으니 엄마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고, 아이 역시 평일 오후를 따분하게 보낼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부모로서 아쉬움이 있다면 문화예술 관련 과목들이 악기 수업이나 공작놀이 등에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의 범위가 문학과 영상, 공연과 문화활동 전반을 모두 포함한다고 했을 때, 현재 학교에서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론 누군가는 좀 더 커서 해도 될 일을 굳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접할 필요가 있냐고, 쓸데없는 것이라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학교 재량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과목을 개설하기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이나 잣대가 아이의 생각과 마음에 자리 잡기 전에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결과물들이 생산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은, 교육이나 학습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사유와 인식의 폭을 넓히는 일일 것이다.

아쉬움을 넘어 더 큰 바람이 있다면 방과후학교뿐만 아니라 집 주변의 일상공간에서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단순히 특정 수업에 도움이 되거나 아이의 발달에 이롭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문화 그 자체로서 말이다. 학교를 마친 아이가 근처 예술창작공간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정크아트를 만들고, 동네 형, 누나들과 함께 연극 연습을 하며, 사진작가 누나를 따라 근처 공원으로 ‘출사’를 나간다면 우리네 삶의 풍경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언젠가부터 청년실업 문제나 예술가들의 경제적 빈곤에 관한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되고,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일자리예산이라는 명목의 경제적 지원에 그침으로써 실제적인 일자리의 사회적 효과는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지역사회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청년예술가들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펼쳐놓을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닐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예술과 기술, 과학과 문학이 서로 교차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살면서 하나의 목표에 아이들을 줄 세우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경험을 되도록 많이 접하게 해주고 싶다. 그 쓸데없는 경험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쌓인다면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글·사진 
정연희(호기심 많고 체력 넘치는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육아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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