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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ul 13. 2017

⑤ 문화예술인이 바라는 문화정책

[문화+서울] 새 정부에 바란다!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

세월호가 그랬듯이 블랙리스트 문제도 벌써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 재판에서 다 밝혀질 텐데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왜 또 만드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고, 험악한 시절 잘못 만나 벌어진 일인데 뭐 그렇게 시시콜콜 다 밝혀내야겠냐며 눈치를 주기도 한다.

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주관하는 ‘2015년도 공연예술창작산실’ 심의에 참여했다가 문예위 직원들로부터 박근형 작·연출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배제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를 비롯하여 심의위원들이 선정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고 하자 직원들은 박근형 연출을 직접 찾아가 ‘포기 각서’까지 받아내고, 극단 대표가 해야 할 공연 포기 신청까지 직원들이 행정 시스템에 조작 입력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직원 중 장모 씨는 문예위 감사와 최근 재판 과정에서 심의위원이 박근형 연출의 포기를 먼저 제안했고 자신은 포기 각서만 받으러 갔다는 식의 위증을 했다. 심지어 법정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향해 장문의 편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마치 피해자인 양 위선적인 행태를 보였다.

문예위 직원들은 박근형 연출이 배제되지 않으면 창작산실에 선정된 나머지 7개 작품마저 공연할 수 없을 것이며, 창작산실 지원사업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심의위원들을 협박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2015년 9월 9일, JTBC를 통해 폭로했는데 그 후 7개 극단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박근형 연출만 검열을 당한 것이 아니라 7개 극단의 작품들까지 모두 검열을 당한 마당에 과연 지원금을 받고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해야 할 것인지가 고민거리였다. 게다가 그 7개 극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보는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연극계 최고의 지원금이 걸린 공연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결코 쉬울 수는 없다. 더구나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젊은 작가들의 자괴감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7개 극단들 사이에 공연 포기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들었으나 결국 7개 공연은 차례로 막이 올랐다.

당시 나는 그 7개 극단들이 합심하여 공연을 포기하고 박근형 연출과 함께 검열반대 투쟁을 벌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엄청난 고뇌에 빠져 있는 동안 나마저도 괜히 폭로를 했다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심지어 7개 극단이 정말 공연을 포기하고, 문예위 직원들이 협박했던 대로 그 사업 자체가 없어져버린다면 나한테 온통 비난의 화살이 쏠릴 것만 같았다. 그 후 지난해 가을 9,473명의 구체적인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나를 비롯하여 검열반대 투쟁을 함께했던 현장 연극인들이 겪었던 분노와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 청산과 화해의 노력


이처럼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문예위 공무원들의 블랙리스트 부역 행위는 단순히 지원에서 배제된 예술가들에게만 피해를 끼친 것이 아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연극계는 서로 의심하며 분열되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매도하며 사분오열되었다. 6월 13일에 발표된 감사원 감사 결과에 의하면 일부 심의위원들이 문예위 심의에 들어가기 전에 공무원들과 미리 ‘공모’하여 지원배제 시나리오까지 짰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문예위 심의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는 심의위원들 역시 블랙리스트의 피해자들이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문예위 직원들이 블랙리스트 실행에 조직적으로 가담했다. 블랙리스트 실행에 미온적이어서 좌천되었다가 최근 문체부 요직에 복귀했다고 알려졌던 김모 씨는 감사원 감사 결과 가장 악질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 진행 중인 블랙리스트 관련 재판은 차관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의 범죄 사실만을 따지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 아래 문체부와 문예위 공무원들이 저질렀던 실질적이고도 조직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마땅한 징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블랙리스트의 실행자들이 여전히 문체부와 문예위에서 현장 예술가들을 상대하는 지원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현실은 가장 참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제까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와 <검열백서> 발간 작업이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취임과 더불어 정부 차원의 기구에서 새롭게 진행될 예정이다.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범죄 행위 및 부역 행위들을 낱낱이 밝히려는 노력들이 자칫 피해자들의 보복 행위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검열백서> 발간 작업은 가해자들에게 최대한 자발적인 사죄와 협조를 구하고 있으며, 이는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려는 험난한 여정이다. 블랙리스트 재판은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글 
김미도(연극평론가, 검열백서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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