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서울] ‘파킹찬스’(PARKing CHANce) 박찬욱·박찬경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열리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하이라이트>를 위해 데이비드 린치,
론 뮤익, 장 미셸 오토니엘, 레이몽
드파르동 등 현대미술계의 첨단에
놓인 작가들의 작품이 서울을 찾았다.
박찬욱 영화감독과 미디어 아티스트
박찬경 작가로 이루어진 ‘파킹찬스’
(PARKing CHANce)는 이 전시에서
최신 3D 영상과 음향으로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격세지감>을 선보이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바로 전시 오프닝에 달려온
박찬욱, 소격동 국제 갤러리에서 개인전
<안녕>을 열고 있는 박찬경 형제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초현실주의는 어느 날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게 해줄 보이지 않는 광선이다. (중략) 이 여름 장미는 파랗다. 숲은 유리다. 녹음의 옷을 입은 대지는 유령처럼 나에게 별로 깊은 인상을 심지 못한다. 산다는 것과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_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중
“1999년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를 제작할 당시, 이 영화가 잘못되면 감독인 나나 제작자 중 한 명은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아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날아온 박찬욱 감독은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6.15 남북정상회담, 남북공동선언 발표에 이어 급진적으로 화해 무드가 형성되었고, 이산가족 상봉과 각종 교류가 이어졌어요. 곧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죠. 남북관계는 항상 예측 불허에 긴장과 화해를 오가는데, 1999년만 해도 연평해전이 있었고, 많이 긴장된 분위기였거든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JSA>가 시기를 잘 탄 기획영화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영화를 준비할 때는 오히려 긴장이 팽팽했던 시기라 아무도 2000년 6월 이후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는 특유의 명쾌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북한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영화를 만들면서 남북관계가 긴장된 분위기일 때 극장에서 상영해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기를 바랐죠. 영화의 운명이나 흥행은 예측할 수가 없다는 면에서 인생과 참 닮았어요. 당시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JSA>가 사회적 현상처럼 인기를 끌었어요. 남양주 세트장은 작품의 성공과 함께 관광지가 되었고요.”
그랬다. 남양주 세트장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판문점과 군사분계선 등에서 영화의 몇몇 장면을 흉내 내며 개별적 영화적 체험을 반추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7년이 지나 남양주 촬영장을 다시 찾은 박찬욱, 박찬경 형제는 단어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안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더군요. 창고처럼 사용하다 방치된 공간이었어요. 처음에야 찾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점점 발길이 줄어들었으니까요. 카메라로 그 내부를 고스란히 담았어요.” 작품 속, 먼지 쌓인 소품 위를 천천히 훑는 카메라는 중력을 거스른 듯 붕 떠 있는 상태로 스스럼없이 건물의 안팎과 세트장 곳곳을 파고든다.
형 박찬욱 감독이 <JSA>를 만든 2000년, 동생 박찬경 작가는 <JSA> 촬영장을 비롯한 남양주 세트장의 면면을 사진으로 담았고, 자막을 더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슬라이드 영상 를 선보였다. 두 사람이 파킹찬스로 뭉치기 전에도 이미 비슷한 맥락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박찬경 작가가 말을 잇는다. “그 공간이 지난 17년간의 남북관계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반짝했지만 그 뒤로는 방치되고, 지속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버려진 느낌이요. 이후의 대북 정책과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보면 더욱 그렇죠.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던 그 뜨거운 열기가 과연 진짜였을까 싶을 만큼 긴장이 심화되었잖아요. 참담한 마음이 들어요. 지난 17년간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품은 채, 형제는 일반 촬영보다 2배 이상 힘이 드는 3D 영상으로 남양주의 세트장을 새로 담았다. 기존의 영화에서 선별한 장면과 새로 찍은 장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완성된 <격세지감>은 한 편의 시처럼 여운을 남긴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초월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
눈앞에서 만질 수 있을 법한 영상과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화 속 장면으로, 촬영 장소였던 세트장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JSA> 촬영장에서 얼마쯤 생을 살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강렬한 경험이다. 42개의 스피커를 상영관 곳곳에 설치해 국내에서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3D 음향으로 소리의 질감을 다르게 표현했는데, 오프닝 직전까지 기술적 문제로 난항을 겪은 탓에 전시준비팀의 누구도 이 작품을 먼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리는 동생이 주로 맡았어요. 영상도 영상이지만 관객들이 소리에 능동적으로 귀 기울여주었으면 해요. 좀 더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한 행위니까요.”
