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요일의 인문학>과 <너 없이 걸었다>
책과 햇빛과 산책할 공간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독서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오히려 그것이 꿈같은 바람일지도 모른다. 장석주는 안성의 호숫가를 걷고, 자신의 서재에서 사유한다. 허수경은 독일의 작은 도시를 걸으며, 옛 시인을 생각했다. 그렇게 길어낸 깊고 명징한 사유가 담긴 두 권의 책이다.
“나는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다면, 책, 의자, 햇빛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덧붙여 사랑하는 사람들, 숲, 바다, 음악, 대나무, 모란, 작약, 제철 과일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책에는 가보지 못한 장소들, 한 번도 보지 못한 식물과 풍경들, 낯선 미지의 시간들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든다. 지적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책과 의자와 햇빛뿐이라 할 만큼, 장석주는 한국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책 중독자다. 읽을 책이 없으면 약품 부작용 주의서까지 뜯어 읽어야 한다는 그가 최근 펴낸 <일요일의 인문학>(호미)의 서문에는 이런 고백이 적혔다. “어떤 사람에게는 맥주 없는 인생은 달 없는 밤이요, 또 어떤 사람에겐 바흐 없는 인생은 벚꽃 없는 봄이라지만, 내겐 책이 없는 인생이 딱 그러하다.”
장석주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스타 편집자로 맹활약했던 1980년대를 뒤로 하고 지금은 전업 작가로 경기도 안성의 호숫가에 있는 ‘수졸재’와 서울의 작업실을 오가며 3만 권의 장서에 둘러싸여 있다.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을 통해 얻은 통찰과 인문학에 대한 52가지의 풍요로운 사유를 그는 이번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책은 1년의 52개 일요일에 맞추어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일요일의 인문학>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읽어 마침내 1년 만에 완독 하게끔 구성했으니, 일요일의 게으름에 기대어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읽어도 좋은 책인 셈이다.
장석주는 이 책에서 인문학이 홀대받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윤 창출에 예속되지 않고, 돈벌이가 되지 않기에 쓸모없는 것의 범주에 드는 현실을 꼬집는다. 대학조차 생산과 효용성, 이윤만을 목적으로 인문학을 축소하는 발상은 공리주의의 함정과 커다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인문학은 정신의 사막화를 막으며, 사람이 물신주의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지탱하도록 돕는다”며 인문학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에게 인문학은 “맛있는 것, 즐거운 것이다. 더러는 내면 여행, 영혼의 도약대, 꿈 공장”이다. 그렇게 그는 거듭해서 쓸모없는 것의 유용함을 역설한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것들, 시와 예술 따위가 지닌 쓸모없음이 인간을 구원한다. 인간만이 그런 쓸모없음의 유용함을 찾아낸다.”
장석주는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사유를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쉼과 여백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자신의 책이 삶의 항해에 지쳐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내면의 광합성’을 일으키기를 바란다면서. 걷고 읽고 사유하는 삶을 실천하는 구도자의 명상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허수경 시인은 23년 전 독일 뮌스터에 고고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인구 30만 명 중에 학생이 5만 명이 넘는 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그는 방학이면 발굴을 하러 떠나며 느릿느릿 박사학위를 받고, 글을 썼다. 독일어를 배운 지 10년이 넘어서면서 시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배낭에 시집을 넣고 수천 번도 더 걸었던 도시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방의 시인들 시를 읽으면서 이 도시를 드문드문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혼이 독일어로 쓰인 시들 과 겹쳐질 때 현대의 도시는 차갑지만은 않았다.
“그냥 한번 들르세요. 일부러 오기까지는 못하겠지만 이 근방을 지나가신다면 마치 기약 없는 나그네처럼, 훌훌 털어버린 가벼운 어깨를 하고, 그냥 한번.”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5번째 책으로 나온 허수경의 도시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는 이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유혹한다. 시인이 천천히 걷고 깊숙이 들여다본 뮌스터 사람들과 그곳의 시간에 독일 시인들의 시를 엮어서 소개하면서.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잘 알려진 시인은 물론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등 낯선 이름들도 등장한다.
뮌스터는 100여 개의 성당과 교회가 있는 도시, 비가 많이 오고 종소리가 자주 울리는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못생긴 건물이 많은 도시, 자동차보다 큰 권력을 가지고 쏜살같이 달리는 자전거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를 사유하며 시인은 “낯섦을 견디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고백한다.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려나,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시인에게 뮌스터의 중심지는 아직도 중세의 마지막 빛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4.3km 길이의, 수줍게 푸른 반지를 끼고 있는 듯 보이는 자전거길, 한국 중국 일본 이슬람의 칠공예품이 전시된 칠기박물관, 뮌스터의 옛 방어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남은 츠빙어, 대성당과 뮌스터아 강까지. 시인이 거닐던 곳을 따라가다 보면, 독일의 옛 시가 귓가를 맴돈다. 시인은 책을 맺는 글에서 “어느 도시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사라진 것들이 남긴 영혼의 어른거림을 붙잡으려고 한 기록이다”라고 썼다.
글 김슬기 매일경제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
* 이 글은 「문화+서울」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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