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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an 16. 2018

니트 디자이너 이준아

니트, 시간과 추억을 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좋은 옷을 사서 사촌끼리 혹은 형제들끼리 물려 입히곤 했다. 옷을 빠르게 제작하고 빠르게 유통하는 ‘패스트패션’이 유행이 되어버린 지금, 예전처럼 옷이 누군가의 유산이 될 순 없을까? 니트 디자이너 이준아는 좋은 품질의 니트를 아껴 입고 잘 손질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물려줄 수 있도록, 옷 자체의 스토리에 가치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1 러플 모자, 편물, 울 혼방, 2017.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터닝포인트가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두세 번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중학생 때 접했던 만화였다. 동네에 하나둘씩 생기는 책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는 것이 낙이었고, 신간 만화책을 사러 홍대입구에 위치한 한양문고를 가는 일이 기쁨이었다. 그러다가 만화부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코스프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스프레’라 함은 만화나 게임의 캐릭터로 분장하여 즐기는 하위문화인데 요즘은 전문적으로 의상이나 소품을 제작해주는 업체도 많지만 내가 막 시작할 때는 개인이 직접 준비하고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흑역사’에 가깝지만,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필요한 인내, 만드는 것에 대한 기쁨과 나의 적성을 발견하게 해준 고마운 사건이기도 하다. 처음엔 옷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전무했기에 그냥 바닥에 천 두 장을 놓고 옷 모양처럼 가위로 용감하게 잘랐다. 인체에 대한 이해나 옷의 디테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만든 거적때기 같은 형태에 불과했지만 매번 새로운 캐릭터의 옷을 만들 때마다 조금씩 기술과 노하우가 생겼다. 

하굣길에 시장에 들러 천을 떼다가 주말 내내 손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일요일이면 행사장으로 ‘출동’하는 이중생활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행사가 다가올수록 밤을 새는 날이 많아졌지만 잠을 못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패션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10대에 일찌감치 인생의 직업을 결정하여 전문적인 학과를 선택하기보다는 어떤 분야를 가든 도움이 될 만한 경영학과를 권하셨고,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일단 대학은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경영학과도 적성에 잘 맞았다. 회계는 힘들었지만 나름 마케팅이나 재무관리, 특히 생산관리와 상법이 무척 재미있었다. 잘 적응하여 자연스럽게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옷을 만들던 기억이 흐려지던 대학 2년 차 어느 날, 아버지가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아직 디자이너에 대한 꿈이 있다면 방학 동안 복장학원을 다녀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긴 인생, 기술 하나는 있어야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머지 인생을 위해 새롭게 도전했다. 막상 배워보니 적성에도 맞고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기회가 닿아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예비 패션 디자이너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2 팔과 다리 워머, 편물, 울 혼방, 2017.




소모품이 아닌 물려주고 싶은 유산

미국에 가자마자 니트에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학교 커리큘럼에 개설된 니트 수업은 4년을 통틀어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인기가 많아 3, 4학년이 되어야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에 6시간씩 8번 진행하는 수업이었는데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기엔 부족한 시간이라 체험 수업에 가까웠다. 니트의 매력은 졸업 후 컨템포러리 니트 디자이너와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인턴으로 일하며 가을/겨울 캡슐 컬렉션을 잠시 도운 적이 있었는데, 뉴욕과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니트 브랜드의 컬렉션을 보며 시장조사 및 영감이 되는 소재를 찾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그 이전엔 스웨터가 색상만 다르고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니 케이블의 크기, 위치, 모양, 조직의 색상, 배색, 기법, 실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으로 볼 수 없는 디테일은 직접 매장에 가서 하나씩 입어보고 만져보고 들춰보며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어느 날은 상사가 빈티지 마켓에서 1980년대 명품 카디건을 사왔다. 20년이 넘은 빈티지 카디건이었지만 60만 원대의 가격에 보관 상태도 양호해 새 제품 같았고 무엇보다 전혀 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양산하지 않아 특별해 보였다. 그때부터 니트와 빈티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최근 대량생산된 옷들이 매주 새로운 제품으로 쏟아져 나오고, 싼옷을 한 해 입고 버리는 것이 주된 소비 패턴으로 자리 잡아 옷이 소모품이 되어버린 현실이 너무 아쉬웠다. 옷에 담긴 스토리를 존중하는 문화가 다시 살아나길 꿈꾸며, 1980년대에 한창 쓰였던 브라더 수편기로 작업을 시작했다. 비싸지만 부드럽고 따뜻하며 유행을 타지 않는, 그래서 내가 입고 아래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미국에서의 일을 접고, 귀국하자마자 니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습 삼아 내가 필요한 것을 짜기 시작했다. 초기엔 작품 하나에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더 많은 연습을 위해 성인복이 아닌 아동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함께 살던 3살배기 조카가 모델로 딱이었다. 만들다 보니 아동복은 성인복과 많이 달랐다. 성인은 색에 제약이 많아 기법을 교차 사용하여 디자인의 디테일을 더한다면, 아동복은 보다 적극적으로 색을 활용할 수 있었다. 기법의 변화보다는 색을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때문에 초기의 작품과 아동복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의 작품은 꽤 다르다. 색을 많이 사용하면 2단마다 색을 바꿔가며 캐리지(carriage)를 좌우로 밀어야 하는데 등과 어깨가 너무 아파 색을 바꿀 필요가 없는 단순한 작업을 할까 싶다가도 예전의 향수를 떠올리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다. 

니트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초기 ‘피팅 모델’로 도움을 줬던 조카는 어느새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되었다. 처음엔 단순히 다양한 텍스타일을 개발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연구를 집중했다면, 요즘은 조카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반추하며 1980년대의 감성과 2010년대의 감성,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를 떠올리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른이지만 어린이 같은 ‘어른이’인 내 모습을 주제로 실과 색을 이용해 끊임없이 놀이를 계속할 예정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상사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아직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내 꿈을 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는데 돌아가야 했던 그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당시엔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좌절의 순간도 앞서 벌어졌던 여러 번의 터닝포인트처럼 지금의 나로 이끌기 위한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기대해본다, 다가올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3 머플러, 편물, 울 혼방, 2017.





글·사진 이준아
80, 90년대 볼 수 있던 편물기로 직접 니트를 짜고 작품을 만든다. Fabloop(패블루프) 브랜드(www.fabloopofficial.com)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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