전작 <고진감래>(2014)에서 적재적소에 다양한 음악을 배치해 서사에 힘을 더했던 파킹찬스는 이번 <격세지감>에서도 음악에 공을 많이 들였다. 박찬경 작가가 자세한 설명을 이어간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악기는 중동악기예요. 일부러 먼 곳에서 온 악기를 골랐어요. 배경은 한국인데, 음악은 이국적이고, 배우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데 화면에는 마네킹이 나와요. 이런 대조를 통해 좀 어리둥절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은유와 암시, 환기는 18세기 후반 상징주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으며, 이후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베를렌느의 시와 마그리트의 그림, 파킹찬스가 보여주는 세계가 연속선상에 놓인 셈이다. 12음계에 맞춰 발전해온 서양악기와 확연히 구별되는 음색 덕분에 사전지식 없이 작품을 접한 관객은 세트장을 창고, 혹은 버려진 미지의 공간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송강호, 이병헌, 이영애의 익숙한 목소리와 주변의 배경음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동안, 관객은 눈과 귀를 사로잡힌 채 강렬한 육체적 경험과 함께 속절없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박찬경 작가는 지난 준비 과정을 되짚었다. “구상하던 시기가 국정농단 스캔들이 한참 보도되고,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였어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대단한 용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영어 제목대로 ‘Decades Apart’, ‘분단된 시간들’에 대해 말해야 할 시점이다 싶었습니다.”
커리어가 갓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들은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압사 사건인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 삭발을 했고, 지지하는 정당의 광고에 출연했으며, 선거를 앞두고 지지 선언은 물론 각종 시상식의 수상소감에서도 소신 발언을 해왔다.
박찬경 작가는 커리어 자체가 ‘행동하는 작가’였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며 굵직한 미술상을 독식하는 작가이자, 작품 활동과 함께 담론을 생성하는 평론가로서 민중 미술에 대한 평을 남겼다. 무속신앙과 아시아의 근대화를 주제로 삼아 꾸준히 국내외 유명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시티 예술감독을 맡아 큐레이팅을 하기도 했다. 미술에 대한 담론과 질문을 모아 책을 출간했고, <만신>(2014)이라는 빼어난 장편영화를 선보이며 다양한 타이틀을 이름 앞에 달았다. 수단은 다양했으나 그가 가 닿고자 한 목적지는 늘 일관성이 있다. 더욱이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금 사업에서 배제된 당사자이기도 하다. “국정농단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식물인간처럼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죠. 미술계에서 자발적으로 한 노력들, 그간의 지원사업과 제도가 다 무력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척박한 환경에 있는 젊은 작가들이 더 어려워졌다는 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예술을 프로파간다로만 생각한 정권의 간섭이 결국 예술을 예술로 남지 못하게 한 셈이니까요.”
파킹찬스는 아이폰4로 촬영한 <파란만장>(2010)으로 2011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명창 이동백 선생의 목소리를 담은 <청출어람>(2012)에서는 잊힌 명창의 노래를 아름다운 산세의 풍경과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서울시민들이 참여한 영상을 기반으로 삼아 콜라주 기법으로 완성한 <고진감래>에는 유서 깊은 도시 서울의 민낯과 명암이 담겨 있다. 그들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날카롭고도 강렬한 미학을 추구해왔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관장 에르베 샹데스는 “예술가에게 100% 이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열린 자세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그들이 미지의 영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재단의 역할임을 강조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파킹찬스를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며 찬사를 쏟아냈다. 최효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은 “프랑스의 보석 브랜드에서 사회공헌적인 성격을 유지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현대미술에 대한 후원을 해왔다는 점이 놀랍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공 미술관인 서울시립미술관이 추구하는 지점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며 전시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이러한 경험은 파킹찬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박찬욱 감독은 전작들과 비교하며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세 부류의 관객이 있을 것 같아요. 2000년에 <JSA>를 영화관에서 본 사람, 당시에는 극장에서 못 보았지만 이후 DVD 혹은 TV를 통해 본 사람, 아니면 아예 <JSA>를 본 적 없고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사람, 즉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미술관에 와 <격세지감>을 맞닥뜨린 사람들. 이 세 부류의 관객을 예상하면서 모두에게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JSA>에서 가져온 장면이나 대사도 다양한 각도에서 고려했어요.”
