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콩쿠르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느끼는 딜레마
100미터 달리기에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마의 10초’가 1960년대에 허망하게 깨진 이후로 육상의 역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9초대의 기록을 우후죽순처럼 쏟아냈다.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선보인 체조선수 양학선의 뜀틀 신기술은 몇 년이 지나면 다른 선수들도 필수 기술인 것처럼 수행할 것이다. 16년 전에는 여홍철만 가능했던 ‘여투’기술이 흔해진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단지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존재하지 않는 한계일 뿐일까.
리스트가 연주 시간이 30분이 넘는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을 때만 해도 당시 피아니스트들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10대 청소년의 레퍼토리가 되다시피 한 곡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수행하는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왔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소식을 얼마 전에 접했다. 국제 콩쿠르에 우리나라 피아니스트가 2~3위에 입상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는 이례적으로 1위에 올라 지상파 뉴스 메인에까지 등장했다. 오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성진의 우승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 음악가들이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콩쿠르의 입상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최근 몇 년간 두드러진 현상이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위를 했고(이때 조성진은 3위에 올랐다),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 밖에도 1995년 이후로 국제 콩쿠르의 결선에 오른 한국인은 400명이 넘는다. 이렇게 특이한 현상은 유럽에서도 이목을 끌어, 벨기에 공영방송 RTBF에서는 한국의 음악교육 현장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국제 콩쿠르에서 다수가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권위적인 콩쿠르에서 상위권으로 입상하지 않으면 음악가들이 한국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앞에 언급한 대로 같은 입상이어도 등수에서 같은 한국인에게 밀린 조성진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고 활동 중인 현역 연주자들도 커리어를 한층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세계적인 콩쿠르에 도전장을 내기도 한다.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클라라 주미 강이 출전했을 당시 그에 대한 동정론까지 일 정도였다. 이렇게 국제 콩쿠르가 아니면 유명해지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음악인들은 결국 콩쿠르에 적합한 연주자로 어릴 때부터 길들여지게 된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필자가 대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 작곡 전공자들만을 위한 현대음악 수업에서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피아노 전공생 친구에게 음반을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리게티는 현대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만 아는 정도였기 때문에, 친구는 ‘귀신이 우는 소리 같다’며 생소해하고 약간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콩쿠르 지정곡으로 자주 쓰이고 대학생이 연주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작곡 당시에 연주가 불가하다며 묻힐 뻔한 수많은 작품과 비슷한 운명을 지닌 것이다.
콩쿠르와 같은 시스템에 대해 ‘예술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논의는 곳곳에서 벌어져왔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측면으로 콩쿠르를 관찰하고 싶다. 예선을 거쳐 1차, 2차 본선, 그리고 결선으로 넘어오는 콩쿠르의 철저한 필터링 시스템을 보고 있자면, 기본적으로 테크닉이 훌륭해야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음악가의 운명을 보게 되고,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스포츠 선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스포츠 기술의 발전과 흡사한 현상을 예술계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가요계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순수한 개성을 지닌 뮤지션 여럿이 주목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참가자 대부분이 엄청난 가창력을 보유하고 있고, 해가 거듭될수록 참가자들의 평균 실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가자들이 개성을 잃어간다고 느껴진다. 만약에 유재하나 김현식 같은 가수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서 약에 취한 사람처럼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주하는 글렌 굴드 같은 피아니스트는 클래식 음악 콩쿠르에 서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초중반에 유명했던 음악가들은 대체로 요즘보다 개성이 뚜렷하고 괴짜 같은 사람이 많다고 느끼는데, 이는 콩쿠르로 인한 음악계의 경쟁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데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짐작된다. 지금에 와서 테크닉의 발전이 오히려 연주의 획일화를 낳은 듯한 모양새라고 느끼는 것은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성이 강한 음악가일지라도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테크닉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음악계의 경쟁 구도가 딱히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콩쿠르로 인한 무한경쟁과 연주 수준의 빠른 성장이 되레 순수함을 잃게 만든다고 하면 무리한 주장일까? 1980년대까지 가요계 싱어송라이터들은 비록 아마추어 수준의 가창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그 시와 같은 함축된 의미를 지닌 가사를 아이돌 가수들이 연기하듯이 노래한다.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받아 노래와 춤, 연기 등 두루 실력을 갖춘 연습생 출신의 준비된 스타들이 즐비한 요즘, 그 분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다양성은 오히려 측정하기 힘들어진 게 아닐지. 마치 경시대회 문제를 미리 풀어보고 준비한 사람들로 인해 현장에서 마주한 어려운 과제를 순발력 있게 풀어나가는 능력을 측정하는 대회의 본기능을 상실한 것과 같이 느껴진다. 같은 꿈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필터링은 필요하지만, 그런 경쟁 구도가 극대화될수록 예술 본연의 순수함과 다양성을 찾기 힘들어진 것 같아 약간은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글 신지수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마친 후 현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
홈페이지 www.jeesooshin.com | 블로그 jagto.tistory.com
* 이 글은 「문화+서울」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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