<격세지감>에는 모호한 것, 규정되지 않는 것, 차원을 초월하는 것, 웃기면서도 슬프고, 엄숙하다가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몇몇 장면은 정지된 사진처럼 깊숙하고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다가도, 또 다른 순간에는 천연덕스럽게 영상에서만 가능한 시공간을 재창출하며 관객들에게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저는 오래전부터 사진을 진지하게 찍고 있어요. 사진은 영화와는 달리, 우연과 순간의 미학으로 제 숨통을 트이게 해줍니다. 제가 영화로 시작해 사진으로 가고 있다면, 동생은 그 반대에서 시작해 영화와 미디어 쪽으로 오고 있어요.” 조만간 한국에도 황금종려상을 여러 번 수상한 코엔 형제, 다르덴 형제와 같은 형제 감독이 등장하는 걸 기대해도 되는 거냐고 묻자 서로 그림 몇 장 안 그렸고 철학 공부 얼마 안 했다고 쑥스러워하다가 박찬경 작가는 “언젠가 장편영화를 같이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고 답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걸 꺼려하고,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일부 미디어 아트는 세계적으로 소수만 향유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개봉관에 걸리는 것과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일 거예요.”
만신 김금화를 다룬 박찬경 작가의 장편영화 <만신>에서 카메라가 촬영 현장을 조망하며 멀어지는 것처럼 <격세지감>의 엔딩은 묘한 기시감을 준다. 세트장을 벗어난 카메라가 쨍한 햇빛과 마주하고, 프레임을 벗어난다. 그 순간, 절묘하게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박찬경 작가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촬영을 앞두고 남양주에 답사 갔을 때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재미있을 거란 생각에 따로 사운드를 따서 사용했고요.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촬영된 공간이 세트장이었다는 걸 환기시키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의도로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지 묻자 박찬욱 감독이 주저 없이 답한다. “영화가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굳이 시대적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에 함몰되지는 않아요. 저는 미래의 세대, 관객들을 위해 영화를 만듭니다. 주변환경에 상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가장 하고 싶은, 가장 절실한 이야기를 해요. 한참 후에도 의미가 있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는 영화가 되겠죠. 그 판단은 시간이 할 겁니다. <격세지감>은 전시의 형태로 만나게 되는 만큼, 앞으로 또 어디로 가서 어떤 공간에서 어떤 관객들과 만나게 될까 궁금하네요.”
“형이 이야기했지만, 예술이 시대를 따라가는 데 급급해서는 안되죠.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일차원적인 비판과 분노를 표출하는 데만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저 너머를 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언젠가 평양에서도 <격세지감>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00년 6월 13일을 떠올려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하던 순간, 공항으로 마중 나온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활주로에서 기다리는 모습, 두 정상이 악수를 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모습은 뉴스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6월 13일, 17년 전의 이미지들은 흐릿해졌다. 길가에 배경처럼 나와 있던 사람들이 흔들던, 붉은색의 꽃들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도, 도로변에서도, 카메라가 담아내는 곳곳마다 흔들리던 종이꽃들. 그 이미지와 함께 당시 인상 깊었던 칼럼이 떠오른다. 역사적인 방북에 동행했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가 기고한 글이었다. 17년 전 나는 두 정상이 서로를 끌어안은 사진을 표지로 한 타임 지 아시아판을 천천히 오래오래 읽었다. “이 방북은 저에게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 속에 놓인 기분을 주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칼럼은 시작한다. <격세지감>을 보고 3D 안경을 벗으며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이 문장이 불쑥 떠올랐다.
기억 속 <JSA>의 장면과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는 가운데, 쓸쓸하고 버려진 현재의 세트장을 오가는 동안 그렇게 담긴 <격세지감> 속 장면이, 우리의 내면을 지나 기억을 환기시키고 돌아왔다. 낡은 기억이 현실과 맞닿아 찰나가 아닌, 영속성을 지니는 무엇으로 승화되는 것이었을까. 타르코프스키가 말한 “영화적인 체험”이 이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격세지감>을 본다면, 강렬한 영화적 체험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가져올지 기대가 된다. 이 탁월하고도 경이로운 형제가 앞으로 선보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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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희(문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사진 제공 모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